거리 두기라는 ‘마왕’의 낯선 드라마 공식

데이빗 핀처 감독의 명작, ‘세븐’을 보면 연쇄살인범을 좇는 형사 밀스가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한 걸 알게되고 ‘분노’를 참지 못해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이 순간 형사는 살인자가 되고 연쇄살인범은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범법자와 법을 집행하는 자 사이는 이렇듯 백지 한 장 차이로 구분된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퍼즐을 푸는 듯한 드라마의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마왕’이 던지는 질문도 다르지 않다. 자신은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나쁜 놈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강오수(엄태웅) 형사가 맞닥뜨린 현실은 끔직하다. 그것은 첫 번째 경고문 그대로다. ‘진실은 친구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사건을 좇던 그가 사건의 실마리를 통해 알게되는 것은 범인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의 기억. 강오수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일의 진실이 주는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보통의 형사물이나 스릴러를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범인을 좇던 형사가 결국 그 범인은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로 드라마화시키기에 어려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있어 이만큼 강력한 소재는 없을 것이다. 강오수와 오승하(주지훈)는 상황의 양 끝단에 서서 정반대의 길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형사는 피의자가 되고, 범인은 피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마왕’이란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거리 두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시청자가 특정 캐릭터에 동화되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전체 피스를 손에 쥔 채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듯이 사건 전체를 생각하며 보게 만들기 위함이다. 기존 감정이입의 법칙에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너무 어렵고 힘겹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왕’이란 드라마를 보는 진짜 재미이다. 지금까지 가볍고 쉬운 게임에 질력이 났던 시청자라면 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복잡한 게임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화면 상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늘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그것은 때론 마치 훔쳐보듯 멀리 떨어져서 보여주는 카메라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빛과 어둠이 명백한 조명 탓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론 사건 전개에 있어서 바로 이어져야 이해가 쉬울 신과 신 사이를 일부러 띄어놓는 장치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거친 듯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 탓이기도 하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화면에 구성된 캐릭터들은 전체로 보여지지 않고 주변 사물들에 걸쳐져 가려지거나 갇혀진다. 마치 캐릭터들은 그 갇혀진 화면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화면이다.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각 위에 그려진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치 카메라는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분할되거나 가려진 공간 속에 놓여진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우리는 퍼즐 조각을 바라보듯 집중해서 바라본다. 그 안에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마왕’이란 드라마는 지금껏 등장했던 여타의 드라마들과 달리, TV 속의 드라마와 TV를 보는 시청자 사이의 간극을 넓혀놓았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빠져들고 동화되어 보는 드라마에서 탈피해, 철저히 이화되고 객관화시켜 봐야 보이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다분히 매니아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늘 같은 공식에 같은 인물들이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들만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늘 같은 밥상에 같은 반찬을 맛봐야 했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낯선 반찬에서 왠지 모를 대접받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왕’을 좀더 재미있게 보는 법

“한 꺼풀 벗겨내면 또 다른 의문이 증폭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만 같다.” 드라마 ‘마왕’이 주는 새로운 재미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낯선 시청자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지루하고 복잡하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매니아 드라마’라는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억울한 느낌이 있다. ‘다르다’는 것이 외면의 사유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여타의 우리네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재미를 주는 요소도 다르고 재미를 전달하는 방법도 다르다. 좀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 - 기본구도로 사심 없이 바라보기
무언가 긴박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카메라는 현장을 훑어내면서 많은 추측과 단서들을 쏟아낸다. 12년 전 사이코메트러(물건에 기록되어 있는 잔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자) 해인(신민아)은 현장에 떨어진 물건들을 통해 한 고등학생이 칼에 찔려 살해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은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의 12년 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는 오수(엄태웅)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고, 오수에게 칼을 맞은 승하(주지훈)의 형이 있었다. 승하는 죽어 가는 형을 위해 긴박하게 구조를 요청하고, 뒤늦게 현장의 잔상을 통해 해인은 그 장면들을 보게 된다. 관계는 이 장면 하나로 명확해진다. 12년 후 변호사가 된 승하가 형사가 된 오수와 그의 친구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날릴 거라는 것. 이 대결구도는 너무나 명확해 심지어 맥이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도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앞으로 끌고 들어갈 미궁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할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 미궁을 즐기기
막상 이런 설정을 갖고 보면서도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 대결구도에 장애물들을 수없이 설치해두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직업이다. 오수는 자신의 말대로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자신이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객관적으로 ‘나쁜 놈들’이다. 오수의 형인 강희수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비서로 일하는 석진(김영재)은 희수의 처와 바람을 피운다. 윤대식(한정수)은 해결사에 가까운 사채업자이고 김순기(오용)는 절도, 폭력 전과자이다.

오수라는 털털한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칼잡이를 싫어한다”는 대사는 ‘칼쓰는 나쁜 놈들’을 싫어한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12년 전의 악몽과 연관되면서 ‘그랬던 자기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로도 중첩된다. 여기에 변호사로 등장하는 승하는 상황을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억울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인자를 구원하기도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양면성이 활용되면서 승하라는 인물이 나쁜 놈인지 좋은 놈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오수의 집안은 무언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드라마의 첫 희생자인 권현태(이도련) 변호사는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보이는 오수의 아버지 강동현(정동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 집안의 문제들을 덮어왔다.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12년 전 오수의 사건에서도 그가 진실을 덮어버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추리하게 만든다. 그의 살인범으로 승하가 아닌 조동섭이 자수를 하지만 조동섭의 대리역으로 승하가 변론을 맡는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승하와 관련을 짓는다.

재미있는 것은 승하가 오수의 친구인 김순기를 변론해 풀려나게 해주면서도,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조동섭의 대리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수에게 승하라는 존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승하는 살해된 권현태 변호사를 ‘스승 같은 인물’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장치로 보인다. ‘스승’이란 늘 좋은 것만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우리네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어쩌면 승하가 말한 스승이란 ‘진실을 덮는’ 권현태 변호사로부터 뼈저린 상처를 통해 배웠고 그래서 변호사가 된 자신도 그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단순했던 대결구도는 직업과 주변인물들의 관계를 통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단단히 최초의 실마리를 잡고 나가야 한다. 이 야누스처럼 변하는 인물들이 주는 미궁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추측해야 한다. 그 추측이 맞았을 때 느끼는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틀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전의 의미로서 쾌감을 줄 것이다.

세 번째 - 작가와의 두뇌게임
여기서 한 차원 더 나간다면 이젠 작가와 한 판 두뇌게임을 벌여보는 것이다. 작가와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수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들춰보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 그 첫 번째 단서는 사이코메트러라는 독특한 능력자가 왜 등장하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오수와 승하의 대결구도와 그 속에서 말하려는 선악의 문제나 진실과 정의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꼭 사이코메트러 같은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녀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은 이 드라마의 의도가 보여주는 ‘진실은 무엇인가’에 적합하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물론 후반에 가서는 좀더 명확한 진실에 근접할 것이지만, 초반부인 지금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추측을 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활용된다. 그러니 그녀가 보는 비전에 너무 의미를 두다가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드라마 상 사이코메트러인 해인이 이 사건에 끌어들여지는 것이 과연 형사들의 수사를 위한 것이냐는 점이다. ‘예전에 그녀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는 점은 그녀가 마치 수사를 돕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낸 것은 형사가 아니라 그녀가 만든 타로카드가 살해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카드를 놓거나 택배로 보낸 인물은 처음부터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형사가 아닌 살인자가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역할은 사건해결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살인자가 살인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진실로, 12년 전 그 장소에 있던 인물들을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마왕’이 단순한 범죄물이나 형사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는 범인을 잡는 드라마가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이것은 승하가 오수에게 던지는 대사 속에 집약되어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제각기 다르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유리한대로 조금씩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기억’, ‘거짓말’,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작가는 왜 이다지도 시청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혹은 드라마적 관습에서 굳게 믿고 있는 편견들을 효과적으로 부수기 위함이다. 형사와 변호사의 역할, 선악구도에 대한 편견 같은 것 말이다. 사실 혼란에 빠진 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편견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마왕’은 좀더 작가와의 즐거운 두뇌게임을 요구한다. 그것이 즐거울수록 견고했던 편견들이 깨져나가는 카타르시스의 깊이는 더 클 것이다.

달라진 환경, 시청률 믿을만한가

‘주몽’,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거탑’ 같은 굵직한 드라마들이 일제히 종영한 상황에서 새로운 드라마들을 들고 나온 방송 3사의 시청률 경쟁이 과열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 수목극 경쟁은 시청률 차이의 격차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누가 실질적인 1등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상황. 편법적인 편성시간 배정이 시청률 순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이렇게 방송사들이 시청률에 집착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은 광고수익이라는 실질적인 이득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한 편의 시청률 높은 드라마가 방송사의 기업 이미지까지 높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한 편의 드라마는 여타의 프로그램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쳐 ‘주몽’같은 경우 월화의 뉴스 및 개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에도 그 후광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이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시청률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 시청률 조작사건논란이 터졌을 때 불거져 나왔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대신 이것은 최근 달라지고 있는 시청자들을 기존 시청률 집계가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하얀거탑’과 같은 전문직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 논의는 탁상공론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청자의 존재를 담아낼 만한 이렇다할 새로운 드라마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하얀거탑’이라는 본격적인 전문직 드라마의 등장은 그 수면 밑에 있던 새로운 시청자들이란 존재를 예측하게 만들었다.

50% 이상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몽’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하얀거탑’의 평균시청률은 고작 16%(TNS 집계). 마지막회에만 23.2%로 20%를 넘겼을 뿐, 나머지는 모두 1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 많은 댓글과 반응을 보인 ‘하얀거탑’의 시청자들은 드라마폐인으로 대변되는 매니아집단이거나, 혹은 TV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이 본 사람들이라는 것.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 두 예측은 같은 줄기에서 나온 다른 얘기로 볼 수 있다. ‘하얀거탑’과 같은 전문직 드라마의 탄생에는 저 물밑에서 감지됐던 미드, 일드 매니아들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시청률 집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들로 TV보다는 인터넷이 더 가까운 시청자들이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다운로드받은 드라마를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과연 이들 매니아집단을 일부 소수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매니아라고 하면 마이너리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인터넷이란 매체의 등장과 관련이 있는데, 초창기 이 세계를 바꿀만한 충격적인 매체의 등장에 대해 상대적으로 적응속도가 늦었던 기성세대들이 달라진 젊은 세대들의 생활패턴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지금, 매니아의 의미를 소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상 그걸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매체 속에서 모두 매니아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즉 달라진 환경 속에서 매니아적 성향은 특정 소수집단의 행동이 아니고 대부분의 성향이라는 것이다. 이제 매니아라는 말은 소수가 아닌 좀더 집중력 있고 충성도 높은 일반인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런 의미의 매니아가 드라마에 있어서 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그 매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TV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적으로 보고 지나가지만(물론 VTR로 녹화해서 반복해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은 그 자체가 저장성을 갖는다. 다운로드받는 순간 몇 번씩 반복해서 볼 수 있고 정지시켜 특정 장면을 분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쉬운 구조의 드라마들에 식상해버린다. 마치 대학생에게 초등학생 덧셈 뺄셈 문제를 풀라고 하는 식이다(실제로 TV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지적 수준으로 드라마를 90% 이상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룬다).

이것은 이들이 미드와 일드에 열광하는 이유이자 우리에게 전문직 드라마의 출현을 요구하는 이유가 된다. 이들의 질문은 “왜 우리는 없는가? 왜 우리는 안 되는가?”에서부터 비롯된다.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바로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우리네 식상한 드라마가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하나의 대세이고 우리네 드라마가 가야할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우리 드라마의 시장은 국내가 아닌 세계로 넓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은 우물 속에서 성장하지 못해 결국은 죽게되는 상황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야 하고 투자도 글로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달라져야할 것이 있다.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이 달라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시청률 기준이다. 공중파와 시청률 집계 조사기관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구태의연한 시청률 분석을 고수하고 있는 한, 드라마 발전은 저해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너무 시청률로만 보는 건 좋지 않지만, 기왕 시청률로 본다면 제대로나 해야되지 않을까.

‘하얀거탑’이어 ‘마왕’ 주제가 부르는 바비 킴

고현정이 드라마로 복귀해 화제가 되었던 ‘여우야 뭐하니’에서 천정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나오는 노래, ‘고래의 꿈’.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고뇌 어린 얼굴에 흐르던 노래, ‘소나무’. 모두 ‘힙합대부’에서 ‘소울의 제왕’으로 돌아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바비 킴(본명 김도균)의 곡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는 이유는 바비 킴 특유의 음악적인 맛 때문이다. 그 맛은 마치 레스토랑에서 먹는 시큼털털한 김치 같다. 힙합이라는 서구적 음악형식에 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고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식으로 흔히 말하는 ‘뽕끼’가 가득한 음악을 내놓으니 말이다. 즉 매력적이고 세련된 멜로디에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묻어나는 음색과 개성이 드라마 같은 극적인 장르에 잘 녹아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바비 킴으로서의 개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을 발하며 주목을 받게된 2집 앨범 ‘Beats Within My Soul’에 오기까지 그는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돌아왔다. 1994년 레게 힙합을 선보인 닥터레게 싱글의 성공으로 장밋빛 미래가 보였던 것도 잠시, 앨범 출시 2주만에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그는 줄곧 실패를 거듭해왔다. 그에게 힙합대부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윤미래, 리쌍, 다이내믹 듀오, 버블 시스터즈, 드렁큰 타이거 등의 가수들과 작업해온 결과. 정작 본인은 늦깎이 힙합 가수로서 ‘랩 할아버지’란 별명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98년 솔로로 낸 1집 앨범 ‘Holy Bumz Presents’에서 그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바비 킴은 2집에 와서는 완전한 자기 스타일의 소울을 선보인다. 흑인음악을 그저 흉내내는 것이 아닌 온전히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작업을 보여준 것. ‘고래의 꿈’으로 대표되는 그 곡들은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단순한 리듬에 바비 킴만이 소화할 수 있는 나른한 음색이 만나 절묘한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놓는다. 1집에서처럼 그의 목소리는 굳이 격하지도 않고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그 가사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청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어깨의 힘을 빼자, 호소력은 더 짙어진다.

최근에 낸 3집 앨범, ‘Follow your soul’은 앨범명에서 드러나듯 좀더 소울이 깊어진 느낌이다. 2집의 실험적인 스타일에서 좀더 안착한 느낌이랄까. ‘파랑새’라는 곡은 여러모로 전작 ‘고래의 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고래의 꿈’이 바다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냈다면, ‘파랑새’는 그 향수의 대상을 하늘에서 찾아낸다. ‘고래의 꿈’의 분위기를 그의 아버지인 김영근씨의 트럼펫이 만들었다면 이번 ‘파랑새’는 전제덕의 하모니카가 합세한다. 랩보다는 힙합 베이스에 멜로디 중심의 소울을 구사하는 바비 킴의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곡이다.

바비 킴은 오는 3월21일 새롭게 시작하는 엄태웅, 주지훈 주연의 KBS 드라마 ‘마왕’에서도 주제가를 부를 예정이다. ‘하얀거탑’의 ‘소나무’에 이어 이번엔 어떤 음악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자못 궁금하다. 드라마를 통해 새삼 바비 킴의 음악을 기대하는 것은 최근 OST 시장이 새로운 가요계의 탈출구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된 가수가 아닌 진정으로 노래하는 음유시인, 바비 킴의 드라마 나들이가 여타의 실력 있는 가수들의 전범이 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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