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영, <적도>를 거쳐, <서영이>를 넘어 <목소리>로

 

이보영. 사실 <적도의 남자> 이전 그녀가 무슨 작품을 했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03년도에 데뷔해 드라마만 무려 16편을 찍은 그녀였지만 존재감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심지어 차갑게까지 보이는 이지적인 이미지가 작용했다. 매력은 밖으로 발산되기보다는 안으로 꾹꾹 눌러졌다. 드레시한 옷을 입고 나오는 신데렐라는 그녀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적도의 남자>는 비로소 이보영의 매력을 찾아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여자. 중견기업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다 집안이 몰락하자 생활전선으로 뛰어나온 여자. 그래서 숨기려 해도 밖으로 드러나는 도도함과 이지적인 매력. 게다가 이 여자는 시각을 잃어버린 첫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여자다. 단단한 이성의 껍질로 고고하게 서 있는 여자가 어느 날 그 껍질이 깨지는 사랑 앞에 여성을 드러낼 때, 이보영의 매력도 활짝 피어났다.

 

<내 딸 서영이>는 <적도의 남자>의 이보영이 가진 매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혼자서도 세상과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서영이였다. “늘 아버지 행동이 자식들 위할 거라는 착각 이제 그만 좀 두세요.” 이 도발적인 대사는 아마도 이보영이 아닌 그 누군가가 했다면 더 큰 정서적인 논란이 생겨났을 지도 모른다. 서영이라는 인물의 정당성은 그래서 상당 부분 이보영의 이미지에 기댄 면이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이제 이보영의 매력, 활용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보영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빈 구석(?)을 한껏 드러냈다. 국선변호사로서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천연덕스레 연기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어린 박수하(이종석) 앞에서 매번 속을 들키고 망가지는 모습은 심지어 그럼에도 여전히 도도해 보이는 이보영의 매력을 더욱 강조시켰다. 이보영은 드디어 자신의 매력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와 두 차례나 연거푸 연기하게 된 변호사라는 직업은 이보영의 매력이 단지 섹시함이나 백치미 같은 여성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녀는 심지어 보이시할 정도로 지적인 워킹 우먼으로 서 있을 때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단색의 스커트에 소박해도 깨끗하게 빤 흰 블라우스만 입고 있어도 여성들의 워너비 의상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는 치열한 생활 전선 속에서도 자신의 기품을 잃지 않는 능력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그저 멜로의 대상이 되는 여성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지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적도의 남자>에서 정의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 시선을 던졌고, <내 딸 서영이>에서는 부모 세대와의 갈등을 겪고 홀로서기 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물론 달달한 연애에서 늘 진심이 들키는 여성이면서도 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국선변호사이기도 하다.

 

이보영의 멜로나 가족드라마가 사회적 소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이지적이고 능동적인 워킹 우먼의 이미지 덕분이다. 복수극의 틀 속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꼬집어낸 <적도의 남자>가 그렇고, 지극히 가족드라마의 공식 안에 있으면서도 그 무수한 세대 간의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던 <내 딸 서영이>가 그렇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예 이 소통의 문제를 멜로와 사회극의 두 차원에서 다룬다.

 

긴 긴 무명생활의 <적도>를 거쳐 모든 세대를 아우르게 했던 딸 <서영이>를 넘어선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때로는 뜨거울 정도로 감성적이며, 때로는 귀여울 정도로 허술하면서, 때로는 꾹꾹 눌려 숨겨둔 슬픔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그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그녀가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워너비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현실과 싸우려면 이 정도의 당당함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으려면 그만큼의 지극히 여성적인 귀여움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바야흐로 무수한 이보영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꿈꾸게 되는 시대다.

<상어>, 복수극과 멜로 사이에서 길 잃었나

 

박찬홍 감독에 김지우 작가. 드라마를 좀 봤다 싶은 시청자들에게 이 이름은 각별할 것이다. <부활>과 <마왕>이라는 이들의 전작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들은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모두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로서는 너무 앞서가 보였던 꽉 짜인 스토리 전개를 시청률이 따라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상어(사진출처:KBS)'

<상어>는 이들의 아우라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품이다. 시작 전부터 김남길과 손예진의 합류로 기대감을 한껏 모았던 것도 전작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정적인 영향도 존재한다. 그것은 전작들이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점. 따라서 마니아 드라마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시청률은 안 나와도 호평은 받는.

 

하지만 <상어>가 과연 마니아 드라마일까. 아마도 1,2년 전만 해도 그런 호칭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미 <추적자> 같은 작품이 복수극과 사회극의 접점으로써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싸인> 같은 작품 역시 형사물이나 스릴러는 드라마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뒤집은 바 있다. 그렇다면 <상어>는 이들 작품과 비교해 과연 웰 메이드라 말할 수 있을까.

 

<상어>의 이야기 구조는 <추적자>와 유사하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방식이 그렇고,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틀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다. <상어>가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장 오현식(정원중)이 진실을 위해 과거를 파헤치려는 검사 며느리 해우(손예진)에게 “묻어둬. 과거란 들출 때만 존재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즉 이 드라마는 우리의 근대사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뿌리 깊은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한 가족사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가야호텔그룹 회장인 조상득(이정길)은 그 과거사를 덮으려 하는 인물이고 그 과정에서 이수(김남길)와 가족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조상득의 손녀 딸인 해우는 조상득의 과거사와 연관된 오현식의 아들 준영(하석진)과 결혼함으로써 복잡한 가족 내의 숨겨진 갈등이 생겨난다. 기성세대들은 과거사를 덮으려하고 이수를 여전히 잊지 못하는 그의 친구(이자 여전히 연인)들은 그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려한다.

 

그리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전작과는 달리 주제의식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드라마의 대중적인 코드들에 더 충실해졌다. 이수가 돌아왔지만 본격적인 복수극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몰라보는 이수와 해우 사이의 안타까운 멜로나, 이수와 준영 사이의 우정 또는 이수와 관계된 과거 인물들(동생, 친구 등)과의 만남 등에서 머뭇대고 있는 건 그 헤어진 이들이 다시 만나는 시퀀스들이 전형적인 드라마들의 성공방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어>의 연출력은 ‘웰 메이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또 이를 연기하는 김남길이나 손예진의 호연 또한 볼만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어딘지 너무 지지부진하게 여겨진다. 이수의 말 한 마디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해우로 하여금 과거의 그를 떠올리게 하고 그녀를 뒤흔드는 시퀀스들은 너무 반복되면서 지루해져버렸다. 이 드라마는 물론 과거의 불편한 문제를 다시 들춰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드라마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건 어딘지 정체된 느낌을 만들어낸다.

 

<상어>는 멜로와 복수극이 얽혀있는 드라마다. 복수극이 드라마의 속도감을 만들어낸다면 멜로는 감정을 덧붙인다. 이 두 가지가 잘 엮어진다면 그 힘은 의외로 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어>는 멜로의 늪에 빠져 복수극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을 파헤쳐야할 검사 해우의 혼돈과 방황에 드라마가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이수의 복수극은 물론 여타의 복수극과는 다르다. 그것은 해우의 눈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에 얽혀 있는 불편한 과거사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우를 사랑하는 이수 역시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진실을 그녀 앞에 내놓으면서도 “도망치라!”고 분열되는 것. 이것은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것 같은 비장미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감정에 드라마가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이 좋은 설정마저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된대.” 이것은 이수가 처한, 진실을 밝혀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어지는 상황을 에둘러 말하는 것일 게다. 해우는 상어 조각을 만들어 이수에게 주면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부레도 만들어 줬어. 언제나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 하려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수에 대한 해우의 사랑을 담고 있다. <상어>가 더 속도감이 있어지려면 안타까워도 해우가 달려 하는 부레를 떼어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다. 상어처럼.

<목소리>의 이종석, 진실과 진심을 보는 소년

 

만일 누군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이하 목소리)>는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가정법의 드라마가 새로운 건 아니다. SF 판타지 장르에서나 판타지 멜로 등에서 자주 봐왔던 설정이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이것과는 결을 달리 하는 새로운 이종결합이 시도되고 있다. 바로 사회극과 멜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끔찍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는 수하(이종석)는 바로 그 사건 현장에서 타인의 속내를 읽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한 혜성(김소현, 이보영)이 자신을 죽이겠다 협박하는 살인범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하를 위해 증언에 나서면서 수하의 사랑이 시작된다. 결국 범인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어린 수하의 말 한 마디가 이 드라마의 사회극과 멜로가 엮어지는 부분이다.

 

그래서 수하가 누군가의 속내를 읽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진심이다. 즉 진실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게 되면 드라마는 사회극으로 치닫게 되고, 반면 진심 쪽으로 기울게 되면 휴먼드라마나 멜로로 흘러가게 된다. <목소리>는 그래서 이 사회극이 만들어내는 정의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수하와 혜성의 멜로가 엮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그려낸다.

 

사실 우리네 드라마에서 멜로는 가장 흔한 소재이면서도 여전히 고정적으로 먹히는 소재다. 제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멜로가 빠져버리면 보편적인 시청층을 가져가기가 어려운 게 우리네 드라마 현실이다. 그러나 정통 멜로는 역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멜로의 변형으로서 사회극이라는 보다 서민들에게 현실적으로 공감대를 줄 수 있는 장르가 덧붙여지면 드라마는 그만큼 힘을 얻게 된다.

 

달달한 수하와 혜성의 연상연하 멜로가 주는 풋풋함을 즐기면서 동시에 그들이 목격하는 사회정의의 진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진지함이 곁들여지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판타지의 설정은 멜로나 사회극이 그 자체로 빠질 수 있는 드라마의 공식을 탈피하게 해준다. 세월이 흘러 국선변호사가 된 혜성 앞에 수하가 나타나 자신의 친구의 억울함을 증명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한 증거 제시나 증언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수하와 혜성이라는 두 축으로 움직이게 마련이지만, 두 사람 중 더 집중되는 것은 역시 수하다. 그만이 볼 수 있는 진실과 진심이 먼저 우선되는 것이고, 그 진실과 진심을 혜성에게 전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어떤 문제를 풀어나갈 때 그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멜로가 작동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 드라마가 가진 거의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 데는 이종석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매력이 절대적이다. 이종석은 <학교 2013>에서 풋풋하면서도 자못 심각한 우리네 청춘의 자화상을 잘 소화해낸 경험이 있다. 특히 장난기 어린 모습과 절절한 감정이 뒤섞인 이중적인 이미지는 그가 이 드라마에서 소화해내야 할 연상연하의 멜로와 사회극의 진지함에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종석의 이 양면을 동시에 끌어안는 이보영의 연기변신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지만.

 

단 2회 만에 <목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간 수목극들이 너무 전형적인 장르의 틀 속에서 전형적인 이야기만을 전해주거나 지나치게 이질적인 것을 섞어 너무 낯설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목소리>는 멜로와 사회극을 판타지로 엮는 신선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사랑과 정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르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묶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진실과 진심을 보는 매력적인 소년, 이종석이다.

 

<구암허준>, 허준과 예진, 예수와 마리아처럼 보이는 이유

 

<구암허준>에서 허준(김주혁)과 예진(박진희)의 관계는 여타의 드라마들이 그리는 남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허준은 이미 다희(박은빈)와 혼례를 치른 기혼자. 허준과 다희의 부부관계는 그 누구보다 애틋하다. 드라마는 사실상 허준이라는 명의를 만든 것이 다희의 내조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토록 구박하는 오씨(김미숙)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모은 돈을 내의원 시험 보러가는 허준에게 건네는 다희의 모습은 전형적인 조강지처 그대로다.

 

'구암허준'(사진출처:MBC)

그렇다면 이 사극에서 사실상의 여주인공인 예진이 있는데 왜 허준은 다희와 이미 혼례를 치른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걸까. 전형적인 드라마라면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멜로는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구암허준>은 애초부터 남녀 간의 멜로를 포기했다. 예진이 허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에 가깝다. ‘부디 심의가 되셔서 천형을 지고 사는 병자들의 고통을 벗겨주십시오.’ 과거를 보러가는 허준에게 보낸 예진의 편지에는 그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허준과 예진의 관계는 <구암허준>이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구암허준>은 서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저잣거리에서 행패나 부리던 허준이 의술을 배워가면서 차츰 심의(心醫)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길이 아니라 성인의 길이다. 대풍창(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삼적대사(이재용)가 약재를 실험하기 위해 스스로 독한 약을 먹는 모습이나, 그의 밑에서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허준, 예진은 그래서 인간이라기보다는 성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허준과 예진은 마치 성경에서 나병환자를 구하는 예수와 마리아를 닮았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가난 때문에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 병자들을 구하는 허준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의성(醫聖)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도지(남궁민)와 그 일행들이 과거시험 때문에 눈앞의 병자를 내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 그 많은 병자들을 돌봐주고 떠나는 길에 마을주민들이 “이 은혜를 어떻게 갚냐”고 하자 허준은 오히려 이런 말을 한다. “병자들을 다 보지 못하고 떠나 죄송한 마음일 따름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허준에게 거짓말을 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돌쇠(이계인)의 에피소드 역시 의성 허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겠다며 뿌리치던 허준은 결국 쓰러진 병자를 외면하지 못한다. 자신의 노잣돈을 털어 약을 사오게 하고 갑자기 쓰러진 병자를 살리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병자의 입에 넣어준다.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을 막은 돌쇠에게 화가 날 법도 하지만, 허준은 그 돌쇠의 절실함을 이해한다.

 

<구암허준>은 그저 의술의 길을 통해 어의에까지 오르는 허준의 그 출세와 성장담을 그리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대신 인간의 길과는 전혀 다른 성인의 길을 택한 한 의원의 이야기다. <구암허준>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작금의 출세와 성공에 목매는 세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한 성자의 모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암허준>이 때로는 종교적인 느낌마저 들게 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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