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94>, 왜 촌스러움을 전면에 세웠을까

 

기성 드라마와 비교해보면 <응답하라 1994>는 세련된 드라마는 아니다. 첫 회를 삼천포(김성균)의 상경기 하나로 오롯이 채워 넣은 것은 기존 드라마 문법으로 보면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체로 멜로드라마의 첫 회란 남녀 주인공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4>는 꽤 많은 시간을 삼천포의 상경기에 할애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드라마에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아마도 이런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능을 해봤던 경험 때문일 게다. 드라마? 꼭 그 문법을 따라갈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응답하라 1994>는 그래서 예능이 그러한 것처럼 때론 조금은 과장된 시트콤적인 상황을 통해 캐릭터와 웃음을 만들어내면서 필요하면 내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인물의 심리를 대놓고 드러내기도 한다.

 

성나정(고아라)과 쓰레기(정우)의 멜로 라인도 그 과정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미 관계가 설정된 상황을 오누이처럼 살짝 가리는 것으로 처리했다. 2회에서 갑자기 쓰레기가 아픈 성나정의 옆자리에 함께 눕는 장면과 함께 이 둘이 오누이가 아니라 오래 만나다보니 오누이 같은 친근함을 가진 특이한 관계라는 것이 설명되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해가는 과정도 드라마적인 스토리 전개보다는 시트콤에 가깝다. MT를 가서 술 마시기 게임을 하는 성나정이 오매불망 쓰레기의 삐삐만을 기다리는 장면이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산책 나온 성나정에게 무심한 듯 살짝 애정을 표현하는 쓰레기의 모습은 이야기의 전개라기보다는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시트콤적이다.

 

이것은 칠봉이(유연석)가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식을 찾아가려다 운전이 미숙한 성동일이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아다니다 늦게 되어, 결국 삐삐 음성으로 마음을 전하는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응답하라 1994>의 스토리는 어떤 일관된 흐름이나 전개를 갖기 보다는, 그 때 그 때의 상황과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그 안에 캐릭터 하나 하나를 소개하고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조금은 단순해 보이고 심지어는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이 전개는 그러나 이 드라마가 가진 소재나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의외로 괜찮은 그림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드라마가 전면에 내세운 건 ‘촌스러움’에 대한 것이 아닌가.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하숙집(그 하숙집도 지방에서 갓 올라온 집안이 꾸린 것이다)에서 같이 생활하며 낯선 서울 살이를 체험하는 이야기.

 

이것은 왜 첫 회에 삼천포의 상경기에 그토록 시간을 할애했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94년으로의 초대. 삼천포라는 인물은 그 시절의 조금은 구식의 풍경과 정서들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준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왜 굳이 1994년을 다루면서 촌놈들의 서울 체험을 주된 소재로 삼았을까. 이것은 자칫 지금 세대에게 낯설 수 있는 1994년의 공기를 ‘촌놈’이라는 공통된 시선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고 또 재미있게 전하기 위함이다.

 

지금 세대에게 1994년이 낯선 모험의 지대인 것처럼 촌놈들에게는 당시나 지금이나 서울이 모험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양상국이 ‘네가지’나 <인간의 조건>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이 촌놈의 시선은 또한 서울이 익숙한 이들에게도 서울을 낯선 모험의 공간으로 바꿔주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 표현한 ‘촌놈’이라는 조금은 비하적인 표현은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정감가고 아날로그적이며 세련됨이 밀어낸 따뜻한 정조를 드러내는 긍정적인 의미인 셈이다. 양상국처럼.

 

삐삐라는 지금은 너무나 투박하고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물건은 그래서 오히려 스마트폰 하나면 즉각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는 지금 시대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관계의 아련함 같은 것을 전해준다. 누군가의 삐삐가 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리는 경험이라던가, 직접 통화하지 못하고 메시지를 녹음해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마치 손 글씨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적어나가던 편지처럼 애틋해지는 구석이 있다.

 

<응답하라 1994>는 분명 촌스러운 드라마다. 하지만 이 촌스러움은 오히려 이 드라마가 지금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단지 과거를 회고하거나 추억하는 향수 드라마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가 잃어버린 아날로그적 정조를 ‘촌놈’의 시선으로 끌어내는 것. 이만큼 현재에 괜찮은 의미를 던져주는 주제의식이 있을까. 이것이 이 드라마의 촌스러움에 기꺼이 빠져드는 이유다.

<미래>가 청춘들에게 던지는 작지 않은 질문

 

현재의 미래(윤은혜)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가 이길 것인가. <미래의 선택>이라는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관점은 사뭇 새롭다. 기존 로맨틱 코미디들이 주로 주인공이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 드라마는 그것이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운명적으로 결정된 대로 이뤄진 것인지를 관전 포인트로 다룬다.

 

'미래의 선택(사진출처:KBS)'

그래서 <미래의 선택>이라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현재의 주인공인 미래(윤은혜)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와 말 그대로 ‘미래의 선택’ 즉 이미 결정된 운명에 수긍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전자가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능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면 후자는 운명론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

 

어찌 보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현재를 바꿔 미래 또한 바꾸려는 능동적 입장처럼 보이지만 이 판타지적인 설정에는 이미 운명론이 개입되어 있다. 즉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미래에서 온 미래가 바꾸려는 선택이 남편감이라는 점은 그 운명론적인 입장을 잘 말해준다. 그녀는 한 여자의 앞날이란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생각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서른두 살이 먹도록 꿈같은 건 접어둔 채 콜센터 직원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 그녀의 절박함이 들어있다. 늦은 나이지만 그녀는 방송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나이도 많고 학벌도 변변찮은데다 집안도 그저 그런 그녀의 스펙과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은 작금의 취업난을 겪는 청춘들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나이 먹고 앵커자리에서 좌천되어 아침방송 진행자가 된 김신(이동건)과 이 방송국을 소유한 이미란 회장의 손자이지만 이 아침방송의 막내 VJ로 일하는 박세주(정용화)라는 캐릭터 역시 이 운명론과 미래 개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김신은 과거에 얽매여 있어 여전히 자신이 앵커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방송을 위해 물벼락을 맞을 각오도 되어 있는 현실 개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박세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재벌2세라는 위치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방송 말단직을 하며 현실을 알려고 한다.

 

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은 그들의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단순한 멜로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운명론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비로소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가는 삶 대신 보다 나은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김신에게 미래는 현실을 알려준다. 아침방송의 진행자면 거기에 맞게 망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신은 그 말에 수긍하고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인다. 박세주는 팍팍한 방송 생활에 지친 미래를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한편, 그녀를 통해 재벌가의 2세로 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치열한 샐러리맨들의 삶을 이해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관계는 멜로로 엮여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

 

잘 나가는 리포터인 서유경(한채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떻게든 방송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 PD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인물. 하지만 그녀에게 박세주가 “당신은 이미 방송을 할 때 멋진 프로다”라고 말해주자 그녀는 괜스레 눈물을 흘린다. 윗선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던 그에게 박세주가 어떤 변화의 동인을 제공한 셈이다.

 

물론 <미래의 선택>은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가까워지는 과정은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의 정서를 충분히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어딘지 허허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게다. 사실 요즘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치열해진 현실 속에서 멜로니 결혼이니 하는 얘기는 때로는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미래의 선택>이 괜찮은 드라마라는 건 바로 이 현실적인 문제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속에 제대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 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태생적으로 이미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가 주는 그 암담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미래의 운명을 보기 위해 점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결국 그 점집 문을 나서면서 다시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래가 어떻든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실컷 살아보는 건 어떤가. 즉 미래란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가 하나하나 쌓여 생기는 것이 아닐까. <미래의 선택>은 이 결코 작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비밀>, 왜 이토록 폭발력 있나 봤더니...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가. KBS2 수목드라마 <비밀>의 여주인공 강유정(황정음)이 그렇다. 사랑하는 남자가 성공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검사가 된 그를 위해 뺑소니 사고를 온전히 뒤집어쓰고 감옥에 대신 가는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물론 트렌디한 인물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희생적인 인물이 얼마나 되겠는가.

 

'비밀(사진출처:KBS)'

즉 <비밀>은 겉모습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렌디한 멜로나 치정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강유정이라는 무고한 인물이 처하게 되는 고통을 통해 그 불행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드라마다. <비밀>의 전반부는 그래서 강유정이 하게 되는 일련의 선택들이 그녀를 얼마나 불행 속으로 밀어 넣는가를 바닥 끝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뺑소니 사고의 진짜 범인인 남자친구 안도훈(배수빈)에게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5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간다. 힘겨운 감옥 생활 속에서 안도훈의 아이까지 낳아 기르지만 결국 아이를 학대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아이까지 빼앗기며 그 과정에서 그녀는 화상을 입고 몸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게 된다.

 

세월이 지나 출소하지만 비극은 계속된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고 빚 때문에 건물에서 쫓겨나게 된 데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는 결국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하게 된다.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녀의 손에 달랑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죽은 아이를 뿌린 강변의 모래 한 줌이 전부다. 도대체 그녀가 그렇게 절망의 진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왜일까.

 

여기에는 두 인물이 관여되어 있다. 그녀의 애인인 안도훈과 그의 뺑소니 사고에 연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재벌2세 조민혁(지성)이 그들이다. 흥미로운 건 가해자와 피해자인 이 두 인물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점점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점이다. 조민혁은 그녀를 철저히 망가뜨리기 위해 안도훈과 강유정의 사랑마저 시험에 들게 만든다. 안도훈은 생존 혹은 야망 때문에 조민혁의 ‘유혹’에 흔들리게 된다.

 

<비밀>의 스토리가 괜찮다는 것은, 안도훈 같은 과거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할만한 악역 캐릭터가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변심을 이 드라마는 (남자는 다 그래 하는 식으로) 단순하고 막연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검사가 되려던 그 초심을 지키려 해도(이것은 강유정과의 순정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쥐고 있는 시스템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검사가 되어도 제대로 수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수사를 하다가도 윗선의 지시로 중도에 멈출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며, 그 일을 빌미로 검찰 내부에서 감찰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쥐고 흔든 후에 권력은 협박에 가까운 손을 내민다. 같이 일해보자고. 안도훈이 제 아무리 강유정과의 순정(초심)을 지켜나가려 해도 생존해야 하는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심은 안도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로 보인다.

 

안도훈처럼 야망을 가진 인물이 그저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재벌2세인 조민혁 역시 단순한 악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애인을 잃게 된 조민혁은 마치 피해자처럼 그려지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재력을 통해 강유정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복수를 한다. 복수를 위해 부자인 그가 못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복수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고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죽었다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강유정이 끝없이 처한 불행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다. 조민혁이라는 캐릭터는 모든 걸 가진 자의 사랑 역시 얼마나 불행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혼을 M&A 정도로 치부하는 재벌가에서 사랑이란 동정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대신 죄책감을 갖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안도훈처럼 신분상승을 꿈꾸는 인물이나, 조민혁처럼 이미 경제적인 부를 세습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모습을 보고나면, 강유정처럼 시스템 바깥에 내던져진 인물이 처하게 되는 불행의 근원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강유정의 비극은 안도훈과 조민혁이 의도치 않게 공조함으로써 빚어낸 사건들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시스템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혁은 부자로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고, 안도훈은 부자들의 잘못된 시스템과 싸우다가 그 거대한 벽을 느끼고는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에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시스템의 피해자를 대변하는 강유정이라는 인물의 변화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이 교육시킨 대로 타인의 잘못조차 자신의 잘못으로 내면화하며 살아온 인물. 이것은 어찌 보면 선량하고 착한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다.

 

강유정은 입만 열면 “미안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안도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왜 미안해. 내가 잘못한 건데.”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빚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녀는 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미안하다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비밀>의 폭발력은 강유정의 불행을 작금의 서민들이 처한 불행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강유정이 그랬듯이 우리가 언제 가난해지고 싶었던가. 또 불행한 삶을 살고 싶었던가. 대학을 가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 같은 공포에 대학을 가지만 막상 나오고 나면 취직은커녕 등록금 빚더미에 않게 되는 그런 삶. 회사에 들어갔다고 해도 언제 잘릴 지 알 수 없는 삶. 뼈 빠지게 일해 낸 세금이 말도 안 되는 사업에 흥청망청 쓰여지고 부자들의 배만 불리게 해주는 그런 삶. 누가 이런 삶을 원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잘못한 것처럼 문제를 개인화하려는 우리들의 모습. 강유정이라는 캐릭터에서는 바로 그 서민들의 선량하지만 안타까운 얼굴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 강유정의 끝단에 놓인 비극을 바라본 연후에는 그녀가 진짜 비극의 이유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항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어찌 그저 단순한 멜로나 치정복수극으로 읽을 수 있겠는가.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그 진짜 고통을 준 자들은 따로 있다는 ‘비밀’과 대면하게 하는 드라마. 이것이 <비밀>의 실로 비밀스런 폭발력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 캐스팅에 담긴 혼합장르의 열쇠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흔한 멜로라고 생각한 시청자라면 지금 스릴러로 치닫고 있는 이 드라마에 심지어 당혹감마저 느낄 만하다. <내 딸 서영이>로 국민 딸로 자리매김한 이보영과 <학교 2013>으로 여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이종석의 조합, 여기에 <시크릿가든>의 윤상현까지 가세하면서 드라마는 삼각 멜로의 달달한 이야기를 예상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수하(이종석)의 능력은 멜로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완전 소통의 가능성까지 만들어주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보영과 이종석의 달달한 멜로가 그만큼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이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스릴러의 요소를 깔아놓고 있었다. 그것은 민준국(정웅인)이라는 범죄자 때문이다. 수하와 혜성(이보영)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이 바로 민준국(의 범죄의 피해자인 수하와 그것을 증언하는 혜성)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의 혼합 장르적 성격을 명확히 말해준다. 이종석의 풋풋한 눈빛과 이보영의 좌충우돌 명랑함이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해줬지만, 정웅인의 잔인한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 드라마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이 변곡점은 민준국이 혜성의 어머니인 춘심(김해숙)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순간부터다. 춘심의 치킨 집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은 민준국이 본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감금하고 몽키스패너를 휘두르는 장면으로 끝나는 7회 마지막까지도 설마 실제로 춘심이 죽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8회 첫 장면에서 춘심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드라마는 급격히 법정극과 스릴러의 장르 속으로 그 흐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가 정웅인이다. 왜 민준국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역할에 정웅인이 캐스팅되었을까. 사실 정웅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르가 시트콤 혹은 코미디일 정도로 코믹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다. 잔뜩 경직된 얼굴 속에서 엉뚱하고 음흉한 모습이 살짝 드러날 때 그것이 웃음을 만들어냈던 기억을 대중들은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니 그가 범죄자로 등장한다는 것은 다소 의외의 캐스팅이다. 여기에는 이 혼합장르의 드라마가 가진 신의 한수가 들어가 있다.

 

이 드라마를 함께 세팅해온 SBS 김영섭 CP는 정웅인 캐스팅에 대해서 ‘반전 효과’를 노렸다고 말했다. 즉 코믹 캐릭터가 진짜 살벌한 범죄자로 변신했을 때 오히려 그 공포감은 더 커질 거라는 것. 그 반전 효과는 실제로 주효했다. 물론 초반부터 수하의 아버지를 죽이는 살인자로 등장하지만 그 배우가 정웅인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라 여겨지지 않았던 면이 있었던 것. 초반 멜로로 충분히 수하와 혜성의 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스릴러의 색채를 상당부분 줄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웅인이 진짜 범죄자의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섬뜩함은 오히려 배가 되는 효과를 만들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가진 특별한 매력은 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다양한 복합장르에서 비롯된다. 즉 청소년 판타지물처럼 보이던 것이 로맨틱 코미디로도 이어지고 멜로로도 엮어지다가 휴먼 드라마적인 요소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차츰 이 현실감 없을 것만 같은 판타지물은 점점 스릴러적인 요소를 강화하면서 무게감을 찾아간다. 비현실적인 판타지에서부터 지극히 현실적인 스릴러로의 자유로운 전환. 바로 여기에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매력이 생기는 지점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의 캐스팅은 다양한 장르적 성격들을 각자 구현해낼 수 있을 만큼 적절했다 여겨진다. 이종석이 그리는 청소년 판타지물의 성격과 이보영이 만들어내는 로맨틱 코미디와 가족드라마, 법정 장르의 요소, 그리고 윤상현이 여기에 부여하는 멜로와 휴먼드라마적인 색채가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웅인이라는 배우가 있어 멜로에서 범죄물과 스릴러로의 전환이 가능했다 여겨진다.

 

수하의 어머니가 죽고 1년이 지난 시점, 갑자기 떠오른 정웅인의 손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향후 전개가 도무지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수하가 정웅인의 살인피의자로 지목된 상황에서 혜성과 차관우(윤상현)가 그를 변호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무수한 변수들이 남아있다. 수하는 과연 민준국을 죽인 것일까. 왜 수하는 기억을 잃게 된 것일까. 민준국은 죽기는 죽은 것일까. 또한 수하와 혜성 그리고 차관우의 멜로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이러한 다양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기는 건 복합장르를 절묘하게 엮어내면서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캐스팅의 묘수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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