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2>, 이 쿨한 액션에 냉담한 까닭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다. <아이리스2>의 액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숲 속에서의 추격전이나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그 자체로 압권이다. 절권도로 단련된 장혁의 맨손 액션 역시 볼만하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넘나들며 벌어지는 첩보전은 드라마라기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170억 대작이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아리리스2>는 그 압도적인 액션영상을 통해 보여준다.

 

'아이리스2'(사진출처:KBS)

그런데 그것뿐이다. 그 화려한 액션을 빼놓고 보면 <아이리스2>는 드라마로서 갖춰야할 많은 요건들을 놓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액션 이면에 담겨져야 할 인물들 사이의 감정 선이 잘 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주먹 하나를 내지르고 총 한 방을 쏘는 것에 그 인물들 사이에 어떤 내적 감정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무용에 가까운 동작에 머물고 만다.

 

대표적인 사례로 첫 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수연(이다해)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그렇다. 그녀를 사랑하는 정유건(장혁)이 그 바로 앞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총격 장면은 꽤 강한 감정을 이끌어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지수연과 정유건 사이에 그럴 듯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총격 장면은 그다지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액션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 인물의 감정이 잘 보이지 못하는 점 때문에 그 화려함이 그저 볼거리에 머물게 되는 셈이다.

 

지수연과 정유건의 멜로 라인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것도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사랑하는 관계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같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상투적인 대화 정도로는 그들의 사랑이 특별해보일 수가 없다. 또한 아이리스의 킬러인 김연화(임수향) 역시 그 액션은 화려하지만 <아이리스> 전작에 나왔던 김소연이 했던 멜로가 얹어진 액션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액션 첩보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반드시 멜로가 끼어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이 어떤 분노나 사랑 같은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어야 그 행동의 목표와 추동력이 생긴다는 점에서 멜로 같은 요소는 중요할 수 있다. 지금 정유건은 그 욕망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드라마 작법으로서는 기본적인 캐릭터의 결함을 갖고 있다. 개인적인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 정유건의 행동은 그래서 그저 국가의 부름에 따라 살고 죽는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자칫 남북관계나 핵미사일 같은 거대담론만 반복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보고 싶은 것이지, 남북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아이리스 같은 그림자 정부가 만들어내는 국가 간의 분쟁에 대한 담론은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반복된 코드이기 때문에 식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화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적어도 볼거리가 풍부하다면 블록버스터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현재 상영되고 있는 <베를린>은 그 단적인 사례다. 물론 <베를린>에는 인물들 사이에 감정이 잘 녹아들어 있는 액션이 특별한 첩보물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쨌든 그 압도적인 볼거리가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베를린>이 만약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좀 더 드라마적인 변용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영화로 제작된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드라마 <7급공무원>이 그래도 선전을 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 작품이 드라마로서의 흥행 요건을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7급공무원>은 첩보 액션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멜로와 코믹에 치중함으로써 드라마라면 기대하게 될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 선을 잘 끄집어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리스2>의 경우는 <7급공무원>도 아니고 <베를린>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양새다.

 

<아이리스2>의 액션은 쿨하지만 그 쿨한 액션만으로는 드라마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기가 어렵다. 이것은 이른바 블록버스터 드라마라고 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대부분 실패한 원인이기도 하다. 즉 볼거리에 치중하다가 제대로 된 스토리나 캐릭터(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외면을 받게 되는 것. 제 아무리 17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도 <아이리스2>의 그 쿨한 액션에 냉담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의>는 왜 이요원을 수동적으로 만들었을까

 

<마의>의 승승장구는 물론 백광현(조승우)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 덕분이다. 이병훈표 사극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선명한 선악대비와 고난-극복-성장의 스토리를 백광현이라는 캐릭터는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청국에까지 가게 된 백광현이 황후의 병을 고치고 칙서까지 받아 조선으로 금의환향하는 스토리는 이 인물의 성공을 바라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마련이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는 백광현 뿐만 아니라 조연들도 저마다의 톡톡 튀는 매력을 보여준다. 백광현의 적수로 선 이명환(손창민)과 이조판서 정성조(김창완)의 악역 연기도 돋보이고, 백광현을 짝사랑하며 그의 뒤를 봐주었던 숙휘공주(김소은), 백광현의 스승으로 괴팍하면서도 제자에 대한 정이 넘치는 사암도인(주진모), 백광현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추기배(이희도)와 자봉(안상태) 그리고 어린 시절 스승이자 무교탕반의 숙수인 오장박(맹상훈), 심지어 숙휘공주를 보좌하는 곽상궁(안여진)이나 호위무사 마도흠(이관훈)까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많은 인물들 중에서 유독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가 강지녕(이요원)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강지녕은 누가 뭐래도 <마의>의 여주인공이 아닌가. 그런데 <마의>가 지금껏 흘러오는 과정을 보면 강지녕이 한 일이라고는 백광현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상대적으로 남자주인공인 백광현이 끝없는 시련을 극복하고 드라마틱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심지어 강지녕은 숙휘공주만큼의 존재감에도 가려져 왔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 캐릭터가 너무나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 탓이 크다. 숙휘공주는 백광현과의 멜로에 전면적으로 등장할 수 없는 캐릭터지만 그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또 어떤 경우에는 코미디에 가까운 웃음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여주인공이라는 무게감이 강지녕을 숙휘공주만큼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지녕의 캐릭터가 주목되지 못한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마의>라는 드라마가 거의 온전히 백광현이라는 캐릭터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극의 인물군은 주인공 백광현을 중심으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백광현이 잘되기를 바라며 기원하는 숙휘공주, 사암도인, 소가영(엄현경), 추기배, 자봉, 오장박, 장인주(유선), 서은서(조보아), 윤태주(장희웅), 박대망(윤봉길) 같은 인물군으로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시트콤적인 웃음을 만들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 번째 부류는 백광현과 각을 세우는 대립군으로 이명환과 정성조 같은 인물군이다. 이들은 백광현을 고난에 빠뜨리고 또 그 고난을 이겨내고 돌아온 백광현에게 당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 부류가 백광현과의 멜로를 이루는 인물군으로 강지녕과 이성하(이상우)가 그들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 번째 부류의 인물군들로서 강지녕은 물론이고 이성하까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마의>가 백광현의 성장드라마는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의 삼각 멜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멜로가 살아야 강지녕이라는 여주인공이 살아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애초부터 강지녕을 너무 멜로의 틀에만 묶어뒀기 때문에 이 캐릭터가 살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만일 강지녕이 여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성장을 위한 어떤 미션을 부여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마의>에서 강지녕은 백광현이라는 남주인공의 멜로 파트너 정도로 머무른 아쉬움이 있다. 이렇게 되니 그 삼각 멜로의 다른 축이었던 이성하라는 캐릭터 역시 잘 살지 않게 된 것이다.

 

<마의>는 스펙사회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백광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조선시대 마의 버전으로 풀어냄으로써 권선징악 판타지의 힘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바로 여주인공이지만 여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강지녕이라는 캐릭터의 한계다. 왜 <마의>는 그토록 강지녕을 제 자리에 멈춰 서서 한없이 백광현을 기다리고 그리워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던 것일까.

<보고싶다>, 피해자들을 위한 진혼곡

 

“내 딸이 죽었어요. 그놈들은 성폭행을 한 게 아니라 살인을 했습니다. 내 딸이 죽었어요." 결국 성 폭행범을 제 손으로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보고싶다>의 보라 엄마(김미경)가 던진 이 한 마디는 아마도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을 게다. 그녀를 찾아와 그녀에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고맙습니다.”라며 통곡한 또 다른 피해자 수연(윤은혜)의 어머니 김명희(송옥숙)의 절절한 말은 또한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보라 엄마에게 하고픈 말이었을 게다. "나 대신 해준 건 고맙고, 나 대신 벌 받는 거 같아 미안하고.."

 

'보고싶다'(사진출처:MBC)

<보고싶다>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를 단순한 멜로처럼 여겨지게 만들지만(또 멜로가 전면에 깔려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절절한 그리움 속에는 깊은 아픔이 깔려 있다. 성 폭행을 당한 후 살해당한 것처럼 은폐되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수연 엄마 김명희와 수연을 사랑하는 정우(박유천)는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연을 끌어안고 살아온다. 무려 14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만 같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담벼락에 새기고 또 새겨서 점점 더 선명해진 ‘보고싶다’라는 글자처럼 그것은 긁고 또 긁어서 지워지지 않은 상처처럼 더 깊어졌다.

 

세상이 이토록 끔찍한 데 한가한 사랑타령이 가당키나 할까. <보고싶다>가 우리네 멜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그 많은 신데렐라들과 그만큼 또 많은 변형된 왕자님들을 또 세우지 않는 건 그런 이유다. 거기에는 신데렐라 대신 성 폭행의 후유증으로 과거를 의식적으로 지우고 살아가려는 피해자 수연이 있고, 왕자님 대신 그 피해자 수연을 하루도 잊지 않고 14년 간 그리워하며 찾아다닌 형사 정우가 있다.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조합이 피해자와 형사의 조합으로 바뀌게 된 것. 우리 사회가 가진 부조리한 법 정의의 문제는 멜로에서조차 끔찍한 현실을 끌어낸다.

 

<보고싶다>가 절묘한 지점은 이처럼 멜로와 사회극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우가 형사로서 범인을 추적하고 또 그 오랜 세월동안 수연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그 과정은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사라진 수연을 찾기 위해 정우가 14년 전에 집을 나왔다는 얘기는 그래서 수연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지금껏 찾아다녔다는 것. 너무나 아파서 과거의 이수연을 부정하고 조이로 살아가려는 그녀지만, 정우는 그 아픈 기억을 오히려 지워버리려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는 것.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몇 년 감옥 생활을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가해자들을 보며, 그 범죄의 후유증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는 피해자 가족들은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질까. 보라 엄마의 “내 딸이 죽었어요”라는 절절한 말에는 그 깊은 상처가 묻어난다. 14년 만에 자신의 딸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도 그 끔찍한 과거를 묻고 조이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딸에게 “그래 난 오늘 너 본적도 없는 거야.”라고 말하며 맨발로 도망치는 수연 엄마 김명희의 애절한 모성애. 그토록 긴 세월을 미친 놈처럼 수연을 그리며 그녀를 찾기 위해 살아온 정우의 마음은 또 어떻고.

 

<보고싶다>는 피해자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누군가는 자살한 딸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누군가는 그토록 그리웠던 딸을 찾고도 그 아픔을 지워주기 위해 기꺼이 딸 앞에서 사라져주며, 누군가는 14년이란 긴 세월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미친 놈처럼 그녀를 찾아 헤맨다. 물론 <보고싶다>는 본격적으로 이 성 폭력이라는 사회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이 문제를 더 절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이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깊은 아픔을 우리 눈앞에 세워두고 공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고싶다>라는 다분히 멜로적인 뉘앙스로 다가왔던 제목은 어느새 그 앞에 성 폭력과 잘못된 법 집행으로 희생당한 무수한 피해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남은 가족들의 그 지울 수 없는 보고 싶은 그리움을.

송중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된 사연

 

<늑대소년>이 누적 관객수 5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를 순수한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멜로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한 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소년 철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걸 연기해낸 송중기라는 아우라다.

 

자료: 영화 '늑대소년'

멜로라는 장르가 영화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해왔던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런데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송중기다. 겉면으로는 스릴러와 판타지가 섞여있고 또 복수극의 요소들이 깃들여있지만 모두 그 알맹이를 보면 멜로의 결이 느껴지는 이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그 안에 있는 늑대소년 철수와 강마루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걸 연기한 송중기. 과연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송중기라는 배우가 가진 면모와, 지금 현재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조합이 절묘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성적 이미지의 외모와 남성성을 드러내는 내면을 가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없을 것 같은)’ 판타지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송중기라는 연기자와 늑대소년, 착한남자라는 캐릭터, 그리고 버겁디 버거운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걸까.

 

<늑대소년>은 작금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늑대와 소년의 만남은 늑대로 표징되는 남성성과 미소년이 가진 중성적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남성성과 중성적 이미지)는 작금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양가적 이미지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급격히 초식화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거꾸로 ‘남성적인 면’을 판타지로 꿈꾸지만 그것이 중성적으로 포장되길 원한다.

 

이것은 이른바 ‘나쁜 남자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나쁜 남자 신드롬’은 자신에게만 부드럽고(중성적) 타인들에게는 까칠한(남성적인) 그런 남자에 대한 판타지다. 흔히 드라마에서 ‘버럭’ 캐릭터로 등장하곤 하는 인물들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그렇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그러하며, <파스타>의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그렇다. 이들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기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자기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들이다.

 

<늑대소년>은 이 캐릭터의 극화버전인 셈이다. 철수라는 캐릭터는 아예 이러한 판타지가 가상의 존재로 축조된 인물이다. 철수는 순이(박보영)에 의해 순화되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존재. 그래서 남성성은 그 차원을 넘어 야수성으로까지 보여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에 대한 부드러운 태도는 순정을 넘어 절대 복종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이 양가적 성격은 내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캐릭터의 외형으로도 드러난다.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이들 앞에서 그는 늑대로 변신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맑디맑은 미소년의 얼굴로 돌아온다. 미소년의 외모에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보호해줄 것 같은 남성성의 결합체. 이런 완전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존재. <늑대소년>은 그래서 <착한남자>라는 드라마가 구축해낸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만나게 된다. 강마루는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 대신 감옥에 가기도 하고, 때론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존재다. 제목은 <착한남자>지만 그 착함(사랑하는 여자를 위한)은 때론 파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강마루 역시 <늑대소년>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물론 이 극대화된 판타지는 이런 남자가 현실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상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특히 남자에게는. 특히 청춘에게는. 청춘의 남성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 초식화되거나 타인과 담을 쌓고 자신에게 침잠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띌 수밖에 없다. 청춘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멜로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거나(<건축학개론>처럼), 극단적인 판타지로 숨는 것(<늑대소년>같은)은 그런 현실 때문일 게다.

 

아마도 이 이미지 때문일 게다. 이미지에 민감한 광고가 송중기를 가만둘 리 만무다. 그는 2개월간 총 10편의 광고를 제의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송중기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다. 그는 곱상한 미소년의 얼굴에 강한 남성성의 내면을 숨기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로 축조됐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이 그는 미소년(<성균관스캔들> 같은)에서 시작해 갈등하고 고뇌하며 때론 분노하는 햄릿으로 왔다가(<뿌리 깊은 나무> 같은) 이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로 세워졌다. 작금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송중기의 시대는 이미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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