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에 담긴 시대정신, 윤여정이 해석해낸 ‘미나리’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국내 최초이자, 자국어로 연기한 아시아권 배우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윤여정은 어떻게 <미나리>를 통해 이런 성과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영화 '미나리'

아카데미에서도 빛났던 윤여정

결국 윤여정이라는 이름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서 불렸다. 공교롭게도 시상자는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였다. 전 연도에 그 상을 수상한 다른 성의 배우가 시상하는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라, 작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브래드 피트가 시상자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시상 소감을 하기에 앞서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며 “그런데 우리 영화 찍을 땐 어디 있었냐?”는 브래드 피트에게 던지는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빵 터트렸다. 그리고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을 갖고 또 한 번 재치 있는 농담을 던졌다. “저는 윤여정인데 유럽 분들이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모두 용서하겠다.” 지난 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히 고상한 척하는(Snobbish)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는 솔직함과 위트가 섞인 농담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윤여정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것이 운이 좋아서였다며 다른 후보자들에 대한 예우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사실 경쟁을 믿지 않는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어떻게 경쟁을 하겠나.” 대신 다섯 후보들이 다 각자의 영화에서 최고였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또 자신의 두 아들이 “일하러 나가라”고 해서 그 덕에 열심히 일했더니 이 상을 받게 됐다는 사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이야기와, 자신의 첫 감독이었던 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전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로이터 통신은 윤여정이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수상까지 이뤄냈다며 그가 수십 년 간 한국 영화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주로 재치 있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작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배우 수상에는 불발됐지만 올해에는 윤여정이 상을 받았다고 전했고, AFP통신은 윤여정이 수상소감에서 글렌 클로즈에 경의를 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윤여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제가 된 건, 특유의 유머감각과 더불어 할 말은 하는 ‘직설적인 화법’에 상대방에 대한 예우까지 갖추는 모습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가 늘고 있어 미국에 오는 걸 아들이 걱정한다는 이야기로 이 심각성을 전하기도 했고, 시상식 후 치러진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도 ‘무지개’를 언급하며 소신을 밝혔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무지개처럼)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가진 평등한 사람이다.”

 

윤여정을 통해 다시 보이는 <미나리>의 가치

<미나리>는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작품이다. 정이삭이라고도 불리지만 한인 2세인 그는 미국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제작자가 브래드 피트다. 미국영화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미국영화가 힘을 발휘한 부분은 ‘미국적인 문화’가 담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적인 문화’가 전해져서다. 그건 다름 아닌 순자(윤여정)라는 한국에서 딸 가족을 위해 고춧가루며 멸치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역만리를 찾아온 할머니를 통해서다. 

 

<미나리>는 제이콥(스티븐 연)이 아칸소로 이주해 농장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다. 다만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곳을 일궈 농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 가족이 맞닥뜨리는 위기의 순간을 잔잔한 카메라로 포착한 영화다. 농장에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는 병아리감별사로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한국에서 온 순자는 몸이 좋지 않은 데이빗(앨런 킴)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데이빗이 보기에 이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 같지 않다. 쿠키를 굽기보다는 화투를 치고, 욕도 잘 하고, 남자팬티를 입고 잔다. 그런데 진짜 다른 점은 힘겨운 상황들 속에서도 낙천적인 모습이다. 가난해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는 꼴을 보여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딸에게 “바퀴달린 집에서 사니 재밌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 

 

어떻게든 땅을 일구고 물을 대 농장을 만들어내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과도 순자는 사뭇 다르다. 그는 데이빗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 어느 물가에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씨를 뿌린다. 그러면서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다 같이 먹을 수 있으며 건강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물을 대서라도 농장을 일궈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의 다분히 미국식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그저 물가에 씨를 뿌려두고 누구나 뜯어 먹을 수 있게 미나리가 자라게 해주는 순자의 자연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즉 <미나리>는 순자가 조연이지만, 사실상 순자의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영화다. 제이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의 가부장적인 모습과 미국식의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결합된 삶의 방식에, 순자라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한 인물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자를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하고 표현해낸 윤여정이야말로 지금의 <미나리>의 성과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성을 거부한 배우,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삶

윤여정은 어떻게 순자를 그토록 생명력 강하고, 유머러스하며, 한국적인 정이 가득하면서도, 트렌디하고 쿨한 할머니(K할머니라고도 불리는)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그가 작품들을 통해 그려온 배우로서의 여정에 담겨 있다. 그는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에도 거론했듯,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 데뷔했다. 흔히들 여배우라고 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스타로서 시작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는 ‘악녀’로 데뷔한 셈이다. 결혼 후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와 처음으로 한 작품도 박철수 감독의 <어미>로,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딸을 자살하게 만든 인신매매범들을 처단하는 엄마 역할을 연기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욕망에 충실한 어르신 역할을 연기했고,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성매매를 하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라는 파격적인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물론 윤여정은 더 넓은 스펙트럼의 다양한 연기를 해왔던 게 사실이지만, 늘 틀에 박힌 전형성을 거부하는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였다. ‘K할머니’라 불리는 <미나리>의 순자가 전형성을 벗어난 우리 시대의 어르신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윤여정의 이런 특별한 연기여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윤여정은 ‘배우 같지 않은 배우’로 통한다. 최고 선배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성실하게 임하며, 특유의 유머로 그 힘겨운 작업을 즐겁게 만들고, 틀에 박힌 전형성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배우. 그의 배우로서의 삶은 그래서 미나리를 닮았다. 자신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지만 주변도 함께 살리는 그런 존재. 그 삶에 대한 자세들이 <미나리>라는 작품 속 순자를 통해 그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우리 시대가 처한 많은 위기들을 넘어서기 위한 슬기로운 지혜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영화'미나리')

'미나리'의 윤여정에서 윤여정의 '미나리'로

 

배우 윤여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글로벌한 신드롬 수준으로 퍼져가고 있다. 최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내놓은 소감 중 "고상한 척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SNS를 뜨겁게 달구며 찬사로 이어진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고상한 척하는'이라는 말이 직설적이지만, 다름 아닌 윤여정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솔직함' 혹은 '할 말은 하는' 뉘앙스로 비춰진다. 거기에는 이 칠순의 배우가 영화 <미나리>의 순자를 통해 그려낸 사랑스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쿨함이 뒤섞여 전 세계 대중들을 매료시킨 'K할머니'의 초상이 드리워져 있다.

 

도대체 무엇이 윤여정에 대한 글로벌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걸까. 아카데미에서 과연 여우조연상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는 물론 우리에게는 엄청난 사건일 수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윤여정에 대한 글로벌 대중의 애정은 뜨겁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려면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의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미나리>라는 작품과 그 속에서 시대의 아이콘처럼 서 있는 순자라는 인물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미나리>는 봉준호 감독 말대로 보편성을 가진 영화지만, 동시에 여성 서사로도 읽을 수 있는 영화다. 가부장적인 한국인 아버지에 자본주의적인 미국식 사고방식을 더한 제이콥(스티븐 연)이라는 가장이, 그와 정반대편에 서 있는 순자(윤여정)로부터 삶의 지혜를 한 수 배우는 이야기처럼 읽을 수도 있어서다. 제이콥과 순자를 남성 서사와 여성 서사를 대변하는 인물로 놓고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제이콥이 척박한 땅에 어떻게든 물을 대서 대량으로 작물을 재배해 큰돈을 벌려는 모습은, 순자가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 미나리씨를 뿌리고 그렇게 자라난 미나리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게 하려는 모습과 대비된다. 작물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서사는 몸이 안 좋은 데이빗(앨런 킴)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제이콥은 자신이 병아리감별사로 일하는 공장을 찾아온 데이빗에게, 맛이 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수컷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제이콥으로부터 그런 '남성다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껏 뛰지도 못하는 데이빗은 그래서 순자가 "Pretty boy"라고 말하자 발끈하며 이렇게 말한다. "I'm not pretty, I'm good looking!" 하지만 함께 산책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셔서 건강해진 데이빗을 순자는 "Strong boy"라고 불러준다. 여기서 <미나리>의 순자가 말하는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미나리처럼 애써 드러내지 않고도 아름답게 어디서나 피어나고,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사람들 또한 치유해주고 위로해주며 함께 버텨주는 그런 '강함'. 마지막 장면에 제이콥이 데이빗과 함께 순자가 물가에 뿌려 놓아 아름답고도 강인하게 자란 미나리를 보며 "할머니가 자리를 참 잘 고르셨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다시 윤여정 이야기로 돌아오면, <미나리>에서 순자라는 인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낸 건 윤여정 덕분이다.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전적으로 윤여정의 해석에 의해 구현된 순자는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할머니는 아니다. 데이빗이 말하듯 순자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 물론 그 이역만리 딸을 찾아오며 고춧가루에 멸치까지 바리바리 챙겨오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모습이 있지만, 쿠키를 만들기보다는 화투를 치고, 욕도 하고, 남자팬티를 입고 잠을 잔다. 보통의 우리네 할머니(엄마)들이 요리하고 육아에 능숙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윤여정이 표현해낸 순자가 'K할머니'로 불리며 글로벌한 화제가 된 건, 윤여정이 지금껏 연기 인생에서 해온 작품 선택과 인물 해석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로만 보면, 그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 청춘스타가 아닌 악녀로 데뷔했고, 박철수 감독의 <어미>에서는 딸을 자살하게 만든 인신매매범들을 처단하는 엄마 역할로 역시 전형성을 깨는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할머니 역할도 마찬가지다. <바람난 가족>이나 <죽여주는 여자>가 그 사례다. 즉 <미나리>의 순자 K할머니는 그냥 탄생한 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윤여정이 해왔던 연기 필모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나리>의 윤여정은 그래서 윤여정의 <미나리>로도 읽혀진다. 그래서 이 <미나리>가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위기 속에서도 더 소중한 가치로서의 '사람'이 있고, 인위적인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미나리를 통해 전하는 '시대의 메시지'는,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그 삶을 연기에 더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만 할 말은 하며, 무엇보다 위트 있는 웃음과 유머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드러내주는 그런 인물. 이러니 신드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사진:영화 '미나리')

 

윤여정과 박인환, 우리 시대의 새로운 어르신상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다음은 아카데미일까.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에 쏠린 국내외의 관심이 뜨겁다. 물론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그간 쌓아온 연기공력과 필모들이 모여 지금의 결과에 이른 것이지만, <미나리>가 순자라는 인물을 통해 끄집어낸 외신에서도 이른바 K할머니(halmoni)라 불리는 그 캐릭터의 힘을 빼고 이 놀라운 결과를 말하긴 어려울 게다.

 

순자는 <미나리>에서 어린 손주인 데이빗(앨런 킴)이 영화 속에서 말하듯,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자식을 위해 그 먼 이역만리를 찾아가며 멸치에 고춧가루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언어도 환경도 낯선 데다 트레일러에서 살아가는 딸 가족의 모습에 눈물을 보이거나 한탄을 쏟아놓는 그런 할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삶이 "재밌다"고 말해주며 호호 웃는다.

 

굉장히 희생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할머니도 아니다. 순자는 자식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모습보다 데이빗에게 화투를 가르치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고, 한국의 전통적인 맛을 고집하기보다 데이빗과 함께 그들의 탄산음료의 맛에 빠져드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이 작품의 리 아이작 정 감독이 순자라는 인물의 해석을 윤여정에게 맡기면서 나오게 된 독특한 할머니상이 아닐 수 없다.

 

이 K할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식만큼 자신을 챙기는 인물이다. 미나리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정화시키는 효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순자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이역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족들에게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존재다. 이처럼 <미나리>의 순자라는 K할머니에 대한 찬사는 최근 들어 시대가 바라는 어르신상의 새로운 모습들이 투영된 결과다.

 

그런데 최근 K할머니에 비견되는 K할아버지의 등장이 눈에 띈다. 바로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의 덕출(박인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매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명대사인 이 할아버지 역시 기존 어르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칠순의 나이에도 어려서 꿈꿨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포기했던 발레에 다시 도전하고, 무엇보다 채록(송강)이라는 날개가 꺾인 청춘 발레리노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준다.

 

특히 덕출이 젊은 꼰대에게 던지는 일침은 시청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나 어른 아냐. 그깟 나이가 뭐 대수라고. 전요. 요즘 애들한테 해줄 말이 없어요. 미안해서요.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으니까. 응원은 못해줄망정 밟지는 말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그는 사과할 줄 아는 어르신이다. 신문 사회면에 단골로 등장하는 '불통'의 대명사처럼 이미지화되어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어르신상을 덕출은 보여준다.

 

<미나리>의 순자와 <나빌레라>의 덕출은 우리 시대가 바라는 새로운 어르신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살아온 삶의 지혜가 가득하지만, 그걸 후대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려하며 한 발 물러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어르신상. 이런 어르신들이야말로 우리 사회 아니 나아가 우리 시대 젊은 세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어떤 위기들을 슬기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사진:영화'미나리')

어려운 시국, '미나리'는 잔잔해서 더 큰 위로를 줬다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개점폐업 상태였던 주말 극장가가 활기를 띠고 있다. 확진자 수가 줄어드는 봄철이고 코로나19의 백신접종이 시작된 것도 그 원인일 수 있지만, 영화 <미나리>의 효과를 무시하기 어렵다. 주말에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20만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물론 여기에는 해외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데다 앞으로 오스카 수상 역시 유력시된다는 <미나리>에 쏟아진 해외의 찬사가 일조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수상 경력을 차치하고라도 <미나리>는 그 작품 자체가 이 어려운 시국에 주는 큰 위로로 입소문이 퍼져가고 있다.

 

먼저 어마어마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미나리>의 서사가 굉장히 극적이라고 생각했다간 오산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미국 아칸소의 외딴 곳으로 이주한 제이콥(스티븐 연)과 아내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의젓한 큰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장난꾸러기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이 농장을 꿈꾸며 정착해가는 과정이 담겼다.

 

그래서 도시의 복잡한 풍경 자체는 등장하지도 않고, 미국 조용한 시골 마을이 영화 내내 채워지고 그 곳에서 농장을 시작하며 쉽지 않은 그 과정들을 이 영화는 잔잔한 시선으로 담담하게 담아나간다. 물론 그 담담함을 지루하지 않게 채워주는 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는 인물들과 그들을 통해 미소 짓게 만드는 따뜻한 유머들이다.

 

맞벌이를 하는 이 부부를 위해 아이들을 챙겨주러 이 낯선 땅 미국으로 오게 된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는 사실상 이 영화의 제목이자 메시지를 은유하는 '미나리' 같은 존재다. 할머니지만 전혀 할머니 같지 않은 순자의 지극히 한국적인 모습들은 미소를 짓게 만들면서도 삶의 지혜가 느껴지고 때론 가족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우리네 엄마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엿보게도 만든다.

 

이 잔잔하고 소박한 영화가 어째서 미국에서조차 그토록 호평과 찬사를 받았는가 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잔잔함과 소박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감염병 하나도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글로벌 사회의 거창한 역설 속에서, 마치 미국 내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들 모두)들처럼 거대한 용광로 속에 들어가 적응해 살아가는 작디작은 로컬문화가 주는 매력과 힘이 <미나리>에는 넘쳐난다.

 

미국 같은 거대한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살아갈 수 있는가의 저 토양을 내려다보면 그렇게 어디선가 낯선 땅으로 넘어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타인 또한 이롭게 하며 살아온 이민자들이 보인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건강하게 해줘." <미나리> 속 순자의 대사가 말해주듯이 이들 이민자들은 미나리 같은 존재들이었다.

 

물론 <미나리>에는 미국 사는 딸을 위해 고춧가루며 참기름이며 멸치까지 바리바리 싸갖고 오면서, 동시에 화투를 챙겨와 손주와 같이 치는 그 정이 많으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지극히 한국적인 엄마 순자가 등장한다. 그의 유쾌함과 강인함과 따뜻함은 실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당연하고 미국인들조차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가 됐을 게다.

 

또한 <미나리>는 굳이 낯선 땅에 서게 된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낯설어 고된 환경을 맞이하게 된 이들 모두를 위한 이야기다. 그래서 코로나 시국으로 1년 넘게 이 낯선 환경을 버텨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이만한 위로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낼 것이고, 우리만이 아닌 주변까지도 살려낼 것이라는 걸, 저 어디서나 잘 자라고 누구나 건강하게 해준다(돈을 벌게 해준다는 그런 게 아니라)는 물가에 피어난 푸릇푸릇한 풀이 말해주고 있으니.(사진:영화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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