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의 남장여자, ‘바람의 화원’과 뭐가 다른가

신윤복 열풍이다. 이정명 작가의 팩션 ‘바람의 화원’이 이 불황기에도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매회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난 달 열렸던 간송미술관 개관 70주년 행사에는 때아닌 관객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다. 다름 아닌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화 ‘미인도’가 개봉함으로써 신윤복 신드롬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 왜 신윤복은 갑자기 이 시대에 등장했을까. 그것도 남장여자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예술가의 초상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료가 만든 상상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나마 남아있는 그림들의 필치가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흔하게 알려진 ‘단오풍정’같은 그림을 두고 봐도 세세한 붓 터치와 인물묘사, 게다가 철저히 계산된 듯한 구도와 색감까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호방함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남성적인 필치와는 대조적이다. 이정명 필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바로 그 그림이 전해주는 여성성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림의 배경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새 그림은 신윤복이 당대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억압적인 체제 속에 자유를 갈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배경은 없고 중심인물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새를 그려놓고 “이 새는 배경이 없을 때는 그저 새일 뿐”이지만, 배경으로 새장을 그려 넣으면 “새장 밖으로 날아가고픈 심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의 소재나 화풍이 이미 정해져 있어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이 되어버리던 당대 사회에서 신윤복이 가졌던 ‘배경에의 의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창조하려는 그 여성성의 마음을 가졌지만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남성성의 사회 속에서 겪었을 억압.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남장여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대신 자신 속의 여성을 숨겨야 하는 신윤복이 자신이 채우지 못하는 여성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표출한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가 가지는 의미는 그저 그것이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표면적인 설정에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남장여자로서 억압된 미적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영화 ‘미인도’, 성이라는 자유
하지만 영화 ‘미인도’로 오면 이 남장여자라는 껍질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담는다. 각종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들에 대해 조정대신들이 음란하다고 꾸짖을 때, 신윤복은 자신의 손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그림 속의 남녀는 자연스럽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습들이며 그 인간적인 부족함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신윤복은 말한다.

영화 ‘미인도’에도 새장과 새의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예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미로 읽힌다. 스승 김홍도가 그 그림이 가진 체제반항을 운운할 때, 신윤복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미인도’는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남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다 어느 날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남장여자의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극중 신윤복이 껍질로서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오로지 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지나치게 멜로와 성적 묘사에 집착한 면이 있다. 따라서 남장여자 설정이 가진 본래의 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속에 묻혀 버린다. ‘센세이션 조선 멜로’라는 문구는 자칫 신윤복이라는 천재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혐의를 갖게 만든다.

그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신윤복이라는 인물이 남장여자로 이 시대에 탄생한 것은 아마도 지금 시대가 지향하는 여성성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던 과거에서 이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어지는 시대, 남장여자는 어쩌면 바로 이 중성적인 시대를 담는 아이콘인지도 모른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바람의 화원’은 바람 같은 작품”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강남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고 차를 마시며 ‘바람의 화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사생활을 중시해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는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사진기와 녹음기, 심지어는 노트까지 포기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 글은 애초부터 인터뷰 형식에 앉혀질 운명이 아니었다. 다만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바람처럼 떠다니는 이정명 작가의 이야기, 그 단편들을 적어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막연함 속에서 이정명 작가가 신윤복의 그림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느꼈을 막막함과 또 그 속의 어떤 설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첫 인상, 성냥갑에 그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
이 불황에, 그것도 한번도 불황 아닌 적이 없었던 출판계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이정명 작가의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그런 사람, 마치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 그저 지나가는 행인 같은 평범함을 간직한.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은 ‘바람의 화원’의 애체를 끼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김홍도를 닮았다. 어딘지 빈 듯 보이지만 막상 작품 앞에 서면 특유의 열정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사람.

그의 첫인상이 익숙해질 즈음, 그가 신윤복이란 화원을 접하게된 첫인상이 궁금해졌다. “처음 신윤복을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성냥갑에 그려진 여인이 그네를 타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윤복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림, ‘단오풍정(端午風情)’이었다. 그 그림의 여성적으로 보일 만큼 섬세한 필치와 색감을 보면서 어린 미래의 작가는 그 그림의 화원을 여성으로 상상해왔다고 했다. 오히려 나중에 그 화원인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림은 그리움, 그 그리움을 이야기로 엮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 김홍도의 질문에 도화서 생도인 신윤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이 대화는 또한 이정명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떻게 써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연대기적으로 신윤복의 삶을 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림들이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을 앞에 놓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말해주는 것을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상상하는 작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서양화에는 그림만큼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내려오고 있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림을 더욱 풍요롭게 해줍니다.” 작가는 우리네 그림들 속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일화를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정명 작가가 밝힌 ‘바람의 화원’의 작법은 그림들이 말해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짧은 이야기들을 구성과 상관없이 적어두는 것이었다. 사실상 작가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2006)’보다 더 먼저 이 작품에 대한 구상과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진 메모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메모만큼 쌓여진 그리움은 다시 작품으로 꿰어졌을 터였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좋은 이유
“이 작품은 장태유 PD가 아니면 어려운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정명 작가의 장태유 PD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장태유 PD 특유의 미술적인 감각은 물론이고, 특유의 완성도에 대한 근성은 남다르다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정명 작가는 사실 별로 드라마에 대해 상의를 한 적도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장태유 PD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면서 전율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캐릭터를 생각할 때, 조금은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작업에 들어가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으면 하고 생각”했다는 이정명 작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장태유 PD는 그렇게 그려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설에서는 군더더기로 생각되어 사용하지 않았던) 그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이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리얼리티를 강화해준다는 점이라고 이정명 작가는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PD를 신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밝혔던 ‘그림 속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을 드라마가 실제 영상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단오풍정’ 그림 속의 아낙네들은 드라마 속으로 걸어나와 신윤복을 만나고, 드라마는 신윤복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되는 상상의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정명 작가의 겸손일 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또한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보다 소설이 좋은 이유
“팩션은 역사소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역사에 추리가 들어가는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굳이 말하자면 팩션은 역사추리에 가깝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최근 영상 컨텐츠로 각광받고 있는 팩션이 그저 말 그대로의 팩트(사실)+픽션(상상)의 결합체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잡아주었다. 팩션은 저 ‘장미의 이름’처럼 역사적인 팩트를 추리형식으로 파고 들어가는 하나의 특정한 장르라는 것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소설 ‘바람의 화원’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성격으로 규정되는 추리형식이 소설 속에 더 많이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 드라마가 반 정도만 진행되어 있어 후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까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추리형식보다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화원으로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팩션 특유의 추리가 주는 묘미가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신윤복 신드롬? 바람으로 끝나지 않길
“매체의 힘을 느꼈지요.” 드라마화 되면서 불기 시작한 신윤복 신드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운을 뗐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간송미술관은 신윤복 신드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드롬은 현재 개봉을 준비중인 영화 ‘미인도’를 통해 또 한번 이어질 태세다. 하지만 이런 신드롬에 대해서 작가는 신중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 신드롬은 금세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생리죠. 제발 한 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꾸준히 이어지길 바랍니다.”

‘바람의 화원’은 그 제목처럼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작품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드라마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사랑은 사제지간(김홍도)의 정인지, 형제지간(신영복)의 우애인지, 혹은 예술가가 갖는 미의 화신, 즉 뮤즈(정향)에 대한 사랑인지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바람의 화원’만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림자처럼 보이고, 때로는 실체처럼 보이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김홍도가 어진화사 앞에서 신윤복의 그림자에 매혹되면서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과 작가는 닮는다더니,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의 화원’과 이정명 작가는 서로 닮았다.


사극, 왜 경합에 빠질까

‘바람의 화원’에는 그림 경합이 매번 등장한다. 신윤복(문근영)이 화원 승급을 두고 ‘단오풍정’을 그릴 때도 경합이 등장하고, 청국에 보낼 그림을 두고 ‘군선도’를 그릴 때도 김홍도(박신양)와 장벽수(김응수)의 경합코드가 등장한다. 또 동제각화의 명을 받고 김홍도와 신윤복이 주막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며 이것은 어진화사 경합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어진화사 경합의 풍경을 보면 하나의 스포츠가 연상된다. 화제를 내린 왕이 있고, 그 시험을 진행하는 예조판서가 있으며, 감독관으로 홍국영이 있다. 그리고 선수들로 김홍도-신윤복팀과 이명기(임호)-장효원(박진우)팀이 있다. 예조판서가 등장해 “이번 경합은-”하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스포츠의 그것과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회의 관객들은 경합장은 물론이고, 김조년(류승용)을 위시한 장사치들의 도박내기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서민들의 내기판이 있다. 물론 경기 결과에 따라 입지가 달라지는 선수(?) 주변 사람들까지 거기에는 존재한다.

이 완벽한 스포츠의 구성요소들은 이미 예전 ‘대장금’에서도 등장했었다. 장금(이영애)과 금영(홍리나)이 선수로 등장하는 이 요리 스포츠에는 스승들(한상궁과 최상궁)이 존재하고, 그 판관으로서 중종(임호)의 말 한 마디가 경기를 결정한다. 이것은 ‘이산’으로 이어지면서 이병훈 PD 사극의 색깔을 구축한다. ‘이산’에서는 특이하게도 그 선수가 정조 이산(이서진)이었을 뿐, 거기에는 판관으로서의 영조(이순재)가 있었고 상대편 선수로 노론 벽파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닮아가는 사극과 스포츠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스포츠가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반면, 사극은 대체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에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실어주는 인물은 바로 정조(배수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뛰어난 예술가였던 정조가 그림을 놓고 하는 감동(평가)은 마치 촌철살인의 해설자가 풀어낸 경기 해설을 듣는 것만큼 묘미가 있다. 이 해설자이자 판관이 어느 한 팀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이 대체로 사극이 가진 스포츠와 다른 점이다.

‘바람의 화원’에서 정조는 김홍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대장금’에서 중종은 결국에는 장금의 손을 들어주며, ‘이산’에서 영조는 정조를 알게 모르게 밀어준다. 주인공은 늘 이 경쟁상황 속에 들어가서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결국에는 이기게 된다. 이렇게 뻔한 결론을 대중들을 다 알면서 왜 이 경합에 빠져들까. 이것은 아마도 이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대중들이 갖게되는 환타지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점점 어려워지기만 하는 경제 상황, 그 속에서 더욱 더 경쟁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대중들에게 환타지 속에서나마 이 안전한(?) 게임에 빠져들고픈 욕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사극이 점점 스포츠를 닮아 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이 살벌한 경쟁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스포츠와 다른 점, 즉 예측되는 경합 결과에 대한 기대는 역시 그 경쟁하는 사회를 그대로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는 반영일 것이다.

‘베바’, ‘바화’ 그리고 ‘그사세’, 그 삼박자 드라마들의 세상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초기 기획단계에서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태왕사신기’의 끼워팔기용 땜빵드라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 물론 이재규 감독은 이 기사가 오보라고 밝혔지만 그만큼 타 작품에 비한 기대감은 적었다는 말이다. 반면 ‘베토벤 바이러스’와 경쟁하고 있는 ‘바람의 나라’는 기획단계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이다. 고구려 사극의 원조격인 김 진 원작의 동명의 이 드라마는 해외로케와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초반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역시 답은 작품에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인 소재를 갖고도 훌륭한 캐릭터와 탄탄한 대본, 그리고 환상적인 연출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마니아성과 대중성을 모두 얻은 데는 홍진아 홍자람 자매라는 작가의 역량과 ‘다모’를 연출했던 이재규 감독의 재기 넘치는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이 삼박자를 이룬 데서 비롯된다.

한편 뒤늦게 시작해 시청률은 아직 낮지만 특유의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바람의 화원’은 조금씩 그 세찬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신윤복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의 화제를 가져온 이정명 원작의 힘이 그 바탕에 있고, 그 작품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출해내는 장태유 감독의 장인정신이 뼈대를 세웠으며, 그 위에 문근영을 위시한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가 살을 만들었다.

월화 드라마로 새롭게 시작하는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이 삼박자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노희경 작가의 대본과 표민수 PD의 연출, 그리고 그 위에 한바탕 신명나는 연기를 펼칠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연기자가 그 주역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이 작품을 노희경 작가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할 역작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작년 ‘인순이는 예쁘다’로 시청률은 낮았지만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선보여주었던 표민수 PD의 촘촘하고 섬세한 연출력은 기대감을 더 갖게 만든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드라마 판은 자본력과 스케일, 화제성 같은 것이 작품성 그 하나보다 더 중요해진 세상이 되었다. 압축적으로 영상미학을 보여주는 드라마보다는 50부, 100부작이라는 대작의 간판이 더 앞에 걸려지고, 해외 로케이션이나 사회적인 논란거리를 담은 소재 같은 것들이 작품 그 자체보다 우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결국 대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라는 이 삼박자 위에서 춤추지 않으면 거추장스러운 화제성의 옷만 걸쳐 입은 추한 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 삼박자 드라마가 부디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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