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왜 비정상이라 비난받을까

 

초심을 잃어버린 걸까. 공영방송이 이래도 되나 싶다. 여동생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오빠가 <안녕하세요>에 출연한 후 인터넷은 이 오빠에 대한 비난 여론으로 들끓었다. ‘정신병자’이니 치료가 필요하다는 얘기부터 ‘스토커’라는 비난, 오빠가 여동생에게 툭하면 시키는 뽀뽀가 ‘성추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왔고, 심지어 ‘성적인 악플’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내고 있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안녕하세요(사진출처:KBS)'

그도 그럴 것이 방송에 나간 이 여동생에 집착하는 오빠의 이야기는 실로 정상이라 볼 수가 없었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는 해도,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여동생을 매일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여행을 갈 때도 꼭 따라가고 심지어 신혼여행까지 같이 가자는 오빠를 어찌 정상으로 보겠는가. 늘 손을 잡고 다니고 툭하면 뽀뽀를 요구하는 것에다 ‘사랑해’라는 말을 안 하고 전화를 끊으면 다시 건다는 건 도에 지나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혼하기로 한 예비신랑과 이 오빠가 썼다는 계약서에는 동생은 평생 자기 것이며 같이 살 것이고 언제든 데리고 놀러 갈 수 있다는 식의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 부모도 이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동생은 울먹거리며 오빠가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미래를 꾸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오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관객의 투표에서 150명 중 132명이 ‘고민이다’를 눌러 우승자가 됐을 때 오빠의 표정은 심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남의 가족 일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막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가타부타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미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이 사적인 이야기를 공론화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오빠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는 대중들은 하등 잘못된 것이 없다. 정상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방송에서 보여진 인물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따라서 이것은 방송이 아예 내놓고 한 사람을 전 국민적인 비난 앞에 내놓는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그 사람이 제 아무리 비정상적이고 잘못됐다 해도 그 어찌 보면 사적인 문제들을 온 국민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실로 방송이 할 짓이 아니다. 흔히 인터넷에서 누군가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녀’, ‘○○남’이라 불리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일과 이것이 무에 다를 게 있을까.

 

물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을 다양성의 차원에서 보여주고,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그들 사이에 어떤 화해와 소통의 물꼬를 터주자는 <안녕하세요> 애초의 기획의도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기획의도대로 하려면 좀 더 신중한 접근과 편집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같은 특이한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자칫 자극적으로 경도되기 쉬운 위험에 대한 충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가 그나마 안전하다 여겨졌던 것은 가족이 출연해 가족애라는 틀 안으로 특이한 이들을 껴안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난받을 만한 이들도 뒤늦은 참회의 모습으로 오히려 소통의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동생에 집착하는 오빠의 이야기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소통은커녕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관객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오빠가 여동생에게 보여준 리액션의 전부였다. 그러니 이 편집된 방송에서 대중들의 비난여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이 날 방영된 또 다른 사연 중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을 마치 하인처럼 시키는 부모 이야기 역시 자극적인 소재였지만 그나마 비난여론이 덜했던 것은 마지막에 엄마가 딸의 고충을 이해하고 울컥하는 모습을 통해 둘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소재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도무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불편한 내용들은 그대로 방영되면 당사자들을 공론의 질타 속에 던져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고민을 들어준다는 빌미로 어쩌면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공론의 장으로 가져와 마구 풀어헤침으로써 결국 그 당사자들의 비난을 먹고 자라는 프로그램이라면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방송이 시청률을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좋은 기획의도는 자칫 잘못된 방송을 통해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난받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녕하세요> 제작진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진짜사나이>의 가치, 군대와 일반인의 소통에 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진짜사나이>는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미 군대를 다녀왔거나 아직 군대에 가보지 않았던 사나이들이고(심지어 외국인도 있다) 군부대에서 일반사병들과 실제로 일주일씩 머물며 병영을 체험한다. 방송은 그 체험을 포착해 예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진짜 날 것의 군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군 기밀이라도 유출된다면 큰 일이지 않은가.

 

'진짜사나이(사진출처:MBC)'

<진짜사나이>의 내무반은 그래서 특별히 방송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김수로와 샘 해밍턴, 류수영, 서경석, 손진영, 그리고 장혁과 박형식이 일반사병들과 함께 일주일 간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특별한 내무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일주일을 지내는 일반사병들도 선별된 병사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특별하게 마련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방송은 그 자체로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출연자들이 진짜 군인이 아니고, 내무반이 실제 내무반이 아니며, 일반사병들도 선별된 병사라고 해서 이것이 전부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함께 유격훈련을 뛰면서 헬기 레펠을 하고 화생방 훈련을 하거나 행군을 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을 어찌 가짜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진짜 군인들과는 다소 다른 체험일 수 있다는 것일 뿐, 일반인들에게 그것은 짧게나마 군대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진짜 체험일 것이다. 군 소재 예능을 하기 위해 연예인이 실제로 군대를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것은 <진짜사나이>가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그것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다큐는(실제로는 르뽀에 가깝겠지만) 아마도 비방용이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게다. 군 기밀에 가까운 장면들도 많을 테고, 때로는 군대의 내밀한 사병들 간의 마찰과 충돌도 적지 않을 게다. 그것을 방송으로 다 내보내다보면 그것은 리얼리티를 빙자한 막장 방송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진짜사나이>가 보여주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 <진짜사나이>는 예능이라는 본분에 맞게 적절한 선까지의 ‘군대 체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체험에 들어간 연예인들의 소임은 자신이 진짜 군인임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군인처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며 때로는 그 와중에도 어떤 보람과 가슴 뭉클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진짜 군인일 수는 없다. 일반인으로서 군대 체험을 하는 것일 뿐.

 

<진짜사나이>의 방송 프로그램적인 가치는 바로 이 일반인과 사병들이 한 막사에 들어가 일주일을 함께 생활하며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군인과 일반인들을 한 곳에 넣고 벌어지는 화학작용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너무 다른 존재처럼 여기며 심지어 군바리라고 비아냥대던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동생들이고 아들들이며 오빠들이라는 사실이다. <진짜사나이>를 통해서 군대는 그래서 좀 더 우리에게 가까운 곳이 된다.

 

군대가 비리나 사건사고가 비일비재하게 터지는 곳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폐쇄적인 집단으로서만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기 싫은 곳이지만 의무이기 때문에 억지로 가야하는 곳. 그래서 간 사람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간 듯이 치부하며 그 속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들도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그저 수긍하던 그런 곳이 군대가 아니었던가. 물론 군 당국이 개입하기 때문에 좋은 면만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전부인 양 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어줄 만큼 대중들은 바보가 아니다.

 

국가 안보와 밀접한 군 기밀이 아니라면 이제는 군대도 좀 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한 첫 발은 군대를 좀 더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곳으로 인식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진짜사나이>가 가진 목적이며 의도이고 가치다. 따라서 <진짜사나이>는 실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바람직한 진짜 군인의 위상과 이미지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인 것만은 분명하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꿔주고, 그래서 대중들이 좀 더 군대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로 인해 군대 문화에도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안티카페 차단에 대한 이중 잣대, 그 기준은 뭘까

 

<아빠 어디가>의 윤후 안티카페는 전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겨우 일곱 살 아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자체가 충격이었다.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해당 포털은 카페에 대해 접근 차단 조치를 내렸고 운영자도 카페를 폐쇄했고 공개사과를 하기도 했다. 이례적인 것은 대중들이 나서서 ‘윤후야 사랑해’를 실시간 검색어로 채워 안티카페의 흔적마저 지우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윤후 안티카페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하지만 안티카페는 윤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싸이 열풍으로 갑자기 스타가 된 리틀 싸이 황민우군의 피해사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반응은 윤후 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그는 <한밤> 인터뷰를 통해 “악플을 봤는데 베트남 엄마 꺼지라는 내용”이었다고 그 상처받은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SBS <한밤의 TV연예>에 이 문제로 출연한 박찬민 아나운서는 자신의 딸 박민하에게도 안티카페가 생겨 폐쇄신청을 문의했지만 “카페를 만든 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에 없앨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째서 윤후 안티카페는 포털이 나서서 접근 차단 조치를 내리면서 박민하 안티카페에는 그러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이 이중 잣대는 어디서 나온 걸까.

 

윤후 안티카페의 차단 조치 이유에 대해 해당 포털은 “윤후는 연예인(공인)보다는 일반인에 더 가깝다고 판단해 카페에 대한 접근 차단을 결정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민하는 일반인이 아니고 연예인이기 때문에 차단 결정이 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이 기준도 애매하다. 일반인 안티카페는 허용 안 되고 연예인 안티카페는 허용된다는 건 과연 상식적일까.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표현의 자유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릴 권리는 아니지 않은가.

 

놀라운 건 윤후 안티카페에 대해 모두가 공분했던 것과, 박민하 안티카페에 대한 반응이 사뭇 다르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박민하 안티카페가 생긴 것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반응들이다.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이의 순수함을 잃었다는 식의 비판도 들어있다. 안티카페가 생긴 것이 인피니트의 엘에게 박민하가 볼 뽀뽀를 한 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윤후의 경우와 달리 갖가지 이유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안티카페의 존폐는 아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인기와 호감에 비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안티카페’라고 치면 무수히 많은 카페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는 이제 청소년인 연예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김유정 안티카페는 대표적이다. 김유정은 작년 <강심장>에 출연해 자신의 안티카페에 들어갔던 경험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겨우 열 다섯 살. 그녀는 “어린 나이에 관심을 받아보면 굉장히 부담스러워질 수 있다”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다.

 

결국 윤후나 김민국, 황민우 같은 아이들의 안티카페가 갑자기 불거져 나온 것이 뜬금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미 안티카페는 넘쳐나고 그 대상을 아이 어른 따지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빠 어디가>로 급부상한 윤후의 안티카페도 생겼던 셈이다. 따라서 윤후 한 명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아이들마저 대상으로 삼는 안티카페의 문제를 해결했다 보긴 어렵다는 얘기다.

 

물론 이 문제의 근원은 아이들까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방송 문턱을 드나들게 된 작금의 달라진 세태에서 비롯한다. 그 아이들은 천사 같고 예쁘기 그지없지만 방송은 똑같이 이들을 소비하기 마련이다. 인기를 얻게 된 그들은 그만한 팬들을 갖게 되지만 그것은 빛과 함께 그림자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팬클럽은 언제든 방향만 바뀌면 안티로 돌아설 수 있다. 팬과 안티 팬의 차이는 그 방향성의 차이일 뿐이다.

 

기왕에 아이들이 방송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상, 이 흐름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겪는 남모를 고통을 방송에 들어왔다고 해서 아이들도 똑같이 치러내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방송사든 포털이든 적어도 방송에 출연하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중의 시대로 접어든 음악, 이제 주인은 대중이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인지도를 앞세워 음원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을 발생시켜 제작자들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내수시장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장르의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와 한류의 잠재적 성장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단법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가 최근 음원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한도전> 음원에 대해 내놓은 성명이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논리다.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활용해 음원을 내놓으면 그것이 기존 음반 제작자들이 내놓는 음원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제작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내수시장을 교란하게 되며 또 방송 스토리텔링과 연관된 특정 장르의 음원들만 쏟아져 나와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류의 성장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 논리가 정당하려면 지금껏 기획사들은 방송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음원을 홍보하거나 소속 가수들을 방송 프로그램에 내보내지 않고 순수하게 음악 활동만 해왔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그들 역시 방송의 힘을 활용해 음원 수익을 극대화하려 노력해오지 않았나. 지금껏 우리네 음원시장이란 몇몇 기획사들과 방송사 간의 담합에 가까운 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은 이미 몇몇 대형 기획사들과 방송사의 밀월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르의 다양성?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말특집으로 기획된 쇼 프로그램에서 몇몇 아이돌 그룹들이 타 그룹의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하며 불렀는데 그다지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는 웃지 못할 뼈있는 농담이 있듯이, 늘 비슷비슷한 코드와 춤의 반복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연제협의 이 얘기는 무언가 대단한 대의를 갖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연제협의 논리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그 비판이 <무한도전>을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연제협의 논리 속에 ‘대중’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대중음악이 아닌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대중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 옳을 수밖에 없다. 음악의 퀄리티를 얘기하지만 퀄리티가 높다고 해서 대중들이 반드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오만이다. 도대체 음악의 퀄리티를 순위 매길 수 있는 기준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방송사가 늘 비슷비슷한 음악만 음원차트에 올라오던 것을 교란(?)한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방송사가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내놓는 음원들이 그렇다. <나는 가수다>가 그랬고, <슈퍼스타K>가 그랬으며, 지금도 <K팝스타>나 <위대한 탄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음원들을 차트에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음원들은 과연 ‘교란’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기존 가요계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중들이 이들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했던 것은 매번 판에 박은 듯이 찍혀져 나오는 기획사 음악들에 지치고 식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는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엄청난 가창력의 가수들을 복원해냈고 ‘듣는 음악’을 되살려냈다. <슈퍼스타K>나 <K팝스타>는 기획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직은 미완의 보석들을 대중들과 함께 찾아냄으로써 진정한 ‘대중가수’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음악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버스커버스커 같은 밴드를 어떻게 기존 기획사가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발굴했다 해도 기존 트렌드에 맞춰내느라 본래 색깔을 다 지워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음악의 다양성 운운하거나, 음악의 퀄리티를 운운하기 전에 가슴에 먼저 손을 얹을 일이다. 다양성과 퀄리티를 떨어뜨린 것은 오히려 기존 기획사들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냐는 식의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그 질문을 되돌려보자. 과연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은 진정으로 몇몇 기획사들과 거기 소속된 가수들일까. 아니다. 그들 이전에 대중이 있었다. 우리의 한류를 만든 것은 그것을 소비해주고 때로는 꼼꼼한 비판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져준 대중들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대중들이 생산된 것을 그저 소비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스스로 생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누구나 카메라로 찍고 편집하고 올릴 수 있는 미디어 변화가 영상의 대중화 시대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누구나 프로그램 몇 개를 받아 간단하게 작곡을 할 수 있는 음악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이제 음악을 즐기는데 있어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경계는 그만큼 얇아졌다. 문화의 일상화 경향은 대중의 시대가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다. 당연히 연제협 같은 기득권을 누리던 전문가 집단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번 박명수가 만든 일련의 곡들은 전문가가 같이 하지 않았던 순수 초보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불안감을 더 증폭시킨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의 시대는 수직적 사회 체계 속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그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일종의 필터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에 있어서 순위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과거 1등 짜리 곡이 음악적 성취도에 있어서도 1등이라고(사실 이런 순위 자체가 어렵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수직적 사회 체계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누구나 작곡을 하고 싶으면 간단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컴퓨터만 갖고도(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곡 하나쯤은 뚝딱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 순위 같은 수직적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모든 것이 수평적으로 나열되고 그것이 다양성의 가치로 평가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무한도전> 음원이 음원차트 상위에 랭크되면서 생겨난 논란과 잡음은 이미 접어든 음악의 대중화 시대로 인해 수직적 차트의 개념이 무의미해져 가는 시대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미 많은 대중들은 음원차트 1위를 그 곡의 가치 순위로 바라보진 않는다. 100위의 곡이 나열되어 있다면 그저 다양한 100곡이 있을 뿐이다. 그 중에 일 년에 한두 번 올라오는 <무한도전>의 음원이 있은들 무슨 큰 문제일까. 제발 이른바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은, 대중들의 음악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길 바란다. 대중음악은 결국 대중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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