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악당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을 관전하는 재미

악연

“그냥 악연이라고 생각해.” 드라마 엔딩에 이르러 접하게 될 이 대사는 넷플릭스 드라마 <악연>을 한 줄로 설명해준다. 악당들이 누가 더 악한가를 드러내듯 줄줄이 등장해 서로 얽히고 설키며 벌어진는 사건을 그린 <악연>은 피카레스크가 그러하듯이 선한 인물을 찾는 게 어려울 지경이다.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피해자이자 선역인 의사 이주연(신민아)조차 마약을 이용해 악당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을 살려야할 메스로 죽이려 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선역인 이주연의 이 분노와 복수심이 너무나 이해될 정도로 여기 등장하는 악당들은 지독하게 악한 자들이다. 사채빚에 몰려 사망보험금 5억을 타내려고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는 아들, 아픈 아들의 병원비를 보내기 위해 이 살인의뢰를 맡아 실행에 옮기는 조선족, 음주 상태에서 노인을 치는 사고를 낸 후 이를 은폐하려 야산에 암매장하는 불륜남, 그걸 보고 어쩔 수 없이 매장을 도운 후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목격자, 불륜남의 돈을 뜯어내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꽃뱀... 

 

‘더럽게 얽힌 악한 인연’이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이들은 현재 벌어진 사건과 과거사까지 겹쳐지며 더럽게 얽혀 있다. 그래서 저마다의 끔찍한 욕망들이 부딪치면서 사건이 어디로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선이 악을 이기는 흔한 권선징악 스릴러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가 없다. 선의나 그런 의지를 가진 인물 자체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악당들끼리 펼쳐지는 진흙탕 싸움이 펼쳐지는데 기묘하게도 이것이 <악연>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이들의 욕망이 늘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고 엉뚱한 변수를 맞이해 엇나가는 과정들이 펼쳐지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사망보험금을 쉽게 탈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자는 아버지가 사고현장이 아닌 야산에 매장된 채 발견되면서 살인사건을 의심받고, 음주 사고로 죽은 노인을 목격자까지 협박해 함께 야산에 암매장한 불륜남은 사실 꽃뱀사기범인 그 목격자의 끝없는 협박에 시달린다. 

 

그러니 이들의 악독한 욕망이 번번히 좌절되는 그 과정은 이 어두운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악연>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이 좌절이 저들의 욕망들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각자의 욕망이 가진 칼날들은 그렇게 저들끼리 부딪치고 애초 계획된 방향을 벗어나 엉뚱하게도 빙 돌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악연’이라는 제목이 그저 우연적인 ‘인연’이었다면 개연성을 찾기 어려웠겠지만, 여기에는 악당들의 강력한 욕망이 야기한 결과라는 점 때문에 시청자들은 아귀가 맞아돌아가는 악연의 쾌감(?)에 몰입하게 된다. 

 

물론 하나하나 사건들의 연관고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딱 아귀가 맞을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생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청자들은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좌절되고 무너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속에서 그 아귀를 기대하게 만든다. 시청자들의 욕망과 기대가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개연성에 개입한다고나 할까. 

 

이 드라마에서 현실감은 주는 부분은 유일한 피해자인 이주연이 끝내 복수를 결행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장면일 게다. 학창시절 여럿에게 성폭행 피해를 입은 이 인물은 어쩌다 자신의 눈앞에 그 가해자 중 한 명을 마주하게 되는데, 사건 이후 단 하루도 편히 잠잘 수 없었던 그녀는 끝내 복수를 결행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법 현실이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고통의 나날을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의 분노와 좌절을 작품을 통해 잘 그려낸다. 

 

하지만 이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저들 스스로의 악독한 욕망과 질깃한 악연들 속에서 스스로 무너질 것이고 그것이 ‘사필귀정’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작품의 색다른 판타지는 우리네 사법 현실의 무력감을 오히려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서 형사나 검사 같은 사법 집행자들의 정의 구현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더럽고 질기게 얽힌 악연들이 그들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이 주는 판타지가 그려지고 있을 뿐. 이것은 섣불리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우리네 사법 현실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악연’이라는 판타지를 내세워 현실이 채워주지 못하는 처벌을 대신할까. (사진:넷플릭스)

‘낮과 밤이 다른 그녀’, 낮의 이정은과 밤의 정은지 이 조합 기대되네

낮과 밤이 다른 그녀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정은지가 이정은이 됐다? JTBC 토일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는 이러한 발칙한 상상력으로 시작한다. 20대에서 50대로의 급노화. 그런데 밤이 되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20대지만 갑자기 낮동안 50대의 몸을 갖게 된 이 인물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도 못 알아보는 외형의 변화가 불러오는 충격 자체가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코미디를 만들어내지만, 20대 이미진(정은지)이 8년째 열심히 공부했지만 공무원 시험에서 연거푸 불합격했다는 사실은 이 코미디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청춘들의 무거운 취업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동명이인을 딸로 착각해 합격인 줄 착각하는 부모님 앞에서 뭐라 말도 못하고, 심지어 취업 사기까지 당한 이미진은 그 절망 끝에서 갑자기 낮이 되면 50대로 변하는 황당한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 

 

희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정작 불행의 연속을 당하는 이미진은 눈물의 연속이지만, ‘낮과 밤이 다른 그녀’는 이것을 발랄한 연출로 코믹하게 그려낸다. 20대의 이미진과 50대의 임순(이정은)을 오가는 미치고 달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니어 일자리 지원사업에 지원한다. 그런데 면접관이 하는 말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지원자들 중에 제일 젊으세요.” 50대로 급노화한 사실에 절망하던 이미진이지만 시니어들만 모인 자리에 임순이라는 이름으로 나서자 가장 젊은 사람이 된 것. 

 

“중앙청 창살 쇠창살...” 같은 어르신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걸 척척 해내고, 엄청난 유연성에 영어, 중국어 능력까지 겸비한 임순은 면접관들을 사로잡는다. 20대 취준생으로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자존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결국 처음으로 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너무나 기뻐한다. 20대에는 하지 못했던 취업을 50대에 하게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기막힌 현실에 대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며 웃음을 준다. 

 

20대의 마인드와 능력들을 갖고 있으면서 50대의 몸으로 활동하는 건 이미진에게는 너무나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8년간 취준생으로 살아오며 그 흔한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게다가 누군가와의 연애 또한 해봤을 리가 만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상황을 뒤집어 20대의 마인드에 50대의 몸을 가진 상황이 주는 절망만큼 의외로 얻을 수 있는 희망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이 들었어도(외모가) 마인드는 20대라 꼰대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가고, 50대의 몸 나이라고 해도 여전한 20대의 열정을 보여주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표현을 실제로 살아간다고나 할까. 아직 등장하진 않았지만 정반대로 50대를 경험하며 다시 밤이 되면 20대로 돌아가는 이미진이 이 경험을 통해 의외로 얻게 되는 일도 적지 않을게다. 아마도 멜로 상황이 만들어질 계지웅(최진혁) 검사와의 로맨스에도 이미진이 가진 이 비밀(?)은 절절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는 이처럼 20대의 이미진과 50대의 임순을 오가게 된 한 인물의 판타지 설정을 통해 서로 다른 세대의 충돌과 화해를 그려낼 작정이다. 발랄한 코미디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지만 어느 순간 달달해지다 먹먹해질 것 같은 기대감을 주는 작품이다. 20대와 50대를 오가는 인물인만큼, 2인1역을 해내야 하는 정은지와 이정은의 어깨가 무겁지만, 두 배우의 연기 콜라보는 환상적이다. 

 

진짜 코미디 연기는 진지함 속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는데, 정은지도 이정은도 그저 과장된 웃음을 주기 위한 코미디가 아니라 진지한 연기를 통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다. 그 웃음 뒤에 남는 페이소스는 바로 이러한 진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낮의 이정은과 밤의 정은지를 오가는 이 인물이 피워낼 달달하면서도 먹먹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사진:JTBC)

“당신, 피해자 아니에요.” 김세휘 ‘그녀가 죽었다’

그녀가 죽었다

“나쁜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은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그 내밀한 삶을 훔쳐보는 취미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열쇠를 위임받고 집을 소개해 주는 일을 하고 있어 집주인이 없을 때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일의 목적을 벗어난 사적인 취미(?)는 ‘나쁜 짓’이다. 그건 가택침입에 해당하는 범법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정태는 이것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주인을 해코지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띠지 않는 작은 물건 하나를 가져와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을 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한 짓이 범법행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이 인물은, 어느 날 문을 따고 들어간 자리에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가 피를 철철 흘린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후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억울함을 호소한다. 마치 자신이 피해자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거짓된 관종의 삶을 살아가는 인플루언서 한소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내가 제일 불쌍해”다.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을 피해자라 착각하며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에 무지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피해자라 착각하는 이들의 삶은 현재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보여준다. 잘못을 자각해야 변화가 생길텐데, 그 자체에 무지하니 자신 또한 피해자라는 착각 속에 사회는 변화의 기회를 잃는다. 형을 살고 나와서도 자신의 나쁜 짓을 자각하지 못하는 구정태에게, “당신, 피해자 아니에요”라 일갈하는 형사의 말은 그래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그녀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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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에는 왜 청년 자살귀, 객귀 이야기가 등장할까

악귀

나이 칠순의 어르신들만 남은 마을 백차골. 그 곳을 찾아간 산영(김태리)과 해상(오정세)은 마을에 객귀(길에서 횡사한 귀신)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르신들도 하나둘 세상을 등져 점점 유령마을이 되어가는 백차골에서는 객귀가 사람에 붙는 걸 막기 위한 당제를 준비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힘에 부치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이 행사를 굳이 할 필요가 있냐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한다. 이장(이용석)은 매년 당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 마을에 객귀들은 이토록 넘쳐나게 된 걸까. 

 

SBS 금토드라마 <악귀>가 가져온 객귀 이야기와 이를 몰아내기 위해 한다는 ‘허제비 놀이’ 서사에는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다. 백차골 같은 마을이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 어르신들만 남게 된 지역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실제로 빈 집들이 넘쳐나 유령마을 같은 지역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악귀>는 그러나 청년들이 떠나 소멸되고 있는 지역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그렇게 도시로 떠난 청년들의 좌절 또한 담고 있다. 당제를 반대하며 제에 쓸 허제비 인형을 불태워버리는 박씨 할머니(이용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해상처럼 집안에 들어온 객귀를 알아보는 할머니는 하지만 전혀 놀라지 않고 객귀를 위한 밥상을 마련하고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그 객귀는 바로 시골이 싫어 도시로 떠났지만 결국 자살해 시신으로 돌아온 딸이었다.

 

객귀를 보고도 왜 피하지 않냐는 해상의 물음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왜 피하겠어. 몇 십 년 만에 집에 돌아온 딸을. 답답한 시골마을 싫다고 도시로 나가겠다고 가출했었어. 그런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자살해 버렸어.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얘를 피하겠어.” 

 

모든 게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시골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지는 청년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하지만 가난한 청년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그 살풍경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려운 청년들은 돌아갈 수도 없다. 결국 외지를 떠돌다 죽어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는 청년들을 ‘객귀’라는 소재로 풀어낸 게 바로 이 에피소드다.

 

<악귀>는 이미 고시원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연쇄 자살사건을 통해서도 고액의 등록금과 그걸 감당하기 어려워 사채에까지 손을 댔다가 학생 때부터 빚쟁이가 되고, 심지어 졸업 후 취업도 되지 않아 빚 독촉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자살귀’라는 소재로 풀어낸 바 있다. 즉 객귀나 자살귀 같은 오컬트 소재를 끌어왔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법 사채업이나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 이야기가 더해졌지만, 그 장르적 재미에 머물지 않고 이를 통해 청년들의 현실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컬트와 범죄스릴러를 오가며 귀신이 한 짓인지 범죄자가 한 짓인지를 두고 시청자들과 밀당을 하면서, 이러한 이야기에 현실에 대한 통찰을 더해 넣는 것. 그저 빠져서 보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몰입감 때문에 쉽게 써진 것 같지만 그 전후사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범죄와 민속학을 취재해 소재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 문제로 통찰해내는 일련의 과정이 들어 있어서다. 

 

<악귀>라는 귀신 들린 청춘의 이야기에 빗대 말한다면 말 그대로 ‘신들린’ 필력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장르물에서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쥐락펴락하는 능력에 깊이와 통찰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악귀>라는 작품은 김은희 작가가 새로운 세계로 나 있는 ‘문을 여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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