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세대, 국적을 뛰어넘는 '허삼관'의 아버지

 

한때 콘텐츠에 사용되는 무국적이라는 수식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다. 영화에 있어서 특히 어느 나라 얘긴지 모르겠다는 평가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가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기 힘든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우리 영화는 역시 우리나라라는 국적을 담아낼 때 그 힘이 발휘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사진출처 : 영화 <허삼관>

하지만 적어도 <허삼관>이라는 영화에서만은 이 무국적이라는 표현이 단지 부정적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96년에 출간된 중국 3세대 소설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원작이다. 원작의 이야기와 인물(이름도 그대로다)을 거의 가져왔지만 영화는 전후 5,60년대 우리나라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즉 중국의 이야기를 한국화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애매한 지점들이 나온다. 지명도 대전, 수원, 용인, 서울 같은 우리의 지명을 쓰고 있지만 어딘지 마을 풍경은 중국의 한 시골 같은 느낌을 준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한국이 걸쳐져 있는 듯한 이러한 애매한 국적성이 영화에 그다지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대를 얘기하려 하지 않고, 대신 허삼관이라는 초국적이며 보편적인 아버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허삼관>이 아버지를 그리면서도 시대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최근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라는 아버지를 통해 시대를 훑어내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생겨난 선택과 집중은 시대를 재단하고 세대를 재단한다. 과거의 시대는 아버지들의 희생으로 점철된 것이고, 그 피땀 어린 희생이 있어 후세대가 이만큼 살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국제시장>이 논쟁적인 부분은 이 덕수가 살아낸 국가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현저하게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삼관>은 국가나 시대 나아가 세대를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어느 나라나 시대, 세대를 불문하고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얘기한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원작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 허삼관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를 판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상징적이다. 그것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지금도 생계를 위해 고혈을 짜내듯 일을 하고, 윗사람들의 모욕을 참아내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들은 누구나 가족을 위해서라면 지금도 피를 판다. 가족이 한 때의 만두 한 그릇과 붕어찜의 행복을 느끼며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허삼관>은 기묘하게도 모든 것들의 경계를 무화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게 만드는 영화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국적이 다르다는 게 무슨 상관일까. 과거와 현재의 삶의 양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뭐가 다를까. 심지어 내 친 자식이냐 아니냐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옛 세대의 아버지와 지금 세대의 아버지라고 해서 다를 건 뭔가. <허삼관>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을 무화시켜버리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건 <허삼관>을 연출하고 또 주인공으로 연기를 한 하정우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가 감독이건 배우이건 무슨 상관일까. 어쨌든 이 영화의 허삼관이라는 인물은 생색내지 않고도 감동적이니 말이다. 만일 영화를 통한 국가와 시대와 세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면 경계를 해체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아버지와 또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이 함께 봐도 충분한.

 

류승룡은 어떻게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됐을까

 

<7번방의 선물>에서 류승룡이 연기하는 용구는 딸바보다. 용구가 영화 속에서 한 가장 많은 대사는 아마도 “예승아!”라고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을 게다. 얼굴만 쳐다봐도 그 간절한 부성애가 넘쳐나는 용구는 정신지체의 장애를 갖고 있는 실제 바보이기도 하다. 강풀 원작의 <바보>가 그러한 것처럼 이 시대에 바보의 의미는 오히려 똑똑하고 계산적인 이들이 갖지 못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다. <7번방의 선물>에서는 그 바보가 아빠로 돌아왔다. 진정한 딸바보의 탄생이다.

 

사진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의 결정체는 그러나 지독한 현실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바보라는 존재가 늘 이른바 정상이라고 하는 이들의 변명거리나 희생양이 되는 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을 게다. 용구는 그렇게 7번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딸 예승이를 부르며 애끓는 부성애를 보여준다. 그 부성애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어떤 아이의 강간 살해범이라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딸바보 류승룡이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을 눈물 짓게 만드는 것은 이 바보 같은 용구라는 존재가 그 부모들이 살아왔던 삶을 극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자식 하나만을 보며 살아온 부모세대는 그러나 지금 이 청춘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의 발원지처럼 백안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투표장을 향했다는 그 세대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시대가 배척당하고 부정되는 현실의 억울함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7번방의 선물>처럼 최근 들어 모성애가 아닌 부성애가 귀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내 딸 서영이>는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버지의 시선이 담겨진 드라마다.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딸에게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면서도 그 딸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시청률 40%를 넘어 50%를 향해가는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아빠 어디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이하면 늘 먼저 떠오르는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대신 아빠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아빠들은 이 1박2일의 여행을 통해 아이들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성동일이 조금은 권위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아이를 통해 돌아보고, 김성주가 주눅이 든 아들의 모습에 자신이 너무 윽박지르며 아이를 대했던 것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처럼 최근 부성애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을 통해 그 양자를 힐링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7번방의 선물>의 류승룡이 한 때 거친 수컷의 향기를 뿜어내던 작업남에서 부성애의 끝단을 보여주는 딸바보로 돌아오면서 계속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바탕에 깔린 남성들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아버지들은 그렇게 수컷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서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어떤 힐링을 꿈꾸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류승룡이 왜 최근 새로운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다. 딸바보 류승룡이 보여주는 <7번방의 선물>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바보 아빠들은 물론이고 그를 새롭게 바라보고픈 자식들을 위한 판타지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잃었던 아버지

 

사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어딘지 클리쉐에 발목이 잡힌 듯한 인상이다. IMF 이후 줄곧 콘텐츠 속의 아버지들은 고개 숙인 남자, 허리 휘는 가장, 그래도 꿈을 꾸려는 아저씨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가족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혹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이런 클리쉐는 어찌 보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딘지 권위적인 상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대변한다. 지금은 그래서 아버지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추적자'(사진출처:SBS)

그런 의미에서 <추적자>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아버지의 틀을 깨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 세상의 온갖 부조리 앞에 무릎 꿇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던 아버지와는 다른, 그 부조리에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아버지라는 점. 이것이 기존 아버지들과는 다른 백홍석이란 아버지의 면모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그것은 <아저씨>와 <마더>다. 이 두 영화는 제목처럼 모두 사회 내의 특정 부류, 즉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과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을 세워두고는 그 클리쉐를 뒤집는다. 남자라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게만 여겨지는 아저씨라는 어딘지 늙수구레한 이미지는 이 <아저씨>라는 영화에서는 반전요소다. 이 영화 속에서 원빈이 옆집 소녀를 위해 조폭들을 하나 하나 깨부술 때, 아저씨라는 클리쉐도 부서졌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마더>는 기존 모성애로서 주로 소비되던 엄마라는 클리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섬뜩한 본능으로까지 바꿔놓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엄마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그저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왔던 그 이미지를 깬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그간 웅크려왔던 본성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들 존재의 새로운 면모가 포착된다.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그 안에 <아저씨>도 <마더>도 갖고 있는 드라마다. 기존 아버지로 그려졌던 그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분노를 마침내 드러내는 그런 아버지. '세상 어차피 다 그런 거야' 하고 세파에 찌들어 살아오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그 아버지에게 가족은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면?

 

이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드러내는 절망과 분노에 수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 것은 작금의 사회적 상황이 아버지들에게 똑같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자신을 퇴출시키는 사회의 비정함과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아버지들의 권위, 그리고 가진 자들에 의해 여전히 농단당하는 좀체 바뀌지 않는 세상이 주는 절망감과 분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분노하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아버지는 이제 그 사회와 싸워나가는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다.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깨치고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저씨의 이미지를 깨버린 원빈과 엄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김혜자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단연 도드라지는 손현주라는 배우가 있다. 사실 손현주는 그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배우지만, 어딘지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나 착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은 더 효과적이다. 마치 모든 어머니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김혜자가 <마더>의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이처럼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 않던 아버지들 역시 그 맷집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은 아닐까. <추적자>의 백홍길이라는 아버지를 보며 자기 일처럼 분노했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를 기꺼이 응원했다면 이미 우리가 생각해왔던 아버지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인생은 아름다워'의 부성애가 보여주는 것

'인생은 아름다워'의 이른바 '꽈당 엔딩'은 드라마에 어떤 역할을 할까. 제작진이 밝힌 대로 이 특별한 엔딩은 일단 재미있다. 이번엔 누가 넘어질 것인가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엔딩 장면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이른바 드라마들이 늘 엔딩에 보여주곤 하는 '낚시 장면'이 없다는 것이 신선하다. 즉 뭔가 벌어질 것처럼 해놓고 다음 회를 낚는 방식이 아니라, 드라마의 스토리 자체가 보여주는 매력으로 다음 회를 보게 만들겠다는 의도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이 엔딩에는 이런 재미나 자신감 그 이상의 의미도 숨겨져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점이다. 인생은 이 엔딩처럼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로 넘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기 마련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넘어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일으키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병태(김영철)네 가족의 상황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평생을 밖으로만 떠돌며 딴집 살림을 하다가 늘그막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와 앉은 할아버지(최정훈), 어느 날 갑자기 커밍아웃을 해버린 맏아들 태섭(송창의)은 이 평탄하지 않은 가족에서 불거져 나온 몇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그 밑을 들여다보면 재혼 가족으로서 겪었을 민재(김해숙)의 쉽지 않은 시집살림이 보이고,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병준(김상중)과 병걸(윤다훈)이 보인다. 이 밑바닥 상황을 보면 왜 민재의 딸인 지혜(우희진)가 그토록 완벽한 결혼을 꿈꾸는지(엄마의 이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왜 병준과 병걸이 쉽게 결혼에 골인하지 못하는지(이것도 아마 아버지의 평생 외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집안은 바람 잘 날 없이 늘 시끄럽다. 소소해 보이는 일들이(결코 소소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터지고 거기에 대해 가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수다 떠는 남자로 밉상 역할을 톡톡히 하는 병걸은 이 가족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에 시시콜콜 참견을 해댄다. 제 아무리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태섭을 마치 괴물 보듯 대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꾸고 끌고 가는 인물은 민재다. 태섭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맨 앞에 나서 그를 적극적으로 안아준 인물도 민재다. 병준 역시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거침이 없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지혜는 그 엄마를 닮아서인지 자신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스타일이고, 호섭(이상윤)이나 초롱(남규리)이도 신세대답게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가족들 속에서 유일하게 침묵하며 늘 빙그레 웃는 인물이 있다. 바로 병태다. 그는 자기주장을 하기보다는 가족들의 상황을 거의 받아들이는 편이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로 웃는 그의 얼굴은 그래서 이 가족이 실질적으로는 누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묵묵히 바라봐주고 제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느껴지는 이 아버지의 부성애는 바람 잘 날 없는 이 가족의 크고 작은 일들을 소소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아버지의 자애로운 눈은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런 얘기를 건네는 듯하다. 살다보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늘 옆에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래서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은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고. 울고 싶은 인생이라도 웃어야 웃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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