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부탁해> 조재현 딸 조혜정, 왜 이렇게 예쁠까

 

이런 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SBS <아빠를 부탁해>에서 조재현 딸 조혜정에 대한 관심은 이미 파일럿 방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심한 아빠 조재현을 뒤에서 늘 바라다보며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딸 조혜정. 그녀가 늘 열어 놓고 있는 자신의 방문은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빠에 대해 늘 열려져 있는 그녀의 마음을.

 

'아빠를 부탁해(사진출처:SBS)'

스스로도 말하듯 조재현은 딸에게만큼은 나쁜(?) 아빠다. 드라마 촬영에 딸과 시간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는 아빠. 집에 딸과 함께 있어도 뭘 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는 아빠. 전날 술을 마셨다며 한 시간만 자자고 말하고는 그걸 기다리는 딸의 마음까지는 잘 챙기지 못하는 아빠.

 

그런 아빠 주변을 뱅뱅 도는 딸 조혜정은 아빠 바라기다. 아빠랑 뭘 하고 싶냐고 적어보라고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위시리스트를 적는 딸. 하지만 고작 그녀가 해보고 싶은 건 아빠가 해주는 밥 한 끼를 먹는 것이나, 아빠와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런 소소한 걸 하면서 그녀는 한없이 행복해진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조혜정은 애교덩어리다. 말투에서부터 애교가 뚝뚝 떨어진다. 이런 애교의 모습은 무뚝뚝한 아버지 조재현과는 사뭇 대비되는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애교에는 아빠에 대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존경어린 시선이 담겨있다. 사근사근한 태도로 아빠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그래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방랑하다 돌아온 나쁜 아빠와 자신의 마음을 일기장에 적어 놓는 딸의 모습이 등장하는 연극을 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조혜정의 마음에 시청자들도 공감한다. 그것이 조혜정에게는 고스란히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겨졌을 터이다. 그걸 본 아빠 조재현의 마음은 어땠을까. 일 때문에 가족과 그리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던 부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조재현이란 아빠는 우리네 대부분 아빠들이 가족에게 갖는 부채감을 드러내는 존재처럼 보인다. 밖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멋진 아빠지만 집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나쁜 아빠. <아빠를 부탁해>에서 조재현과 조혜정의 관계가 유독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건 그것이 고스란히 보통의 우리네 아빠와 딸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량이 소주 두병 반이라고 딸 조혜정이 말하자 아빠 조재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여전히 어린애로만 생각한 딸이 어느새 부쩍 자라 함께 술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도 못했는데 저토록 아빠를 바라보며 함께 걷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한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 조혜정이라는 딸이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모습을 보며 새삼 세상의 아빠들은 자신의 딸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됐을 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딸들을.

 

'앵그리맘' 김희선 무리수 설정이지만 판타지 강한 까닭

 

잔혹한 학교 폭력을 당한 딸을 가진 엄마들의 마음은 어떨까. 온몸에 멍투성이 피투성이가 된 딸을 보는 그 마음도 똑같이 멍투성이 피투성이일 게다. 폭력이 벌어져도 쉬쉬하기 바쁜 학교와 피해자보다 가진 자들의 눈치를 더 보는 교육당국, 그래서 오히려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과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가 또다시 보복을 당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엄마들은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앵그리맘(사진출처:MBC)'

<앵그리맘>은 그 피해 학생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다. 딸 오아란(김유정)이 심각한 학교 폭력에 내몰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엄마 조강자(김희선)는 법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박진호(전국환) 소년부 판사를 찾아가지만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학교 폭력과 대항해 끝까지 싸웠던 한 엄마의 오열. 결국 아이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조강자는 법 또한 딸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현실에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 조강자의 다음 행보는 엉뚱하다. 딸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수하기 위해 여고생으로 위장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 그녀는 한 때 잘 나가던 전설의 주먹이다. 여고생들의 성희롱을 일삼는 선생님을 혼내주기도 하고, 학교 짱을 단 한 방에 쓰러뜨린 인물. 학교에 잠입한 조강자는 딸의 책상에 새겨진 저주의 말들에 오열하고 딸을 괴롭히던 여고생들을 한방에 제압해버린다.

 

딸의 복수를 위해 여고생으로 잠입하는 <앵그리맘>이라는 설정은 무리한 점이 많다. 먼저 여고생을 딸로 둔 애엄마가 제 아무리 동안이라도 여고생으로 학교에 전입해 들어온다는 게 현실적일 수는 없다. 그나마 최강 동안인 김희선이 그 역할을 맡았으니 어느 정도는 보게 되는 것이지만 이 무리수는 <앵그리맘>이 제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거의 만화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조강자가 폭력에 맞서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그녀 역시 학창시절의 주먹이 아니었던가. 물론 정의의 주먹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폭력은 똑같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적이고 판타지적인 설정이지만 학교의 폭력 문제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 현실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런 교육 시스템 전체의 문제를 단순히 폭력의 문제로 다루고 그 해법 또한 단순한 폭력으로 보여주는 건 드라마라도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많은 무리수들에도 불구하고 <앵그리맘>에 대한 판타지는 꽤 크다는 점이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고, 올바른 해법이라고도 말할 수 없지만 이처럼 판타지가 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드라마가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이 이렇게 부조리한 교육 시스템에 어떤 조처나 대안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앵그리맘>은 벽처럼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잠시지만 강력한 판타지가 된다.

 

거기에는 이런 현실에 무력하기만 한 엄마들의 자식들에 대한 부채감이 들어가 있다. ‘보호자가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저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조강자의 자각은 그래서 엄마들의 부채감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조강자라는 판타지는 이 부채감을 먹고 탄생한 것이다. 시스템이 해결 못하는 걸 직접 뛰어들어 해결하는 엄마라는 판타지.

 

물론 <앵그리맘>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심지어 만화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건드리는 면이 존재한다. <앵그리맘>의 판타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공고한 현실을 그것이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심지어 엄마가 여고생이 되는 무리수마저 허용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린이집 사건에 대한 <무도>식의 메시지

 

왜 갑자기 <무한도전>은 과거 망했던 아이템인 아이 돌보기를 다시 꺼내들었을까. 최근 벌어진 어린이집 폭행사건은 여러모로 이 아이템을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실로 아이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던 그 사건. 인천의 한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한 그 문제의 장면은 지금도 뉴스의 자료영상으로 무한 반복되어 나온다. 그 때마다 그걸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은 허물어진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유재석은 <무한도전> 멤버들이 어린이집 일일교사로 나가는 걸 도우러 온 오은영 박사에게 그 사건을 보고 어떠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은영 교사는 울었다며 가슴이 먹먹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보육교사들이 똑같은 비난과 의심을 받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였을 게다. <무한도전>무도 어린이집특집에 그 어떤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내는 걸 피했다. 물론 해당 교사의 이해할 수 없는 폭행 사실은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 비난이 열심히 노력하며 아이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보육교사들에게까지 튀는 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선택은 그래서 어린이집을 찾아가 자식처럼아이를 열심히 돌보는 모습을 담아내는 일뿐이었다. 유재석은 아이들이 등원하기 전 미리 이름을 외워놓는 특유의 자상함을 보여줬고, 박명수는 조금 거친 듯 보이지만 혼자 우울해하는 아이에게 특별히 관심을 주는 따뜻한 면을 보여줬으며, 정준하는 동물복장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하하와 정형돈은 숲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체험하는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역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쁨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유재석이 우는 어린 아이를 안고 달래주고 있자 한 아이는 휴지를 빼서 그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낮잠을 자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하루가 끝나고 돌아가는 아이에게 문득 달려가 다시 안아준 하하의 설정 가득한 모습 속에는 그래서 진심 또한 묻어났다. 유재석은 가는 아이에게 팔을 벌려 한번 안아줄래 라고 물었고 다가와 안아주는 아이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번 <무도> 어린이집 특집은 큰 웃음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웃음만을 강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억지로 상황극을 만들거나 현실에 대한 풍자를 섞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들에게 하루를 헌신하는 모습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웃음은 적었어도 저런 어린이집이면 믿을 수 있겠다는 바람을 전해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은 모두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설 때의 그 부채감을. 그런데 그 어린이집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땅에 사는 부모들에게 더 큰 부채감을 만들어낸다. 큰 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도 말고 아이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잘 보살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무도> 어린이집이 보여준 것처럼.

 

<명량>의 민심, <해적>의 고래, <해무>의 참상

 

<명량>, <해적>에 이어 <해무>까지. 공교롭게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 나온 한국 영화 3편이 모두 바다를 공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모두 단 몇 달 전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건 그 공간이 바다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영화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틈입되었을 현실들이 깔려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기 전부터 제작된 영화들이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이 안타까운 일을 환기시킨다는 것은.

 

'사진출처:영화<명량>'

3백여 척이 넘는 왜적들과 어느 방향으로 휘돌아갈지 알 수 없는 죽음의 회오리 바다 위에서 그것도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민초들이 두려움을 넘어 세상과 싸우는 이야기 <명량>은 세월호 참사에서 숭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 살길이나 찾자며 도망치는 왕이나 신하들은, 가라앉는 배에 무력했던 정부의 리더십과 승객들을 책임지기는커녕 제 목숨 하나 챙기려 도망치는 선장을 연상케 한다.

 

죽을 줄 알면서도 그 명량의 바다로 나가는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의 모습에서는 그 가라앉는 배의 두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을 향해 달려갔던 숭고한 선생님과 승무원들의 희생이 떠오른다. <명량>1400만 관객을 넘어 전무후무한 15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신드롬은 새삼 일어난 이순신 장군 열풍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무겁게 생겨난 우리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부채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적>은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지만 거기에서도 세월호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명량>이 그러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국가는 좀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민초들은 떠돌다 산적이나 해적이 되고 국가는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명나라의 재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영화의 기막힌 풍자는 명나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가져오는 옥쇄를 고래가 꿀꺽 삼켜버린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왜 하필 고래인가. 조정은 고래가 옥쇄를 삼켰다는 그 사실이 백성들에게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하늘의 뜻으로 읽힐 것이라며 해적까지 동원해 옥쇄를 되찾으려 한다. 즉 고래는 여기서 선량하지만 핍박받는 대다수의 백성들(천심)을 상징화한다. 어미 고래는 그저 자식을 보호하려할 뿐이지만 조정은 그 자식을 볼모삼아 고래를 죽이려 한다. 세월호의 침몰을 마치 우리나라의 침몰로 느낀 분들이라면 그저 자식 하나 보호하려 안간힘을 쓰다 쓰러져가는 고래에서 그 비슷한 잔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해무>IMF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척사업으로 인해 폐선이 될 위기에 몰린 전진호가 밀항에 손을 대면서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이야기다. 만선의 꿈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고 그저 생존하기 위해 벌인 일은 사람다운 땀과 노동의 공간이었던 전진호를 지옥 같은 살육의 공간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 여기서도 우리는 세월호의 한 자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무엇이 선량했던 그들을 그렇게 악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던가. 가라앉는 전진호는 그래서 자본의 논리 속에 인간실종으로 내몰린 세월호라는 결과를 상징화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 안개, 해무의 정국. 그 혼돈의 시간 속에서 그 혼돈에 가려진 채로 폭력들이 자행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그것을 마음속에서 마저 지울 수는 없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몇 달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도 그걸 지울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원죄의식과 부채감은 그래서 고스란히 남은 자들에게 파국으로 다가온다.

 

<명량><해적> 그리고 <해무>라는 영화 세 편이 모두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건, 영화가 그걸 기획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이 참사가 벌어지기 전부터 우리네 참혹한 현실이 그 참사를 예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미 그 전부터 <명량>의 바다는 버림받은 민심으로 들끓었고, <해적>의 바다는 무고한 백성들의 고래를 살육해왔으며, <해무>의 안개 가득한 바다 속으로 벼랑 끝에 몰린 가장들을 내몰아왔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는 그 무수한 과정들의 결과인 셈이다. 올 여름 극장가에는 웃음 속에서마저 그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같은 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그 아픔에 대한 공감대가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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