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사랑이야>의 멜로는 왜 치료가 될까

 

SBS 수목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여타의 멜로드라마들과는 다른 지점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멜로드라마 속의 사랑이 그저 남녀 간의 화학작용이나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걸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치유로서 다뤄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크건 작건 정신적인 아픔을 겪고 있고 그걸 치유해주는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제목에는 그 뉘앙스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괜찮아 사랑이야(사진출처:SBS)'

장재열(조인성)과 그의 형인 장재범(양익준) 그리고 그 집안이 겪은 이야기는 10년이 넘은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까지도 그들의 삶 한 가운데 고스란히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계속 덧나가는 중이다. 문제의 발단은 장재열의 의붓아버지가 저지른 폭력이다. 그 계속되는 폭력 앞에 항거하다가 결국 그 아버지가 사고로 죽게 된 것. 넘어지다 장재열의 손에 들린 칼에 찔려 죽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은 장재범이 밀쳤기 때문이다.

 

사고로 처리될 일이 사건이 된 것은 장재범이 장재열을 보호하려다 생긴 일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증언하라고 말한다. 2년 정도 감옥 생활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10년이 넘는 구형을 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 장재범이 그토록 장재열을 죽이려 달려들고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건 그러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심리 상담을 하는 조동민(성동일)이 아미탈을 통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동안 외로웠겠다고 말하자 그가 오열하는 건 그래서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길 그토록 희구해왔던 것이다.

 

장재범이 감옥 안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낼 때 감옥 바깥에 남은 장재열이나 그 어머니 역시 자신들만의 감옥에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다. 장재열은 한강우(디오)라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환영으로 데리고 다닐 만큼 과거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 폭력으로 점철됐던 그 무너진 옛집 주변을 서성거린다.

 

장재열을 치유시키는 것은 결국 지해수(공효진)의 사랑이다. 장재범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상처투성이로 나타난 그를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안고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하듯 등을 토닥여준다. 그러자 괜찮은 척 해왔던 장재열은 숨겨왔던 내면의 아픔들이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는 걸 느낀다. 그건 상처지만 그렇게 공유되는 상처는 치유의 첫 걸음이다.

 

<괜찮아 사랑이야>의 멜로가 치유로서 그려지고 있는 건 어쩌면 지금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아픔과 상처가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멘탈 붕괴의 시대라고 이 시대를 규정하듯이 우리는 너무나 아픈 비극적인 일들을 눈앞에서 겪고 있다. 장재열의 가족이 현재 겪고 있는 비극이 의붓아버지의 폭력에서 비롯됐듯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상처들은 과거 개발성장시대의 내재되고 내면화되었던 폭력들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돌려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지금은 사랑도 치유로서 그려지는 시대가 됐을까. 그저 아름다운 사랑 따위는 이 병을 앓고 있는 시대에 사치나 허영처럼 여겨지는 건 아닐까. <괜찮아 사랑이야>가 전해주는 그 깊은 감동과 위안은 그래서 거꾸로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상처들을 환기시켜준다. 이른바 멘붕의 시대<괜찮아 사랑이야>의 멜로는 병적 치유로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해무>, 부족한 스토리도 채워 넣는 미친 연기들

 

우린 이제 한 배를 탄 거여.” 영화 <해무>에서 전진호의 갑판장 호영(김상호)은 동요하는 선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상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상징을 <해무>는 영화적 상황을 통해 재연해낸다.

 

'사진출처: 영화 <해무>'

IMF라는 시대적 설정과 전진호는 그래서 당대의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진다. 감척사업 대상이 되어 배를 잃게 될 선장과 선원들. 그래서 고기로 채워져야 할 배가 조선족 밀항자들로 채워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부분은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심성보 감독의 세세하고도 다이내믹한 연출이 돋보인다. 전진호 선장과 선원들의 노동과 일상을 카메라는 거칠고 녹이 슬어버린 갑판의 풍경과 그것을 그대로 닮아버린 인물들을 훑어나가며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힘겨워도 훈훈한 그 정경 속에는 바다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밀항자들을 태우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배에서 이 인물들은 저마다의 욕망 하나씩을 끄집어낸다. 선장인 철주(김윤석)는 배에 집착하고, 늘 선장을 따르던 갑판장 호영은 철주의 명령에 집착하며, 쫓기는 신세로 전진호에 숨어 지내는 기관장 완호(문성근)는 사람의 목숨에, 롤러수인 경구(유승목)는 돈에, 그리고 선원 창욱(이희준)은 여자에 집착한다. 그리고 막내 선원인 동식(박유천) 역시 사랑에 집착한다.

 

이 집착적인 욕망은 그러나 전진호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하나씩 파국을 맞게 된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그들에게 엄습해오는 해무(바다안개)처럼 그 가려진 시야 속에서 숨겨져 있던 끔찍한 욕망의 흔적들이 스멀스멀 갑판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 욕망은 그들 스스로를 잡아먹는 괴물로 돌변한다.

 

극단 연우무대의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영화는 바다를 향해 나가면서도 전진호라는 폐쇄적 공간을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연극적인 요소들은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갑자기 서서히 고조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갑자기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급작스러움은 그래서 이 영화의 흠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시종일관 긴장되게 바라보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전진호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연기를 선보인 연기자들이다. 김윤석은 그 묵직한 존재감으로 전진호의 중심을 끝까지 잡아가고, 김상호, 이희준, 문성근, 유승목은 진짜 선원들이라 여겨질 정도로 영화의 미친 몰입을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건 박유천과 한예리의 결코 약하지 않은 연기의 존재감이다. 박유천은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온전히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연기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될 것 같다. 또한 조선족 처녀 역할을 놀랍도록 연기해낸 한예리 역시 이 베테랑들의 호연 속에서도 결코 퇴색함이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2001년에 있었던 제7태창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원작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어서인지 <해무>는 훨씬 더 불편한 느낌을 선사한다. 선원들을 극한으로 내모는 현실은 다름 아닌 돈이다. 그 돈 몇 푼을 위해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바다 한 가운데 던져버리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래서 <해무>라는 제목처럼 안개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과 그 속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해무>는 지나친 상징과 의미화에 집착함으로써 조금은 허무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보여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조금은 무게감을 갖는 영화로 현실을 반추해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나름대로의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특히 연기자들의 미친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요소다. 박유천의 연기를 재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다.

 

<엔젤아이즈>, 세월호 참사를 환기시키는 이유

 

SBS 주말드라마 <엔젤아이즈>의 첫 회 시청률은 6.3%(닐슨)로 미미했다. 하지만 일주일마다 <엔젤아이즈>2%씩 시청률이 급상승했다. 다음주 8.8%를 기록한데 이어 그 다음 주에는 무려 11%를 넘어섰다. 3주만에 두 배 가까이 시청률이 급상승한 것. 도대체 <엔젤아이즈>의 그 무엇이 이런 급부상을 만들어냈을까.

 

'엔젤아이즈(사진출처:SBS)'

처음 시청률이 미미했던 건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SBS 주말드라마 자체에 대한 낮은 기대감이기도 했다. 주중드라마는 SBS가 단연 선두를 이끌고 있지만 주말드라마는 KBSMBC에 밀려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결국 SBS 주말드라마는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막장 없는 착한 드라마를 선보이겠다는 것. 그리고 천편일률적인 가족드라마 틀을 과감히 벗어나겠다는 것.

 

<엔젤아이즈>는 주말드라마 답지 않게 본격 멜로에 119 구급대원, 의사가 등장하는 장르물적 성격을 접목했다. 시작부터 보여준 터널 사고 장면은 블록버스터의 느낌마저 주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의 핵심이 주말드라마로서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멜로에 초점에 맞춰졌다는 점이다. <엔젤아이즈>는 장르물적 성격을 떼어놓고 보면 <겨울연가>의 이야기구조를 거의 그대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의 첫 사랑이 있고, 엇갈린 운명에 의해 헤어지고 12년 후 다시 만나 과거 추억의 장소를 더듬으며 그 때의 사랑을 되새기는 시퀀스들이 그렇다. 결국 남녀는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12년이라는 공백이 만들어낸 두 사람의 다른 상황은 이들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어린 시절 겪은 사건들 배후에는 이들 부모들의 숨겨진 비밀이 놓여져 있어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겨울연가>의 이야기구조에도 불구하고 <엔젤아이즈>는 여기에 현재의 트렌디한 드라마적 설정들과 새로운 주제의식 등을 덧붙임으로써 훨씬 풍부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119 구급대원과 의사라는 직업의 디테일들이 에피소드로 들어가면서 만들어내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적인 세련됨이 있고, 이들 직업들이 그려내는 휴머니즘이 이 드라마를 그저 사적인 멜로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동주(이상윤)의 어머니 유정화(김여진)는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가족애 그 이상의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녀는 사고로 눈이 먼 어린 수완(남지현)을 가족처럼 끌어안고 결국 그녀에게 눈을 주고 저 세상으로 떠난 인물이다. 가족과 멜로를 뛰어넘는 이러한 휴머니즘은 드라마를 사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회적인 공감으로 이끌어낸다. 한편 수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유정화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동주를 자식처럼 키워내는 수완의 아버지 윤재범(정진영)도 복합적인 인물이다. 사적인 선택과 공적인 죄책감이 뒤섞인.

 

이처럼 <엔젤아이즈>는 평범할 수 있는 사적인 멜로의 틀을 소방관과 의사라는 직업적인 영역을 투영시켜 사회적 멜로로 확장시킨다. 아마도 소방관과 응급실 의사라는 위급상황이 주는 인물들의 절절함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희구하게 된 생명에 대한 포기 없는 노력을 새삼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먼저 간 유정화의 묘소 앞에서 그녀가 주고 간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처음 대면하며 한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수완의 모습은 타인이라도 가족처럼 눈물 흘리게 되는 이번 참사의 아픔을 환기시킨다.

 

<엔젤아이즈>라는 드라마 한 편이 이 거대한 비극을 온전히 위로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전해주는 타인에 대한 휴머니즘과 확장된 가족애는 이번 비극을 남 일이 아닌 내 일로 여기게 해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고귀한 죽음은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의 눈을 뜨게 만들어준다. 그 눈은 이제 죽음의 진실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신의 선물>, 오죽하면 시간을 되돌리겠나

 

가혹한 운명은 과연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딸. 아마도 부모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이었을 게다. ‘신의 선물인 아이의 죽음은 그래서 그 엄마인 김수현(이보영)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순간 시간이 14일 전으로 되돌려지며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시간(또 다른 의미로서의 신의 선물이다)이 엄마에게 주어진다. SBS 월화드라마 <신의 선물 14(이하 신의 선물)>은 이러한 가상이지만 간절한 부모의 마음을 담고 있다.

 

'신의 선물 14일(사진출처:SBS)'

물론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14일 전으로 되돌려진 김수현은 자신의 딸을 살해했을 거라 믿어지는 연쇄살인범을 직접 추적하게 된다. 김수현은 끝없이 이 다가올 미래를 바꾸려고 새로운 선택들을 하게 된다. 현재의 다른 선택이 다른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약간의 상황변화만 있을 뿐 일어날 일은 계속 벌어지는 것을 보며 김수현은 시쳇말로 멘붕(멘탈붕괴)에 빠진다.

 

아이와 같이 만나던 지적장애인 기영규(바로)의 카메라가 부서지는 장면이나 그토록 막으려 했던 연쇄살인범의 피해자인 미미의 죽음도 그녀는 막지 못한다. 김수현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지갑 속에 사진을 꺼내보지만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함께 찍었던 사진 속에 사라져버린 딸은 이 운명이 결코 변하지 않고 예정된 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암시를 전해준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뀔 수 없다면 그것만큼 더한 고통은 없을 게다. 드라마의 첫 도입부에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된 잔혹동화에 등장하는 엄마의 고통 그대로다.

 

이것은 또한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고통이기도 하다. 김수현이라는 엄마의 입장에 몰입되어 바라보면 그녀의 긴박감과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드라마는 스릴러 장르에 충실하게 시청자들의 기대와 추측을 계속해서 배반하며 그를 통해 보는 이들 또한 멘붕에 빠뜨린다. 범인 차봉섭(강성진)을 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고, 그래서 또 증거를 찾아내 다시 검거했지만 갑작스런 사고(이것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것이다)로 도주하던 차에 결국 차봉섭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든 괴한의 야구방망이에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괴한 역시 현장에서 즉사한다.

 

차봉섭의 죽음에도 여전히 사진 속 딸의 모습이 빈자리로 남아있다는 것은 제3의 범인이 있다는 얘기. 운명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차봉섭도 본래부터 교통사고로 사망할 운명이었다. 대신 사건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차봉섭과 공범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이 단순한 유괴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얽힌 일들에 대한 계획된 복수극이었다는 쪽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김수현을 둘러싼 인물 모두가 낯설어진다. 그녀를 돕는 기동찬(조승우)은 과거 자신의 형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증언을 했고 그 때 법정에 선 검사가 바로 김수현의 남편 한지훈(김태우)이었다. 또 기영규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그의 오발 때문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한지훈은 차봉섭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해준 장본인인데다 그가 죽은 뒤에도 김수현이 입수한 차봉섭 살인증거인 반지와 목걸이를 숨기는 등의 의심스런 행동을 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기동찬의 집을 자꾸 찾아오는 추병우(신구)의 정체나 기영규를 홀로 키우고 있는 이순녀(정혜선) 또한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각각 떨어져 있는 인물처럼 초반부에 그려졌지만 지금 현재는 과거의 어떤 사건 하나에 모두 연루된 인물처럼 보인다. 결국 샛별(김유빈)이의 유괴살인사건은 이 모든 사건의 겉면에 불과할 뿐이고 이면에는 이 사건을 촉발시킨 숨겨진 과거사가 있다는 것.

 

의문은 끝이 없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하나를 벗겨내면 또 다른 하나가 나타나는 식이다. 시청자들은 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와 인물들 뒤에 숨겨진 비밀들 때문에 계속해서 멘붕에 빠진다. 그럴수록 범인이 누구인가와 과거의 숨겨진 사건이 무엇인가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이것은 이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놀라운 동력이다. 되돌려진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더 복잡해지는 것.

 

이 이야기는 그래서 어느 한 아이의 유괴살인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 어느 사회면 한 쪽을 채우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졌을 사건이 사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가족은 물론이고 그저 지나치는 행인에서부터 선생님,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형사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관계되어 있다. 누군가의 한 죽음이 이토록 많은 이들이 한 작은 선택들의 축적으로 일어난다는 것. <신의 선물>이 굳이 14일 전으로 시간을 돌려 그 죽은 아이의 엄마로 하여금 사건을 추적하게 하는 이유다.

 

세상은 냉혹하고 시간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으로만 달려간다. 그래서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고 나서도 거기에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신의 선물>은 그 지나쳤던 선택들을 반추하는 시간이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모든 걸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비극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죽 하면 시간을 되돌리겠나. 그들의 비극은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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