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신>, 계약직의 비애 뒤집는 블랙 코미디

 

<직장의 신>은 1997년 버블경제의 허상이 드러나며 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 일명 계약직이라는 신인류의 탄생(?)을 보여주는 짤막한 다큐 영상으로 시작한다.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정규직에 반에 불과하고, 언제 잘릴 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인 계약직의 문제는 삼류대를 나와 3개월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정주리(정유미) 같은 인물에게는 우울한 현실이다.

 

'직장의 신'(사진출처:KBS)

어떻게든 정규직의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 계약직이면서도 밤을 새워 문서를 정리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든 하려는 정주리라는 인물의 처절함은 이 땅의 비정규직들이 매일 겪는 비애일 것이다. <직장의 신>은 이 지독한 현실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그 위에 미스 김(김혜수)이라는 판타지를 세워놓는다. 우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확 뒤집는 캐릭터, 바로 미스 김이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 되면 눈치 보기 마련인 회사에서 칼같이 업무를 접고 일어서는 미스 김이라는 캐릭터는 계약직이어서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을 계약직이어서 누릴 수 있는 이익으로 바꾸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선배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하는 말에 “아니오.”라고 선을 긋는 그녀는 자신이 “선배님”이 아니라 “미스 김”이라고 정정하기까지 한다. 미스 김의 이 선 긋기는 이른바 소속감을 내세우고, 심지어 가족애 운운하며 직원들을 혹사시키는 회사라는 조직의 특성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은 노동시간 그 자체가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 회사라는 조직이지만 회사는 이것을 ‘정’이나 ‘애사심’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포장해 직원들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부여하곤 한다. 미스 김이 이른바 ‘미스 김 사용설명서’의 규정을 내세우고 노동시간 이외에 하는 일에는 가차 없이 ‘시간 외 수당’을 요구하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통쾌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퇴근 시간 즈음해 갑자기 떨어지는 회식에 한 번쯤 스트레스를 받아본 직장인이라면 당당히 퇴근하며 이렇게 얘기하는 미스 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공감을 느꼈을 게다. “그건 소속이 있는 직원에게만 해당하는 경우지요. 무소속인 저의 경우, 불필요한 친목과 아부와 음주로,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 같은 회식을 이행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미스 김이라는 존재가 계약직으로 전락한 우리네 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을 뒤집는 캐릭터라면, 장규직(오지호)은 그 이름에서도 풍겨져 나오듯이 정규직이 마치 벼슬이나 되는 양 계약직들에게 마구 권력을 휘두르는 캐릭터다. 때로는 성희롱에 가까운 말로, 계약직을 비하하는 말로 사사건건 미스 김과 대립구도를 갖는 장규직은 희화화되어 그려지지만 우리 고용시장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기는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정주리의 반복되는 이 내레이션은 그래서 씁쓸함을 남긴다. 노동자들은 어쩌면 크리스마스 트리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수명이 다하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수많은 전구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한은행 화재. 계약직 여 노조원 1명 사망.’ 이 짤막한 기사 한 줄의 현장 속에 미스 김이 망연자실 서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왜 이 인물이 이토록 조직에 정을 주지 않게 되었는가의 단서가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정주리의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그래서 이 미스 김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정주리 같은 정규직에 목매는 계약직의 현실 인식을 이 드라마가 그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그저 하찮은 전구가 아니라는 것을.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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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과연 시나리오 작가군에 한정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땅에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앞뒤 꽉 막힌 삶을 버텨내야 하는 88만원 세대 전체의 비극일까. 비정규직으로 통칭되는 이 사회의 부조리일까. 혹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가려져왔던 비극은 아닐까.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고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간 최고은씨처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화판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1년 내내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작업을 하고 고작 300만원이란다. 그런데 실제 영화판 얘기를 들어보면 그나마 300만원이라도 받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받는다는 얘기다. 뭐 하나 명함 내밀 것 없이 영화가 좋아 이 판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그런 용돈(?)조차 없다고 한다. "한 번 해봐"하고 부추기고, 곶감 빼먹듯이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빼서 투자자들에게 던져놓고는 잘 안되면 "네 실력 탓"이라고 말하는 게 부지기수란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판에서 오로지 시나리오만을 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입봉이 걸려있는 연출 파트쪽에서 일을 하는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계약금이라는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를 착수금조로 몇 달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 영화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나은 편이 감독인지라,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스텝들도 대부분 감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딱히 감독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감독이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비일비재한 부조리한 일처리 방식들은 악명 높기 이를 데 없다. 마치 대단한 거라도 주는 것처럼 취업에 목마른 영화 지망생들을 꼬드겨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린다거나, 3개월 찍고 제작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 찍으며 다 찍어야 돈을 준다고 한다거나, 마치 금방이라도 영화화 될 것처럼 시나리오 작가를 부추기고는 몇 년 동안 작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놓는다거나... 이것은 시스템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업계에 있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회사 같은 시스템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봉이 적더라도 어떤 룰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있는 건, 단지 영화판만의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종 공모에서 당선되었다고 해도 드라마판에서 이런 신예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신진들이 그나마 숨통을 틜 수 있었던 단편 드라마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인들에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미 뜬 기성작가들에만 몰려드는 제작 분위기는 큰 문제로 지목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런 투자 개념 없이 대박만을 노리는 상황을 "비겁한 짓"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속에서 신예 작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기획안들이 편성을 잡아내기 위해 방송사로 속속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미 검증된 작가들만이 겨우 그 바늘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톱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지만 신인 배우들은 새롭게 자리를 차고 들어갈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요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 역시 이런 신인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이 되려는 가수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그들을 키워내는 기획사의 문은 좁기 때문에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해도 일단 채용만 되면 이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대형기획사들은 그래도 그나마 과거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편이다. 팬들이나 대중들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이 기획사 시스템에까지도 넓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기획사의 생리상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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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

하지만 가요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기획사 중심의 가요판에 가려진 그림자가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그토록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 청춘들 앞에 놓여진 장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88만원 세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청춘들은 기성사회로의 진입로가 막혀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회가 자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돈을 쥔 자본주들이 신인을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진출한 기성인(기성작가, 기성배우, 기획사 가수, 경력자들)들에게 몰두하고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젊은 피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문화계까지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이 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젊은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당장에는 한류다 OECD다 하면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사회가 신인들의 사회 진입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청년 실업 같은 작금의 청춘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갈 것인가.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가 가슴 아프고 심지어 화가 나는 건, 그 죽음 앞에서까지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화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주는 반듯함 때문이다. 왜 그녀는 화라도 내지 않았던가. 아니 어떤 현실이 그녀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잘못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대로 놔두면 장차 벌어질 대중문화의 죽음을, 또 나아가 사회의 죽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외국인 근로자와 청년 실업은 어떻게 만났나

육상효 감독의 영화는 어딘지 사람 냄새가 난다. 첫 단편작이었던 '슬픈 열대'가 그랬고, 시나리오로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았던 '장미빛 인생'이 그렇다. 그는 사회의 그늘 속에 가려진 낮은 존재들을 프레임 속에 넣어 그들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방가 방가'가 비추는 그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옥 같은 취업전쟁 속에 스펙 없이 내던져진 고개 숙인 청춘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진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영화는 마치 '폭소클럽'에서 "사장님 나빠요"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흉내냈던 블랑카(정철규)처럼 외국인 특유의 말투가 주는 웃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인 김인권이 얼굴을 들이민다. "저는 부탄 사람입니다"하고 꺼내는 그의 말은 그 '내추럴 본 동남아 삘'이 나는 김인권의 얼굴 때문에 빵 터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스펙 없이, 그럴 듯한 외모 없이 취업이란 언감생심인 우리 사회의 차가운 현실이다.

취업이 안돼 부탄 사람으로 위장해 외국인 노동자로 취업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나는 부탄사람입니다'라는 말에는 먼저 웃음이 묻어나지만, 한국인이 한국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게 된 그 현실은 눈물 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이 낮은 자들의 생고생담을 리얼하게 보여주면서 풍자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부탄 사람으로 위장한 방가(김인권)는 취업한 의자 공장에서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의 구박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면서 이 청년 실업자와 외국인 노동자는 그 낮은 위치에서 맞이하는 똑같은 사회의 냉대를 공감하게 된다.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건, 취업을 못하는 청년 실업자들이나, 또 취업을 했다고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온갖 착취를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비정규직이나 다르지 않다. 영화는 이처럼 가장 낮은 지대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의 문제를 바라본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에 의해 영화가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육상효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김인권이라는 배우가 가진 발군의 코믹 연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을 터트리게 하고, 또 가슴 한 구석을 따뜻하게 만든다. 영화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방가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욕 강의'를 하는 장면은 이 낮은 자들의 심정을 담아내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욕 먹기를 밥 먹듯 하며 살아왔으리라 짐작되는(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욕에 익숙하다) 그들이 거꾸로 욕을 배워 욕하던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통쾌함. '강아지 계열 17번'에 해당하는 욕은 어쩌면 이 힘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하지만 강력한 저항처럼 여겨진다.

물론 영화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현실에 침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전망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의식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즉 실컷 웃은 뒤에 남는 진한 가슴 저림은 이 영화의 전망이 하나의 현실이었으면 하는(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깊은 바람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인권이라는 배우는 어쩌면 이 영화 속 방가가 느꼈던 그 감정을 영화판에서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꽃미남이 아니면 주연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늘 주변에서 머물렀던 그가, 영화 속에서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 한국에서 일하고 한국에서 돈 벌고 한국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한국사람'이라는 지칭이 마치 '배우'로도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주변인들, 즉 외국인 근로자나 스펙 없는 청년 실업자 그리고 김인권처럼 만년 감초로 불리던 배우가 주연이 되는 영화. '방가 방가'가 유쾌한 건 그 전복이 주는 통쾌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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