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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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 이 비현실적 계약직에 공감하는 이유

D.H.Jung 2013. 4. 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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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 계약직의 비애 뒤집는 블랙 코미디

 

<직장의 신>은 1997년 버블경제의 허상이 드러나며 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 일명 계약직이라는 신인류의 탄생(?)을 보여주는 짤막한 다큐 영상으로 시작한다.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정규직에 반에 불과하고, 언제 잘릴 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인 계약직의 문제는 삼류대를 나와 3개월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정주리(정유미) 같은 인물에게는 우울한 현실이다.

 

'직장의 신'(사진출처:KBS)

어떻게든 정규직의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 계약직이면서도 밤을 새워 문서를 정리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든 하려는 정주리라는 인물의 처절함은 이 땅의 비정규직들이 매일 겪는 비애일 것이다. <직장의 신>은 이 지독한 현실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그 위에 미스 김(김혜수)이라는 판타지를 세워놓는다. 우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확 뒤집는 캐릭터, 바로 미스 김이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 되면 눈치 보기 마련인 회사에서 칼같이 업무를 접고 일어서는 미스 김이라는 캐릭터는 계약직이어서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을 계약직이어서 누릴 수 있는 이익으로 바꾸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선배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하는 말에 “아니오.”라고 선을 긋는 그녀는 자신이 “선배님”이 아니라 “미스 김”이라고 정정하기까지 한다. 미스 김의 이 선 긋기는 이른바 소속감을 내세우고, 심지어 가족애 운운하며 직원들을 혹사시키는 회사라는 조직의 특성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은 노동시간 그 자체가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 회사라는 조직이지만 회사는 이것을 ‘정’이나 ‘애사심’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포장해 직원들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부여하곤 한다. 미스 김이 이른바 ‘미스 김 사용설명서’의 규정을 내세우고 노동시간 이외에 하는 일에는 가차 없이 ‘시간 외 수당’을 요구하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통쾌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퇴근 시간 즈음해 갑자기 떨어지는 회식에 한 번쯤 스트레스를 받아본 직장인이라면 당당히 퇴근하며 이렇게 얘기하는 미스 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공감을 느꼈을 게다. “그건 소속이 있는 직원에게만 해당하는 경우지요. 무소속인 저의 경우, 불필요한 친목과 아부와 음주로,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 같은 회식을 이행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미스 김이라는 존재가 계약직으로 전락한 우리네 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을 뒤집는 캐릭터라면, 장규직(오지호)은 그 이름에서도 풍겨져 나오듯이 정규직이 마치 벼슬이나 되는 양 계약직들에게 마구 권력을 휘두르는 캐릭터다. 때로는 성희롱에 가까운 말로, 계약직을 비하하는 말로 사사건건 미스 김과 대립구도를 갖는 장규직은 희화화되어 그려지지만 우리 고용시장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기는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정주리의 반복되는 이 내레이션은 그래서 씁쓸함을 남긴다. 노동자들은 어쩌면 크리스마스 트리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수명이 다하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수많은 전구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한은행 화재. 계약직 여 노조원 1명 사망.’ 이 짤막한 기사 한 줄의 현장 속에 미스 김이 망연자실 서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왜 이 인물이 이토록 조직에 정을 주지 않게 되었는가의 단서가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정주리의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그래서 이 미스 김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정주리 같은 정규직에 목매는 계약직의 현실 인식을 이 드라마가 그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그저 하찮은 전구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