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쇼>, 과학과 상상력을 연결한 흥미로운 과학토크쇼

 

이제 3회를 했을 뿐이지만 KBS <장영실쇼>가 보여준 비전은 우리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비록 몇 평 남짓 되는 스튜디오에서 찍혀지는 토크쇼 형식의 프로그램이지만 이 토크쇼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상상력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한 것이었다. 장영실이라는 명명이 지칭하는 것처럼 이 프로그램은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과학을 뛰어넘어 예술과 종교, 철학 등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학문의 폭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쇼(사진출처:KBS)'

사실 3D프린터 하면 또 다른 프린터의 하나 정도로 여기고, 드론이라고 하면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송카메라로 등장하던 그것을 떠올리고, 사물인터넷이라고 하면 광고에서 봤던 저 스스로 켜지는 가로등 정도를 떠올리는 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장영실쇼>는 이러한 발명 혹은 발견이 가져올 거대한 세상의 변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3D프린터는 우리가 프린터하면 무언가를 출력하는 정도의 프린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로 상상했던 이미지들을 물질의 차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세상을 뜻하는 것이고, 드론은 그저 하늘에 띄우는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공간에 열려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사물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사물인터넷은 그저 하나의 편의성을 얘기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이어지는 초연결사회가 가져올 대변혁을 뜻하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하면서 그 미디어의 개념을 TV나 라디오 같은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신주나 도로, 자동차 같은 거의 모든 사물로 확장시켜 바라봤던 것처럼, <장영실쇼>가 바라보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하나의 단초로서 바라본다. 이것은 기존의 과학프로그램들이 과학의 발견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이다. 과학에 상상력을 덧붙이고 미래 사회를 예측하는 일은 과학의 편의성의 차원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방송 프로그램이 점점 예능화 되어가는 요즘, 그럴 듯한 과학프로그램 하나를 찾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연예인들이 나와 저들끼리의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토크쇼들은 대중들에게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계속 쏟아져 나온다. 이 와중에 우리의 재미란 표피적인 것으로만 길들여진다. 하지만 재미에 어찌 감각적인 재미만 있을까. 거기에는 지적인 재미도 있고 상상력이 주는 재미도 있기 마련이다.

 

<장영실쇼>는 그 지적 상상력의 재미를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다. 조금 어렵게 생각했던 과학 지식이나 너무 단순하게 바라봤던 과학적 발견들을 한번쯤 더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것은 어쩌면 국가경제의 미래와도 밀접한 일이 될 것이다. 과학적,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는 이들에게 어찌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장영실쇼> 같은 프로그램이야말로 KBS라는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모두가 당장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 정작 필요한 정보를 주는 교양 프로그램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의미 없는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토크쇼를 하느니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적 토크쇼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극보다는 상상력, 결과보다는 과정

 

<1박2일>은 언제부터 복불복만 남게 되었을까. 본래 <1박2일>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아니다. <무한도전>이 시도했던 여행 특집의 한 지류로서 ‘여행’이라는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뤄왔던 여행 버라이어티가 <1박2일> 아니던가. 그런데 최근 <1박2일>을 보면 여행지에 대한 기억보다는 거기서 벌인 복불복 게임만 떠오른다. 어떤 벌칙을 받았고 누가 밥을 굶었으며 누가 야외취침을 했는가만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물론 복불복 게임이 자극적인 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다. 이 재미의 핵심은 단순한 게임과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에서 생긴다. 즉 가위바위보나 돌림판 같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게임을 하지만 그 결과로 누구는 따뜻한 방안에서 자고 누구는 혹한에 야외취침을 하는 데서 나오는 자극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간단하게 상황을 긴장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인해 생고생을 하는 모습이 우습기 때문에 복불복 같은 게임은 <1박2일>만이 아니라 <무한도전> 같은 여타의 예능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복불복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했을 때는 프로그램을 보는 맛을 높여주지만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프로그램의 색깔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미료와 같다. 라면스프는 어떤 음식도 되살려내는 ‘마법의 가루’ 역할을 해주지만 너무 많이 쓰면 음식은 기억나지 않고 라면 스프 맛만 기억나게 하는 법이다. 결국 복불복의 과잉 사용은 <1박2일> 본연의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1박2일> 복불복 대축제 특집은 바로 그 복불복 게임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돌림판을 돌려 거기 나와 있는 대로 복불복을 행하는 이 단순한 놀이는 그 자체로는 웃음을 주었을 지 몰라도 <1박2일> 본연의 유쾌함이나 즐거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돌림판이 지정하는 대로 여름에 파카를 입기도 하고,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며, 낙오자가 된 이는 미스코리아 분장을 하고 연예인에게 등목을 받는 미션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여행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연예인들이 하는 이벤트나 행사처럼 보일 뿐이다.

 

서울이 공간으로 지정되었지만 이 특집을 통해 서울만의 여행지로서의 맛이 얼마나 느껴졌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과거 <1박2일>에서 경복궁을 재발견하고, 북촌의 한옥마을과 개구리가 뛰어노는 개울을 찾아 나섰던 여행들과 비교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 <1박2일> 멤버들이 어떤 복불복을 했던가는 기억하지 못해도 어떤 곳을 찾아가고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무계획 여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아이템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장소와 상관없이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설렘이나 낯선 곳에서 느끼는 한가로움, 또 새로운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주는 왁자지껄함 같은 여행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파고들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저 복불복의 연속은 당장의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만 가득 친 결과만을 만들 뿐이다. 처음 이 형식을 만들었던 이명한 PD는 복불복은 재미와 자극을 위한 부수적인 것일 뿐 핵심은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1박2일>의 핵심은 여행에 있다는 얘기다.

 

또한 복불복 게임의 남용이 씁쓸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이런 형식의 놀이가 지나친 결과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외침은 물론 예능적인 재미를 위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도 읽힌다. 놀이가 과정의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결과만 탐닉할 때, 그것은 자칫 문화의 퇴행을 만들어낸다. 한 때 어떻게 놀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남자들이 폭탄주 문화에 빠져 들었듯이 취하면 다 똑같지 어떻게 취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결과주의에 복불복 게임이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게임을 고민하고 그 게임에 새로운 스토리를 입혀 그 과정을 즐기는 <런닝맨> 같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가진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108개의 CCTV를 활용해 데스노트에 적힌 순서대로 런닝맨들의 이름표를 떼려는 사신 정우성과, 그 108개의 CCTV를 다 꺼버리고 그와 맞서려는 런닝맨의 대결은 그 결과만 보면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다. 게다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지하게 몰입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놀이에 빠져드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환기시킨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놀이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논다’는 것을 ‘게으르다’거나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불량’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과 동의어로 인식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막상 놀라고 하면 어떻게 놀아야할 지 갈피를 못잡는 것일 게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놀이의 과정일 수 있다. 그 놀이가 결과만을 추구할 때 우리네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삶에 복불복식의 놀이가 주는 잠깐의 즐거움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극이 본질을 뒤집을 때 삶은 무미건조해져 버린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만 집착하는 복불복은 그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못할 때 독이 되기 십상이다. <1박2일>의 그 재미있던 복불복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반면 <런닝맨>의 놀이는 낯설고 때론 유아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가진 놀이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여겨진다. <1박2일>의 복불복과 <런닝맨>의 게임 속에는 이처럼 우리가 놀이를 바라보는 너무나 다른 시선의 차이가 들어가 있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의 재미가 서 있는 지점

고구려 사극이 지금까지의 사극과 다른 점은 그 시대상이 고구려라는 것이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같은 소재의 드라마가 거의 동시대에 방영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료의 빈곤함으로 인해 생겨난 고구려라는 미지의 세계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태생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과 바람은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 사극이라는 지점에서 맞닿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구려 사극 삼국지’라 일컬어지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고구려라는 ‘역사’와 그 역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상상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쥐고 탄생한 셈이다.

주몽 - 상상력을 취해 인물을 살리다
40%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주몽’의 힘은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데 있었다. 상상력이 갖는 아기자기한 재미, 멜로드라마 못지 않은 멜로라인의 형성, 과거의 역사를 다루지만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되어 그 코드가 맞는다는 점, 그래서 현재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이나 판타지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 등등 퓨전사극의 장점은 지금의 ‘주몽’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과거에도 퓨전사극은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퓨전사극이라 하면 ‘해신’이나 ‘다모’ 같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소품들이었다. 퓨전사극이 갖는 장점에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이 만나자 ‘퓨전대하사극’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엄청난 스케일과 동시에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퓨전의 맛을 시청자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몽에서 대하사극을 기대한 것은 ‘주몽’이라는 제목이 주는 막연한 스케일과 민족주의적 욕구 탓이었다. ‘주몽’은 국가 간의 전쟁 같은 당대의 국제분쟁을 다루기보다는 인물의 탄생에 방점을 찍었다. 주몽이 비판받고 있는 ‘역사왜곡’과 ‘작은 스케일’ 문제는 주몽이 가려는 사극의 방향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부딪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사왜곡’ 문제는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작은 스케일’은 전쟁 자체보다는 인물들 간의 갈등에 방점을 찍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타 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높아졌다. ‘연개소문’은 시작부터 안시성 전투에 엄청난 물량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몽’의 시작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다물군의 게릴라식 전투, 그것도 한나라가 아닌 한나라의 대표성을 띄는 현토성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연개소문’이 가려는 방향과 ‘주몽’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미 성숙된 고구려라는 국가의 외세에 대한 자주적 대응, 국제정세, 정치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면 ‘주몽’은 이제 저 신화 속에 가리워져 있던 주몽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주몽’은 한 인물과 국가의 탄생을 그리는 드라마이지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물론 소소한 전투들은 있지만)을 그리는 드라마는 아니다. 주둔하고 있는 한나라군을 몰아내는 것이지, 한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국가를 세우려는 주몽과 그걸 막으려는 인물들간의 시소게임이 이 드라마의 진짜 재미이다.
주몽에 대한(혹은 연개소문에 대한) 비판은 그만큼 각자의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것의 반증일 뿐이다. 세 편의 사극이 모두 같은 지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이유는 없다(또 그래서도 안된다). ‘주몽’의 재미는 인물간에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에 있다. 그것이 타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며 주몽만의 힘이다.

연개소문 - 멜로를 버리고 정치드라마를 살리라
‘연개소문’은 좀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시작은 엄청난 물량공세였으나 그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멜로 라인이 가미되었지만 어설펐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아마도 먼저 시작해 퓨전사극으로서 주목받은 ‘주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퓨전사극의 ‘주몽’을 의식한 결과일 뿐이었다. 역사왜곡의 무리수를 가지면서도 ‘연개소문’을 안시성 전투에 끌어들였고, 전투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의 전쟁 신을 잡아냈다. 또한 이어진 요하와 요택에서의 전쟁 신은 그 스케일에 있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전쟁구경’은 있었지만 ‘인물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전투영웅을 탄생시키고 그 영웅을 통해 인물의 탄생으로 연결시켜 드라마적 긴장감을 이어갔던 ‘주몽’과는 달리, ‘연개소문’은 교묘한 전략과 전술에 더 많이 시선을 잡아두었다. 초기 전쟁의 영웅은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막리지, 을지문덕, 영양왕, 영류왕 고건무 등이 분명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연개소문과 이들 간에는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대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보여주는 민족주의적 가치는 있었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힘을 실어주는 드라마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초기에 너무 많은 걸 보여준 탓에 앞으로 보여줘야 할 전쟁신의 부담감만 더 높여놓았다.

막상 그 국제정세 속의 중심에 서 있어야할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의 기치를 걸었지만 결국 퓨전을 채용했다.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시종이 되고 거기서 김유신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몽’에서 비롯된 멜로에 대한 강박이다. 게다가 그 사랑은 전혀 현대인들의 가슴에 전달이 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멜로 신파를 답습한다. 그러면서 또 한번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의 힘을 약화시켜놓는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이 즈음 ‘연개소문’이 본래부터 추구했어야할 재미라는 바람이 조금씩 중국에서 불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고황후(정동숙 분)와 수양제(김갑수 분)라는 인물의 탄생이다. 본래 멜로가 약하고 선 굵은 사극에 강점을 가진 이환경 작가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드라마 상으로 주인공인 ‘연개소문’이 약화되고 중국의 인물들이 살아난 것은 작가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바로 이 지점이 ‘연개소문’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연개소문’이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지점은 ‘주몽’이 했던 아기자기한 인물 관계가 아니고 국제정치드라마 속에서 이전투구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이 ‘연개소문’을 보는 진짜 재미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대조영 - 정석대로 가다
아직 드라마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대조영’은 ‘연개소문’이 주창했던 정통사극의 진정한 길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군의 요동침략과 여기에 대항하는 양만춘(임동진 분),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임 혁 분)의 활약이 보인 요동성 전투 신을 보면, 스케일과 인물 양자를 꼼꼼히 잡아내는 힘이 엿보인다. 거대한 전쟁신 속에서 디테일있는 전투 신까지 엮어내면서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힘은 아무래도 중견연기자들 몫이 가장 클 것이다. 그들은 얼굴 한 번 잠깐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집중도를 높여놓는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앞서 있어 막내의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는 ‘대조영’은 양 드라마의 장점을 하나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대조영’은 ‘주몽’처럼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인물이다. 시작은 ‘연개소문’이 보여줬던 전쟁(물론 세밀한 전투신을 가진)이지만 이제 패망하는 고구려와 함께 ‘대조영’은 ‘주몽’이 했던 건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대조영’의 이런 후발주자가 갖는 장점은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고구려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연개소문’에서 보여주었던 안시성 전투를 앞으로 ‘대조영’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주몽’과 ‘연개소문’이 나름대로의 목적에 의해 정통 사극에서 한발씩 발을 떼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영’의 차별화는 바로 그 정석으로 가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사료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간다면 말이다.

고구려사, 역사와 상상력으로 복원하라
현재의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부족한 사료를 채워 넣어야 할 상상력과 역사적 개연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에는 위아래가 없다. 다만 방식에 있어서, 강점과 약점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몽’을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연개소문’을 통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리고 ‘대조영’을 통해 고구려의 패망과 그 후에도 이어지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면 고구려 사극들의 고민은 충분히 보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OSEN(www.osen.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