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리에게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번갈아 나타내는 정신질환. 이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흔히 ‘다중인격 장애’라고도 부른다. 한 사람 안에 두 명의 다른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만, 왜 그런 장애를 겪게 됐는가를 들여다보면 그저 신기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대부분은 충격적인 스트레스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그 ‘해리’는 바로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그것을 뜻한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인 주은호(신혜선)는 이 장애를 통해 주혜리라는 새로운 인격이 발현된다. 

 

잠을 경계로 주은호는 PPS 아나운서지만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일을 한다. 자고 나면 주은호가 되지만 또 자고 일어나면 주혜리가 되는 삶. 주은호가 이 장애를 겪게 된 건 자신을 유달라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는 사건 때문이다. 사망도 아니고 실종됐다는 사실은 남은 이들의 삶을 바짝바짝 말라들게 만든다. 주은호는 자신을 동경하던 동생이 아나운서가 됐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방송국 주차장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꿈이라고 적은 일기를 보고는 주차관리소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동생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주은호로 하여금 동생의 삶을 이어가려는 열망을 만들어 내고 결국 주혜리의 정체성 또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의 해리에게’는 왜 해리성 정체성 장애 같은 소재를 가져온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이렇게 두 개의 인격체로 나뉜 주은호와 주혜리가 각각 사랑에 빠지게 되는 로맨스의 재미를 담고 있다. 주은호는 8년 간 사귀었다 헤어진 같은 회사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게 되고, 주혜리는 주차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이러니 정체성 간의 대결구도가 생겨난다. 강주연과 사랑에 빠진 주혜리는 행복을 느끼며 그 정체성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주은호는 정현오와 관계를 이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건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을 지워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해리에게’가 이러한 색다른 멜로 구도를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소재를 통해 가져오고 있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로맨스에만 머물러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상처 입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주은호가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의 등장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금 자신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혜리라는 다중인격은 사실상 동생을 흉내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은호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창출해낸 존재다. 그래서 주혜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은 주은호와는 상반되어 있는데, 그건 사실상 주혜리가 주은호에게 하는 위로에 가깝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따뜻하다는 건 좋은 거예요. 왜냐아면 그건 살아있는 거니까.” 주혜리가 누군가를 만나 건네는 말들은 그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를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주은호에게 주혜리는 삶이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애써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 같은 이 말들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며 차라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로서 살아있고, 그래서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하는 그 순간이 주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주혜리(주은호 깊숙이 자리한 내면의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두 사람의 인격을 넘나들며 이를 통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기적 같은 드라마지만, 이 작품을 진짜 기적으로 만드는 건 신혜선의 연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연기가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특히 주혜리 역할은 엉뚱하면서도 의외의 감동을 주는 이런 면모들을 신혜선이 아니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싶다.(글:일간스포츠, 사진:ENA)

‘굿파트너’에서도 증명한 아역 그 이상의 배우 유나

굿파트너

흔히들 아역이라고 하면 성인역의 보조 역할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실제로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아역이 극의 메인 캐릭터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아역의 존재감으로 인해 극의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굿파트너’에서 차은경(장나라) 이혼 전문변호사의 딸 재희(유나)는 단적인 사례다. 재희는 ‘굿파트너’라는 작품이 여타의 이혼 소재 드라마들과 차별화를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변수가 되는 인물이다. 즉 이혼 소재의 드라마들은 흔히 이혼 사유를 만들어낸 배우자와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겪는 배우자가 대결하고 이를 통해 권선징악의 단순한 결론으로는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불륜 배우자가 응징되는 복수극 형태의 서사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혼의 현실은 어떨까. 그런 단순한 응징과 복수의 서사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자녀의 문제다. 부부들끼리는 서로 상처를 주면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갈라졌다고 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이혼으로 인해 자녀가 겪을 상처에 있어서는 같은 입장이 된다. 이른바 자신은 남편을 잃었지만 자식까지 아빠를 잃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게 이들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희라는 캐릭터는 ‘굿파트너’라는 이혼 소재 드라마를 색다르게 만들어낸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건 이 만만찮은 아역을 과연 누가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역할을 맡은 유나는 아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부모들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이 아이가 사실은 아빠 김지상(지승현)의 불륜 사실을 엄마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는 건 시청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엄마를 똑닮아서 ‘리틀 차은경’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똑부러지는 시크함을 가진 재희는 그래서 부모가 이혼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건 어른들이 결정할 일처럼 대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결국 차은경과 김지상의 이혼 소송의 핵심은 누가 재희를 키우느냐를 두고 벌이게 된 양육문제가 되고, 여기서 재희는 드디어 아빠에 대해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한다. 자신은 나름대로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줬지만 끝내 아빠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 차은경 앞에서도 뻔뻔하게 버텼던 김지상은 딸의 그 말에 무너진다. 같이 살자며 두고두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갚아나가겠다는 그에게 재희는 놀라운 말을 한다. “아빠랑 안 살아. 잘못한 사람은 벌 받아야지. 아빠한테 가장 큰 벌은 나 못보는 거잖아.”

 

이 대사에서 유나의 배우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이는 건, 거기에 아이 본연의 모습과 더불어 어른스러운 이 아이의 캐릭터 또한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다.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감정이 겹쳐져 있다. 이 복합적인 감정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나는 표현해낸다. 결국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게 되면서 재희는 또한 아빠의 빈자리를 계속 느끼게 되는데 결국 그 부재를 절감한 재희가 “그냥 아빠가 너무 보고싶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이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이 엿보인다. 아역이지만 그저 아이의 연기라고 보기 어려운 유나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유나라는 배우의 가능성은 이미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에서 어린 선자의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눈에 띠었다. 갈대 숲속에서 잠자리를 잡아주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짓는 어린 선자의 매력적인 모습이 그랬다. 또 영도 어시장에서 일본인 순사가 지나가자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 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어린 선자의 모습은 향후 이 인물이 얼마나 당차게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것인가를 가늠하게 만들어준 면도 있었다. 

 

유나의 이런 연기 잠재력이 폭발한 건 ‘유괴의 날’에서 천재 소녀 로희 역할을 연기해내면서다. 김명준(윤계상)이라는 착하고 어설픈 유괴범에게 유괴된 로희는 오히려 유괴범에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유괴를 소재로 하는 범죄스릴러의 평이한 서사구조를 뒤집는다. “유괴를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라고 로희가 말하면 명준은 “뭘 책임 져? 유괴를 당한 아이는 경찰이 책임을 져야지.”라고 말하는 식이다. 범죄스릴러의 틀을 갖고 있지만 ‘유괴의 날’은 아이들을 성적 순으로 세우고 그래서 1등과 꼴등을 나눠 그 가치를 판단하는 비뚤어진 어른들의 세상을 꼬집는 드라마다. 로희는 바로 그 어른들의 욕망이 투사된 1등 천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실험의 연구대상이 된 아이다. 그래서 착한 유괴범이 차라리 가장 어른다운 모습으로 로희를 지키려는 상황을 통해 진정한 어른이 부재한 우리네 현실을 꼬집는다. 여전히 아이지만 아이답지 않은 조숙한 면들을 가진 로희를 유나는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사실상 김명준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똑똑한 로희는 그러나 그렇게 정들었던 아저씨와 헤어지는 순간에 아이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나 이런 말 하기 진짜 싫은데 난 아저씨랑 같이 있는게 너무 좋단 말이야.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랑 내가 배고픈지 졸린지 심심한지 그런 관심 주는 사람이랑 나 처음 있어본단 말이야. 제발 가지마. 아저씨 가지마.” 천상 어린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조숙한 면모를 왔다갔다 하는 연기. ‘유괴의 날’에서부터 ‘굿파트너’까지 이어진 유나라는 배우의 잠재성이 느껴지는 연기가 아닐 수 없다. 

 

유나의 배우로서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2022년 ‘파친코’를 내놨고, 2023년 ‘유괴의 날’을 그리고 올해 ‘굿파트너’로 매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과정을 보면 우리가 막연히 어리다고만 생각해온 아이의 다른 면들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나이의 아이다운 면을 보이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의 잣대로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생각과 아픔 같은 것들도 갖고 있다는 걸 이 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가 보여준다. 하긴 아역을 성인역의 보조 역할로 생각하는 그 태도 자체가 구시대적 산물이다. 아이는 어려도 아이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다는 걸 유나라는 배우의 필모가 말해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SBS)

‘원더풀 월드’가 연쇄적인 복수극을 통해 담아낸 피해자들이 분노

원더풀 월드

“행복해지려고 하니까? 방송에서 그러더라구 잘 살아보겠다고.” MBC 금토드라마 ‘원더풀 월드’에서 권선율(차은우)은 왜 이렇게까지 했냐는 강수호(김강우)에게 그렇게 말한다. 권선율은 아버지를 차로 치어 죽인 은수현(김남주)에게 복수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교도소에 일부러 봉사를 다니며 은수현의 동태를 살폈고, 그의 남편 강수호가 한유리(임세미)와 불륜을 저지르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 자매처럼 자라온 한유리와 남편 강수호의 불륜은 은수현에게는 지독한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권선율이 자신이 죽인 권지웅(오만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던 은수현이지만, 결국 밝혀진 한유리와 강수호의 불륜 사실은 그를 뒤흔들었다. 한번의 실수라고 하지만 아내 은수현이 충격을 받을 걸 걱정해 애써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강수호는 권선율을 찾아와 꼭 그렇게까지 해야했냐고 묻는데, 이에 대한 권선율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방송에 나와 강수호와 은수현이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그 대목에서 권선율은 분노했다는 것. 그건 피해자들의 분노가 어디서 촉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건 바로 가해자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흔히 연예인의 학교폭력 같은 사례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가해자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하는 과거의 상처는 그저 묻어두고 지내려 해도 어느 순간 분노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원더풀 월드’에서 굳이 강수호가 방송에서 주목받는 스타 앵커이고 은수현 역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 작가로 설정된 건 그래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러니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묻어두고 살고 싶어도 자꾸만 눈앞에 그 삶이 보이게 되고, 그들의 행복해지려는 모습은 피해자인 권선율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은수현도 마찬가지로 겪었던 상처다. 그가 끝내 권선율의 아버지 권지웅을 차로 치어 죽인 건, 자신의 아들을 치어 죽이고도 그만한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토로하며 권지웅을 찾아가 사죄하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사죄하지 않는 뻔뻔함에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 

 

이처럼 피해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원더풀 월드’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아들을 잃은 은수현이나 아버지를 잃은 권선율은 모두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걸 경험했고 여전히 그 무너진 폐허 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나 ‘원더풀’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절망감은 결코 겪지 않은 이들은 가늠할 수 없는 크기가 아닐까. 

 

과연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얽힌 은수현과 권선율에게도 구원이라는 게 있을까. “죽음에 더 큰 죽음으로” 갚겠다는 권선율에게 은수현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건 쉬워. 계속 살아내는 게 어려운 거지. 넌 내가 어떻게 버텼을 것 같니? 난 건우 엄마로서 후회하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어. 오직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어. 누구든 날 흔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나를 죽일 순 있어도 이 마음을 죽일 순 없어.” 같은 고통을 겪었고 버텨내는 삶을 살아간다는 그 공감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없을까. 이제는 무너져 회복될 수 없는 ‘원더풀 월드’에서 끝내 버텨내기 위해서라도.(사진:MBC)

‘사랑한다고 말해줘’, 정우성이 11년만에 선택한 멜로 뭐가 다를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산 속 외딴 곳에 있는 집. 정적 속에 산새 몇 마리의 지저귐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그 곳에 고독의 표상처럼 서 있는 그 집을 차진우(정우성)는 사진에 담는다. 마치 그렇게 침묵과 고요 속에 외롭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듯이.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남자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제주공항에 도착해 바닷가 촬영장을 찾은 정모은(신현빈)은 ‘여자4번’으로 불리는 무명배우다. 스튜어디스였지만 배우의 꿈을 시작한 그 선택은 쉽지 않다. 연기가 어색하다며 제주까지 온 그녀를 감독은 다른 배우로 바꾸겠단다. 그러면서 그녀가 배역을 위해 고심해서 산 스카프는 마음에 든다며 팔라고 한다. 정모은이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무례한 말들로 가득하다. 

 

그 바닷가를 찾았다가 우연히 정모은을 멀리서 보게된 차진우는 그녀를 사진에 담는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차진우의 시선에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지 제주를 찾아 하염없이 바다만 보고 앉아 있다 결국 죽어버린 한 남자를 벽화로 남긴다. 그 남자는 그렇게 외로운 모습 그대로 벽화 속에 남았다. 그 벽화를 보게 된 정모은은 거기에 포스트잇으로 메모를 남긴다. 

 

말이 있는 세계와 말이 없는 세계. 말로 하는 소통이 더 잘 될 것 같고, 침묵은 불통일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정모은이 마주한 세계가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무심코 던지는 무례한 말들 속에서 상처받는다. 반면, 차진우가 그린 말없는 고요의 벽화를 보며 알 수 없는 위로 같은 걸 받는다. 갑자기 벌어진 화재 사고 속에서 저마다 빠져나가라며 아우성을 치지만, 정모은은 그런 ‘말’ 대신 듣지 못하는 차진우를 구해 함께 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발길을 돌린다.  

 

정모은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차진우가 전하는 감사의 표시는 말이 아니라 스케치북에 한 자씩 눌러쓴 글귀라 더 마음을 움직인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그리고 무사해주셔서.’ 듣지 못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 있다는 건 먼저 마음이 움직이면 그리 불편한 일만은 아니다. 꼬르륵 소리에 배를 만지자, 이를 오해해 ‘아파요’라고 적은 차진우의 글에 정모은이 ‘고파요’라고 정정해줌으로써 피어나는 웃음처럼 말이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이들은 상대가 살고 있는 다른 세계를 알고 싶어진다.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 차진우는 자신의 캠핑카로 정모은을 초대한다. 함께 라면을 끓여먹는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자 비를 피해 앉은 정모은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는데, 그 와중에도 차분한 차진우를 보고는 자신도 귀를 막아 본다. 그가 사는 세계가 궁금한 것.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도 나쁘지 않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청각 장애를 가진 차진우와 배우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정모은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는가를 멜로라는 장르적 틀을 통해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수한 가시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무시로 상처받고 상처주는 세상이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정모은이 차진우가 마주하고 있는 ‘침묵과 고요의 세계’를 궁금해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그건 차진우에겐 고독이겠지만. 

 

서울로 돌아온 차진우는 한 아트센터에서 청각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수어로 하지만 이들의 손으로 하는 대화는 화기애애하다. 반면 배역 캐스팅을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인 정모은은 가시 같은 말들에 상처받는다. “열심히 한 티가 나요. 근데 우리가 연기 보자고 했지 암기 실력 보자고 했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뭐랄까 난 재미가 없어.” 그러자 정모은은 “제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한 게 잘못 된 건가요?”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결과로만 판단하는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말까지 듣게 된다. “아니 승무원 출신이면 좀 타이트한 유니폼이라도 좀 입고 와 가지고 어필이라도 좀 하지 이게 뭐예요.” 

 

‘거리의 이방인 옆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부디 지금은 외롭지 않길.’ 제주 어느 바닷가에서 외롭게 죽어간 사내를 그린 벽화에 정모은은 그런 포스트잇을 남겼다. 그 포스트잇에 화답하듯 차진우는 그녀의 그림을 그려 ‘배우님께’라는 글귀를 남긴 스케치북을 건넸다. 정모은은 그 글귀를 떠올리며 혼자 생각한다. ‘나, 배우라는 말 처음 들어봐요. 보조출연, 단역, 엑스트라 뭐 그렇게들 말하니까.’ 말보다 소리없이 마음을 담은 글 하나가 더 마음을 움직인다. 

 

정우성이 11년만에 하는 멜로는 이처럼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랑 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말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이제 그 서로 다른 세계를 향해 마음이 움직인다. 우연히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난 자리에서 여자는 ‘열심히’ 연습한 수어로 남자의 세계를 향해 들어온다. 남자는 침묵 속에서 말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노력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를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준비한 말을 천천히 한 뒤엔 웃었다. 가벼운 인사 몇 마디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냐는 듯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건  소리없는 사랑의 시작이었다.(사진: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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