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유해진, 촌스러움 혹은 사람 냄새 본문
‘삼시세끼 light’, 유해진이 보여주는 촌스러움의 가치
차승원이 고추장찌개에 넣을 청양고추를 따러 잠시 자리를 비운 몇 분 사이, 김치를 썰던 유해진은 갑자기 찌개에 김치를 넣고 싶어진다. 그만큼 김치를 좋아하고 펄펄 끓는 냄비만 봐도 넣어 끓여 먹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는 유해진은, ‘그러다 차승원한테 혼난다’는 나영석 PD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김치를 숭덩 짤라 찌개에 넣고만다. 돌아온 차승원이 고추장찌개에 청양고추를 잘라 넣고 휘휘 젓는데 무언가 낯선 비주얼에 눈에 들어온다. 금세 알아챈 차승원은 “이거 왜 김치를 넣었어?”하고 나무란다. 유해진이 감짝 놀라 올려다보자 차승원은 누가 고추장찌개에 김치를 넣냐며 안만든다며 국자를 던져놓고 나가버린다. 순간 흐르는 침묵. 유해진 특유의 너스레가 시작된다. 차승원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괜스레 막걸리 채운 잔을 들이밀며 “한 잔 해”라고 말한다. 그러자 점점 굳었던 차승원의 표정이 풀어진다. 망쳐버린 고추장찌개를 되살려내고 금세 화기애애 해져서 함께 밥상을 차려 먹는 두 사람의 풍경이 이어진다.
최근 시작한 tvN ‘삼시세끼 light’에서 등장한 이 짧은 장면은 유해진이라는 인물이 무엇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토록 빛을 발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이번 ‘삼시세끼’가 ‘light’라는 수식어를 붙인 건 이전처럼 두 사람을 보조해주던 손호준 같은 후배가 빠져 있어서다. 오롯이 차승원과 유해진이 끌고 가는 콘셉트이랄까. 물론 게스트로 임영웅이나 김고은이 출연하지만 두 사람에 온전히 무게중심을 세우는 방식이다. 그런데 손호준 같은 후배가 없이 차승원과 유해진 두 사람이 막상 가게 되니 어딘가 심심한 느낌이다. 두 사람이 해야 할 노동(?)이 많아져 수다 떨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아저씨 둘이 수다를 떨 것도 사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해진이 진짜 시큼한 김치 냄새에 혹해서 고추장찌개에 그걸 넣는 순간 갑자기 이 심심했던 예능의 정경에 재미가 생겨난다. 요리에 진심인 차승원이 진짜로 기분 상해 하고 유해진은 특유의 너스레로 그 마음을 풀어주면서 별 거 없어 보이는 이 시골 저녁에 긴장과 이완의 극적 상황들이 전개된다. “분명 끈인데 왜 아니라고 하는 지 모르겠어.”라며 ‘노끈’을 꺼내놓고 해학적으로 웃는 유해진의 모습은 어딘가 촌스러운 정감이 묻어난다. 일을 하면서 별것도 아닌 농담을 툭툭 던져 웃게 만드는 허허로움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시골에 가서 세 끼 챙겨먹는 단순한 콘셉트를 가진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에 유해진이 어째서 이토록 찰떡 같은 캐릭터로 서 있는가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 냄새 가득한 유해진의 모습은 그가 지금껏 해온 연기의 영역에서도 특유의 빛을 발한 면이 있다. 그는 97년부터 영화 ‘블랙잭’으로 배우를 시작했지만 거의 대부분 단역과 조연을 오가는 역할들을 맡았다. 그러다 대중들의 눈에 확실하게 각인된 건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천만 영화 ‘왕의 남자’에서 육갑이라는 광대로 등장하면서다.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코믹하면서도 처연한 광대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낸 그는 이듬해 ‘타짜’의 고광렬 역할과 주목을 받았고 그 다음 해인 2007년 ‘이장과 군수’에 차승원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때부터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유해진은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했는데, ‘전우치’ 같은 판타지물에서 초랭이 역할로 깨알같은 감초 웃음을 선사했고, ‘이끼’ 같은 스릴러에서는 정반대로 다소 모자라면서도 섬뜩한 역할을 소화했다. 그는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를 오가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 밑바닥에는 어딘가 사람 냄새 나는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가 한 몫을 차지했다. 따뜻한 느낌이 해학적으로 풀어지면 코미디가 되지만, 그 따뜻한 이미지를 배반하는 모습에서는 섬뜩한 스릴러가 만들어졌다. 물론 매일 아침 루틴처럼 해온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액션 영화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놈이다’, ‘럭키’, ‘공조’, ‘택시운전사’, ‘1987’, ‘완벽한 타인’, ‘말모이’, ‘봉오동전투’, ‘승리호’ 등등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했지만 최근 그의 연기가 가장 도드라진 작품은 ‘올빼미’다. 유해진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인조라는 왕 역할을 연기했는데, 다소 병적이고 광기 가득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소름돋게 만들었다. 과거 ‘왕의 남자’에서 광기 어린 연산군 앞에서 살기 위해 광대 놀음을 했던 육갑 연기를 했던 걸 떠올려보면 17년만에 이제 왕 역할을 하게 된 유해진의 성장 과정이 배역으로도 느껴진다. 물론 최근 ‘파묘’를 통해 또 하나의 천 만 영화 배우가 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지만.
그런데 이러한 유해진이 가진 경쟁력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특유의 촌스러움 혹은 사람 냄새 가득한 그만의 개성이 엿보인다. 그는 아는 것도 많아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지성적인 배우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더 느껴지는 배우다. 그가 해온 일련의 역할들이 이른바 ‘장삼이사(張三李四)’라 불리는 평범한 서민들이었던 건 우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건 물론 오래도록 조연과 단역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작을 수 있는 그 역할들을 크게 만들어내는 그의 진정성 가득한 연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삼시세끼’로 그가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특유의 사람 냄새가 불러 일으키는 따뜻한 정서가 만들어내는 그리움이랄까.
유해진은 이른바 ‘촌스러움’의 가치를 되살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흔히들 ‘촌스럽다’는 표현을 우리는 한때 부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해왔다. ‘촌뜨기’나 ‘촌놈’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도시 생활이 주는 각박함은 정반대로 ‘촌스럽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빈틈이 많아 보이는 시골의 푸근함이 그것이다. 유해진은 바로 그 기분 좋은 촌스러움이 ‘인간화’한 인물처럼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래서 그의 빙그레 웃는 웃음을 마주하고 있자면 지독한 도시의 경쟁에서 잠시 벗어나 한껏 힘을 빼는 삶을 동경하게 만든다. 단 며칠이라도 그렇게 삼시 세 끼 챙겨먹으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글:국방일보,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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