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원진아가 해낸 ‘그사이’의 깊은 몰입감

제목은 <그냥 사랑하는 사이>지만 연기는 그냥 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많은 사고 피해자 가족들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 앞에서는 섣부르게 웃는 것조차 감히 해서는 안 될 무례처럼 느껴진다. 그것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래서 건물 붕괴 사고 후 생존자들이 만나 사랑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드라마에 이준호와 원진아라는 아직은 확고한 연기로서 자신을 대중들 앞에 증명해냈다고 보기 어려운 배우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준호는 지난 작품인 <김과장>에서 독특한 악역 서율 역할을 해내면서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이돌의 잔상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고, 원진아는 아직 대중들이 잘 모르는 신인이다. 어찌 기대보다 우려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2회까지 방영된 드라마 속에서 이런 우려는 오히려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다. 청춘의 시기가 갖는 풋풋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상처를 안고 어려운 현실을 버텨내는 그런 모습들이 전혀 이물감 없이 인물 속에 녹아들어서다. 이제 거꾸로 이들이 아니었으면 강두(이준호)와 문수(원진아) 역할을 그 누가 이만큼 깊은 몰입감으로 이끌어냈었을까 의구심을 갖게 될 정도다. 

그것은 이 작품의 함영훈 CP가 매체를 통해 밝힌 바대로 이들이 갖고 있는 ‘진지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강두와 문수를 연기하는 이준호와 원진아는 실로 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그 지워지지 않는 아픈 삶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살아가고, 상처가 나지 않으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마구 몸을 부리는 강두는 거칠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여린 인물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듯한 어린 마음이 그에게서는 느껴진다.

반면 가녀리게 보이지만 오히려 엄마를 챙기고 아빠를 다독이며 생활력을 보이는 문수는 굉장히 강한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보이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그 아픔과 마주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토바이에 치일 뻔한 문수를 강두가 구해냈을 때, 문수는 자신보다는 오히려 도로에 쓰러진 그 배달원의 안위를 더 걱정한다. 

강두와 문수가 이렇게 다른 면을 갖고 있는 건 사고 당시의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다. 당시 먼저 구출된 문수가 들것에 실려 나갈 때 강두는 그 매몰된 곳에 갇혀 외치고 있었다. 거기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 다치는 것을 먼저 걱정하는 문수와 달리, 강두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게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강두는 문수가 궁금하다. 힘겨움 속에서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리고 문수는 감두가 신경 쓰인다. 계속 상처를 입으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이렇게 인물들의 감정과 성격 깊숙이 우리가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이들을 연기해낸 이준호와 원진아 덕분이다. 연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만들어낸 어떤 진정성이 어쩌면 어려울 수 있는 이 역할들을 소화해낼 수 있게 했다고 보인다. 이준호라는 이제는 연기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배우가 다시 보이고, 원진아라는 보석 같은 신인 배우가 새삼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사진:JTBC)

‘기억의 밤’, 아픈 기억은 어째서 밤을 필요로 하는가

영화 <동주>에서 감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점점 파리해져가는 강하늘의 그 초점없는 눈빛이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관객이라면 장항준 감독의 신작 영화 <기억의 밤>은 바로 그런 강하늘의 얼굴이 가진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다가올 게다. 밝고 맑은 청년 같은 얼굴로 시작하지만 저 뒤편으로 가면 ‘절실함’에 몸부림치다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그의 얼굴 속에 한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느낄 수 있을 테니.

<기억의 밤>은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공포물이 갖는 충격 요법이 적절히 배치된 작품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기 어렵고, 또 벌어진 일이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주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워낙 반전의 반전이 많은 작품이라 어떤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기억의 밤>은 어느 날 낯설게 변해버린 형 유석(김무열)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동생 진석(강하늘)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집으로 가족이 모두 이사를 하면서 밤마다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을 추적해 가는 진석은 그가 본 것들이 실제인지 아니면 꿈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가림막이 주는 공포스러운 상황은 그러나 영화가 중반 정도를 지나면서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공포물이 아닌 스릴러의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소름 돋는 반전이 관객의 예측을 깨버리면서 이야기는 과거 우리가 겪어냈던 시대의 아픔을 기억으로 소환해낸다. 진석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던 영화가 사회적 함의로 확장되어간다는 건 이 작품이 단순한 스릴러 장르의 쾌감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전하려는 주제의식이 분명하다는 걸 말해준다. 

밤에만 벌어지는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기억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일들은 이 작품의 제목이 왜 <기억의 밤>인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진짜 기억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는 밤이라는 영화의 실제 상황을 지시적으로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의 아픈 기억이 어째서 망각이라는 밤이 필요한가를 얘기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 2,30년 동안 꽤 많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어왔다. 다리가 붕괴되고 건물이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해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고 지하철 화재와 배의 침몰로 무고한 생명들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른바 안전 불감증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사건들이 가진 충격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그건 진짜 우리가 안전에 대한 불감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어쩌면 너무나 고통스런 기억들이어서 마치 없는 일처럼 치부하고,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여기려는 안간힘에서 생겨난 ‘증상’은 아니었을까. 기억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밤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의 밤>이라는 제목은 우리 사회가 가진 이 증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로 강하늘은 그 변화해가는 얼굴 속에 우리 사회가 겪은 그 상처의 면면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연기를 보인다. 스릴러 장르가 가진 반전의 쾌감이 주는 재미가 그저 장르적 재미로 휘발되지 않고 어떤 사회적 함의로 확장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이 강하늘의 얼굴에 담긴 시대의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얼굴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상처들이 어른거린다.(사진출처:영화<기억의 밤>)

‘애나벨’, 불길한 상상이 만드는 공포가 더 무섭다

영화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개봉되기 전부터 무섭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무서워 팝콘이 날아다니니 굳이 팝콘을 사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유명한 <컨저링> 시리즈 사상 가장 무서운 작품이라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사진출처: 영화<애나벨:인형의 주인>

악령 들린 인형 하나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무서울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관객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는가 하는 비판을 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며 “안 돼”, “가지마”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몰입하는 관객도 있다. 어째서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애나벨>은 사실 다 보고 나오면 내가 왜 그토록 긴장했던가가 놀랍게 느껴지는 공포영화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이 실제적인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충격을 가하지만, <애나벨>은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침묵과 가려짐의 시간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 영화다. 바로 그 장면과 장면 사이의 참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이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마련인 불길한 상상. 그것이 <애나벨>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 속으로 깃드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실의에 빠진 애나벨 인형을 만드는 장인 사무엘(안소리 라파글리아)과 그의 아내 에스더(미란다 오토). 그리고 12년 후 그들이 내준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섬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 애나벨 인형에 깃든 악령이 깨어나 소녀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 과정이 주는 공포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어떤 끔찍한 공포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다름 아닌 상처받아 약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약한 정신 속에서 깃드는 불온한 상상은 악이 자라나게 되는 씨앗이 되고 그것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간다는 것. 딸의 죽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무엘과 에스더가 그렇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 보육원 친구, 언니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는 재니스(탈리사 베이트먼)가 그렇다. 

즉 사무엘과 에스더 그리고 재니스에게 그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상처로 인해 그들 안에서 만들어진 ‘불길하고 불온한 상상’이 그 악령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재니스가 그 악령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힘을 통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리는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허수아비나, 그저 아이들 장난감일 수 있는 인형 그리고 장난감 총이나 그저 방치된 우물 같은 것들은 그래서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공포의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반복된다. 관객 스스로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공포가 배가된다는 것. 

그래서 <애나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유난히 많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그토록 무서울 수가 없는 영화지만, 공포영화가 너무 익숙해 그저 액면 그대로의 장면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심심한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소름끼치는 공포가 상상력만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화랑>이 유골무죄 무골유죄 청춘을 보듬는 방식

 

유골무죄 무골유죄.” 골품이 있으면 죄가 없고 골품이 없으면 죄가 있다? 이 조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삼국시대 신라의 골품제도에 빗댄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금수저 흙수저의 신라 버전쯤 될까. KBS 월화드라마 <화랑>이 그려내는 청춘들은 당대의 골품제도라는 태생적인 틀에 묶여 꿈이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화랑(사진출처:KBS)'

무명(박서준)은 그 골품제도에 의해 많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인촌에서 함께 자라온 둘도 없는 친구 막문(이광수)이 그 신분제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누이를 찾기 위해 왕경을 넘었다는 죄로, 또 절대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얼굴을 봤다는 죄로 막문이 죽음을 맞이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무명은 본래 안지공(최원영)의 아들이었던 막문의 진짜 이름 선우를 자신이 대신 쓰기로 한다.

 

꽃다운 청춘들, 화랑이 모이는 선문이 겉으로 표방하는 것이 골품의 차별이 없다는 건 그래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론 그 안에서 뼛속까지 골품의 틀에서 살아왔던 진골들이 선우 같은 반쪽(반만 진골)을 집단적으로 따돌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오로지 실력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 기준들이 제시되는 건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현재에 어떤 판타지를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골품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의 화랑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하다못해 빨래까지) 상황은 진골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지만, 애초에 천인으로 살아왔던 선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건 여전히 귀천을 따져 자신을 능멸하고 나아가 여동생인 아로(고아라)까지 희롱하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류(도지한)는 마치 현재의 비뚤어진 상류층들의 갑질 행태를 고스란히 재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우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반류가 선우에게 너 같은 반쪽이 시궁창이라고 말하자 선우는 이렇게 일침을 가한다. “시궁창은 너지. 스스로 뭘 해본적도 없고. 그 자리에서 썩고 있는 너 같은 고인 물.” 이 대사가 말해주듯 이 귀족 자제들이 화랑으로 모인 선문에서 선우라는 이질적인 인물은 그래서 향후 이들 화랑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라는 골품의 틀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들을 다시 흐르게 만들어줄.

 

선우가 온 몸에 상처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라는 건 이런 그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다. 흥미로운 건 그에게 마음이 설레는 아로가 의원 아버지인 안지공에게 곁눈질로 의술을 배운 인물이라는 것. 아로의 캐릭터는 다친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이다. 아로를 구하다 손바닥을 칼에 베인 선우를 치료하면서 다치지 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그것이 마치 상처받은 청춘을 보듬는 치유의 손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선문에서 벌어진 화랑들의 집단 난투극으로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로가 나서는 장면은 그래서 이 캐릭터를 보다 명확히 해준다. 또한 잠 못 드는 삼맥종을 옆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치유의 캐릭터 아로는 선우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주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삼맥종을 잠시 쉬게 해준다.

 

이것은 <화랑>이라는 사극이 신라의 화랑들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청춘들을 보듬는 방식일 것이다. 물 수()를 보여주며 이것의 성격을 묻는 위화공(성동일)에게 삼맥종은 물은 선하다고 말한다. 늘 자신을 낮추고 밑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선우는 물이 고단하다고 말한다. 물은 몸속에서 금이면 금, 물고기면 물고기를 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위화공이 물 수()자와 함께 내놓은 표제어 왕()의 역할을 묻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우의 심경이 담겨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춘들의 고단함. 그 고단함을 없애줄 수 있는 건 더 고단하게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왕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그런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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