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 라디오스타 특집, 그 유쾌함과 훈훈함의 정체

 

MBC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특집에는 특이한 연출 구성이 눈에 띈다. 그것은 <무한도전> 멤버들이 라디오를 진행할 때, 카메라가 전국 방방곡곡의 라디오가 있을 법한 현장을 스케치하며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실 라디오의 소리는 눈에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연출 구성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마치 눈에 보는 듯한 느낌으로 바꿔준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뮤직캠프> 일일 DJ를 맡아 정형돈이 선곡한 곡을 어느 길거리를 지나는 이들이,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또 퇴근길에 지친 몸을 지하철에서 흔들리고 있는 직장인들이 듣는 듯한 그 장면을 눈으로 본다는 건 특이한 경험이다. 그것은 라디오가 가진 소통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귀에서 귀로 전해지는 그 따뜻함. 길을 걷다가도 문득 미소 짓게 만드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이 거기에서는 묻어난다.

 

물론 이런 연출방식은 저 박중훈과 안성기가 나왔던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나왔던 것들이다. 영월로 내려가게 된 한물 간 스타가 라디오 지방방송(?)을 통해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는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은 그 바탕에 라디오가 가진 특유의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흘러나올 때 카메라는 그 음악을 따라 지역 곳곳의 풍경들을 담아낸다.

 

라디오는 그 소통방식 자체가 동시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지금 이 시각 전국 곳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라디오가 주는 훈훈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그 각자 저마다의 삶을 사는 이들이 똑같은 라디오를 듣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함께 취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특집은 멤버들의 일일DJ 도전이라는 표면의 미션을 담고 있지만, 그 이면이 잡아내는 이 라디오 특유의 감성이 없었다면 밋밋해졌을 아이템이다. 즉 라디오를 소재로 다룬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이를테면 <12>에서 갑자기 라디오국과 연결해 이원생방송을 한다거나, 아니면 라디오 부스를 찾아와 방송을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라디오 방송에만 집중적으로 카메라가 드리워졌다면 이번 라디오스타 특집 만큼의 효과를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재석이 길거리 배회 전문 리포터로 박명수를 세우고 그 시간에 강남역과 신도림역 같은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는 건 그래서 우연적인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과 그 방송이 닿는 곳곳의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일이다. 정형돈이 실수를 연발하는 <음악캠프>를 진행할 때, 배철수가 느긋하게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음악을 신청하는 모습은 그래서 이색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날이 어둑해져가는 도시를 내다보며 부스 바깥에서 그렇게 음악을 듣는 배철수의 모습은 DJ와 청취자가 역전된 상황을 통해 라디오가 가진 수평적인 소통의 위계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누가 일방적으로 전하고 누가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소통의 현장을 시종일관 게시판을 확인하며 의견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DJ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 바로 여기에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특집의 진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세상은 소통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는 라디오스타 특집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젠체할 필요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소통시켜주는 라디오는 그래서 이 첨단 미디어의 시대에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레이디스 코드에 대한 유재석의 짧은 추모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모두 먹먹하게 만드는 것이 라디오의 힘이다. 거기에는 엄청난 네트워크와 빠른 속도로 연결되어 있어도 소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갈증이 묻어난다.

 

라디오의 소통을 기적처럼 바라보게 만드는 건 그래서 어쩌면 시대의 불통이 아닐까.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특집은 라디오라는 매체를 가깝게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시대의 대중들이 희구하는 소통에 대한 갈증을 재확인하게 해주었다. 왜 이처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소통하지 않는 것일까.

 

<해피투게더> 서태지보다 <12> 조인성인 이유

 

서태지가 KBS <해피투게더>에 단독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에 대해 반가움보다는 불편함을 거론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작금의 달라진 예능의 생태계를 가늠하게 한다. ‘신비주의의 대명사이자 마지막 남은 신비주의라고까지 불리던 서태지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신비주의가 심지어 마치 연예인병처럼 거드름으로 느껴지는 시대다.

 

사진출처:서태지 컴퍼니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서태지는 그간 좀체 내밀지 않았던 얼굴을 예능에서 보이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신비주의를 벗어나 좀 더 친근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탈신비주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해피투게더>의 제목에 걸맞지 않게 다른 게스트 없이 단독 출연해, 그것도 유재석과 11 토크를 한다는 건 그래서 여전히 서태지의 이미지가 과거 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서태지의 의도인지 아니면 <해피투게더> 제작진의 과잉 배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차피 너무 과도하게 만들어진 신비주의 이미지가 버겁고, 그래서 보다 편안한 음악인 서태지로서 대중들에게 다가오려 마음먹었다면 일단 그 등장하는 방식부터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

 

이른바 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할 게스트가 애매하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이른바 이라는 것을 깨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게 서태지다. 물론 음악인으로서의 급은 당연히 지켜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서태지는 좀 더 자신을 일상인에 가깝게 내려놓아야 지금 시대의 대중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인성이 <12>에 차태현 쩔친(쩔은 친구)’으로 깜짝 등장한 것은 여러 모로 서태지의 행보에 시사 하는 바가 많다. SBS <괜찮아 사랑이야>로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가 신비화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에 자신을 찾아와 무작정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차태현에게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인성에게 예능감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고, 그러니 이런 갑작스러운 방송 출연이 부담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선배 형을 위해서 열심히 방송에 임하는 조인성에게서는 신비주의의 그림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뭘 해도 CF 같은 그림을 만드는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깨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선수인 독하디 독한 <12>의 복불복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차태현과 함께 실미도로 들어오는 조인성을 보며 다른 게스트들과 출연자들 그리고 심지어 작가들마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조인성 같은 인물이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이질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면이 조인성의 <12> 출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지금 시대에 대중들이 스타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서태지는 좀 더 타인들과 함께 섞일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이미 지나가버린 신비주의 시대에 여전히 마지막 신비주의라는 불편한 수식어를 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요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는 것이다. 조인성의 <12> 출연에 쏟아지는 박수와 서태지의 <해피투게더> 단독 출연에 쏟아지는 불편함은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비정상회담>, 이런 기적 같은 토크쇼가 있나

 

점점 이 외국인들의 매력에 빠져든다. JTBC <비정상회담>에 가나 대표 샘 오취리처럼 이미 예능 프로그램으로 익숙해진 웃기는(?) 외국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차츰 그 옆에 앉아 있는 자못 진중하고 신뢰가 가는 중국 대표 장위안이 눈에 들어오고,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더 보수적인 터키 대표 에네스 카야의 까칠함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지적인 미국 대표 타일러 라쉬나, 여성을 예술작품처럼 대한다는 이태리 대표 알베르토 몬디, 또 멋진 영국 신사 제임스 후퍼도 빼놓을 수 없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세계 남자 실체 보고서라는 주제로 나누는 대화는 마치 <마녀사냥>의 글로벌판 같은 흥미로움을 안겨준다. 거기에는 나라는 달라도 남자라는 똑같은 지점이 주는 국가를 초월한 공감대가 있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 간 문화의 차이에 따라 너무나 다른 의견의 충돌이 생겨나기도 한다. 마치 워밍업을 하는 듯 각 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늘어놓고 각국 비정상 대표들이 그 편견에 대한 반박을 하는 과정에서는 솔직한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또 여자의 핸드백을 들어주는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행동하는 남자는 여자들이 싫어한다며 진심으로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터키 대표 에네스 카야와 그래도 여자가 원한다면 들어줘야 한다고 말하는 샘 오취리의 설전은 물론이고, 갑자기 벌어진 샘 오취리와 기욤 패트리의 자존심을 건 팔씨름도 흥미롭다. <비정상회담>이 이토록 별거 아닌 이야기와 상황에도 흥미로움을 주는 건 여기 출연하는 외국인들이 예능을 한다기보다는 진짜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큰 반향을 몰고 오는 장위안의 경우, 중국에 대한 편견을 하나하나 들어보며 어이없어 하다가도 스스로 중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는 질문에는 겸허하게 도덕의식의 부족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는다. 자칫 보수적인 이미지가 될 수도 있는 에네스 카야가 괜찮게 다가오는 것도 그가 말하는 대목이 진짜 자신들의 문화이며 생각이라는 걸 솔직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태리 남자들이 여자를 밝힌다는 말은 발끈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태리 대표 알베르토는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는, 그렇게 남자들이 여자를 좋아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준다. 우리나라에 노인 공경이 있듯이 이태리에는 여성 공경(?)’이 있다는 것. 여성을 먼저 배려하고 챙기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결과라는 것이다.

 

사랑 표현에 대해 이야기 하다 갑작스레 제안된 일본 대표 타쿠야의 중국 대표 장위안을 상대로 한 사랑고백 상황극은 이전에 이 토크쇼에서 만들어졌던 일본과 중국의 심상찮은 기류를 떠올려 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타쿠야의 사랑고백에 장위안이 역사를 들고 나오자 타쿠야가 상황극일 뿐인데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으면 어떡하냐고 장위안을 질책하고, 그 말에 장위안이 미안해하는 모습은 이 토크쇼가 가진 특별한 점을 잘 드러낸다. 국가 간의 다소 껄끄러운 문제들도 <비정상회담>이 추구하는 지극히 비공식적인 토크쇼에서는 충분히 풀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 두 사람이 토크쇼가 끝난 후 소주를 기울이는 장면이 살짝 들어간 것은 이 토크쇼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놀라운 건 이들이 이렇게 때론 의견충돌을 일으키고 때론 공통분모를 찾아내고는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반복되면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외국인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다. 물론 요즘은 해외여행이 그만큼 자유로워져서인지 외국인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외국인하면 어딘지 나와는 다른 존재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정상회담>을 통해 보여지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다. 문화적 차이는 조금 있어도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그들은 언제든 우리와 소통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준다.

 

이것은 <비정상회담>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백 번 외국인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며 함께 공존할 것을 외치는 것보다 이렇게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특정한 화제를 갖고 벌이는 토크의 용광로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지금 여기 출연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서 왠지 정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변화인가.

 

<드래곤 길들이기2>에 끌리는 몇 가지 요소들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만을 놓고 보면 <드래곤 길들이기2>역시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통설을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드래곤 길들이기>가 워낙 전편에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에 남게 된 잔상이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게 주인공이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보여준다는 건 웬만한 파격을 즐기는 제작자로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사진출처:영화 <드래곤 길들이기2>'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드래곤 길들이기>는 여타의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틀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아이도 재밌지만 어른들도 그 메시지에 공감했던 것. 이로써 <드래곤 길들이기>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뛰어넘었고, 또 타자와 어떻게 공존해나가는가에 대한 주제의식을 살릴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드래곤 길들이기2>는 메시지에 있어서 조금은 약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인공 히컵이 다리를 잃는 대신 투슬리스와의 우정과 공존을 얻어냈듯이 이번 속편에서도 잃는 것과 얻은 것이 등장한다. 그것 역시 파격이라면 파격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전편만한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블록버스터 영화는 메시지만을 보기 위해 보는 건 아니다. 압도적인 볼거리의 측면을 보면 이번 속편이 전편보다 훨씬 더 화려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히컵이 투슬리스와 함께 비상하는 장면이나 훨씬 더 스케일이 커진 전쟁신.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해진 드래곤 캐릭터들은 이 영화가 메시지면에서 약해졌다고 여겨지면서도 전체적으로 힘을 잃지 않는 이유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이들이라면 누구나(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갖게 되는 애완동물 길들이기의 욕망을 자극한다. 애완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상반된 감정은 타자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게 될 때 느끼는 즐거움이다. <드래곤 길들이기>가 전편에서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그리면서 관객에게 부여한 감정이 그것이다. 귀여움과 용맹함을 겸비한 투슬리스는 그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캐릭터다.

 

물론 히컵 엄마의 등장은 조금은 생뚱맞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등장해 히컵이 그렇게 드래곤과 교감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해주는 장면도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는 화기애애함을 보여주면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긴박감이 상당부분 사라진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의 등장은 이번 작품의 방점이 히컵의 성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두고 보면 괜찮은 설정이라 여겨진다.

 

전편이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과 공존을 그렸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할 <드래곤 길들이기2>가 선택한 건 드래곤과 드래곤의 대결이다. 그 거대한 드래곤 전쟁의 볼거리는 더욱 커졌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 점은 아쉬운 면이다. 적어도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러온 관객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금은 새로운 대결을 보고 싶어했을 수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2>는 확실히 전작이 남긴 메시지의 강렬함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 독특한 <드래곤 길들이기>의 세계가 가진 다양한 볼거리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만일 3D로 보게 된다면 투슬리스와 함께 하늘을 비행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2>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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