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홍석,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실로 참혹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뺑소니를 당했고 간신히 이어붙인 생명줄을 돈 앞에 무너져 내린 친구가 끊어버렸다. 딸의 죽음에 비통해하던 아내마저 죽음을 맞이하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그는 오히려 범법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진실은 은폐되었고, 그렇게 돈과 권력으로 진실을 은폐한 이들은 정치 일선에서 ‘서민 운운’하며 정권을 잡기 위한 쇼를 한다.

 

'추적자'(사진출처:SBS)

형사로서 그토록 지키려 애쓴 법 질서가 이제 거꾸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현실, 그 누가 법에 정의를 기대할까.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은 그렇게 끝단에 몰려 세상의 추악한 진면목을 바라보게 된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강동윤(김상중) 앞에 총을 들이대지만 백홍석의 그 행동을 강동윤은 거꾸로 정치적 음모론으로 덮어버린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마음이 없는 강동윤과 같은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네 정 많고 눈물 많은 수정이 아빠 백홍석은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늘 땀에 절어 번질번질한 얼굴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으로 처연하게 이 더러운 현실을 바라보는 백홍석에 똑같은 가슴 먹먹함을 느꼈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게다. 도대체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고 무엇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권력자들은 저들끼리 권력을 잡으려고만 혈안이다. 그들은 서민을 외치지만 서민 정치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서민’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호명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IMF가 터졌을 때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그네들의 사라져버린 도덕성 위에 무너져가는 기업들을 회생하기 위해 저들끼리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뽑아간 것은 서민들의 세금이었다. 잘못은 저들이 했지만 고통은 서민들이 겪었다. 수많은 전시행정들과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서민들을 향해 있었던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백홍석이라는 이 시대 아버지의 초상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의 진심이 보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처절하게 짓밟힌 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드라마 그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진짜 서민들이 갖고 있는 정서에서 비롯된다. 사실 드라마적으로 보면 백홍석이 위기의 순간에 도주하는 장면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강동윤 앞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백홍석을 향해 경호원이 총을 쐈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했거나 그를 체포했어야 개연성이 있다 여겨지지만 사실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도주에 성공하는 백홍석을 시청자들이 마음 속에서 지지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적자>가 단순한 드라마 이상이라는 반증이다.

 

그래서 <추적자>의 슬픈 아버지 백홍석을 보며 눈물을 흘린 시청자들은 그가 적어도 드라마 속에서라도 진실이 통하는 세상을 만나기를 희구한다. 우리를 닮아버린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적어도 드라마라는 작은 공간에서나마 숨통을 틔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진 현실을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는 셈이 될 테니. 물론 섣부른 드라마의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바뀌지 않는 현실이 마치 바뀐 것인 양 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백홍석이라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이 최소한 한 번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니 말이다.

<추적자>, <부러진 화살>에 <도가니>를 더한 듯

 

마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합쳐놓은 듯한 공분이다. 수차례 자동차로 깔아뭉개져 살해당한 수정(이해인)의 범인 PK준(이용우)의 재판에서 수정은 오히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오명이 덧붙여졌고, PK준은 단지 사고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거짓 발언으로 양식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PK준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의 진술에 눈물까지 흘렸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정은 악플로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수정을 위해 뭐든 돕겠다던 학교는 아마도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은 듯, 수정의 탄원서를 거부했다. 수정의 엄마 송미연(김도연)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뒤편에 선 교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저 <도가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법정에서 진실이 유린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이 기막힌 장면은 저 <부러진 화살>을 떠올리게 했다.

 

인권은 사라지고 권력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힘없는 억울한 서민들을 바라보는 건 힘겨운 일이다. 자신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 사건을 덮으려는 인면수심의 강동윤 의원(김상중)이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숙자들 앞에 나서는 모습이나, 복직 투쟁을 위한 촛불 시위를 하는 자리에 나서 "권력이 생기면 단 한 줄의 법 조항만 바뀌면 모두 복직할 수 있다"며 기부쇼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에 속아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인 백홍석(손현주)마저 믿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 의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그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권력자들로 인해 두 번째 가해를 당하는 중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에 죽은 딸이 보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자신의 출마가 서민들을 위함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사실 권력욕에만 미쳐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서민들은 너무나 각박하고 힘겨운 현실에 그만 그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해왔습니다. 저 강동윤이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정치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딸의 일기장을 잔뜩 가져와 법관에게 읽어달라고 간청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죽은 딸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결연한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아버지가 무릎이 꿇고 도움을 청한 그 의원이 사실은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만든 신드롬은 한편으론 씁쓸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현실을 낱낱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거기에는 대선 때만 반짝 서민의 일꾼이 되는 정치인들이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눈앞의 진실을 호도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자화상도 들어 있다.

 

<추적자>는 결국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거대권력과 대결하는 드라마다. 사망신고서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라고 쓰며 애써 법을 믿었던 한 아버지가 진실이 유린되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고 스스로 주먹을 들게 되는 것. 아마도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외면한 탄원서를 아이들이 모아 법정에 보내지만 바로 기각되는 현실, 가해자가 본인도 괴로워하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법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지지해보지만 그가 사실은 이 힘겨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내가 우리 수정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아인지 이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내가 할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아버지 백홍석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추적자>. 그래서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는 곳은 드라마 속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다.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에 더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 보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이들 없이는 드라마가 재미없다

스포트라이트는 주연배우라는 얼굴에만 집중되지만 그 얼굴을 지탱해주는 건 드라마의 허리가 되는 조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한층 높아진 수준과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로 보려는 사회적 경향이 만나면서 조연들은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어딘지 분위기가 있는 손현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박철민, 만나보고 싶은 정감을 느끼게 하는 권해효 그리고 편안하면서도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김창완이 그들이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 출연하고 있는 손현주는 좀 독특한 연기의 결을 갖고 있는 연기자다. 40대 초반이란 무게는 주연의 발랄함보다는 조연의 묵직함이 더 어울리는 나이. 하지만 손현주에게 있어서 이런 나이는 편견에 불과한 것 같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서 순박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농촌 총각 양덕길이, 저 부하와 상사 사이에서 생고생을 하던 ‘히트’의 조규원 경정이었고, 한때 ‘여우야 뭐하니’에서 패션모델 고준희(김은주)와 사랑에 빠진 괴팍한 명품 브랜드 사장 박병각이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가 연기한 조연은 사실 조연에 머무르지 않고 극의 중심에 늘 놓여있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조연들과 차별화 된다.

한편 영화 ‘화려한 휴가’ 시사회장에 온 박철민은 독특한 인사말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쓸데없이 많이 찍어서 한없이 부풀어올랐다가 편집 과정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화려한 휴가’의 수석 조연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해 폭소가 터졌던 것. 하지만 이 소개는 단지 우스개만은 아닌 것 같다.

유난히 택시기사가 잘 어울리는(?) 그는, ‘화려한 휴가’에 이어 2부작 특집 드라마, ‘그라운드 제로’에서도 택시기사 유동선 역할을 하면서 웃음을 주면서도 가슴 찡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저 ‘불멸의 이순신’의 김완 역할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징한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박철민의 연기는 바로 그 선량함과 토속적인 맛이 어우러지면서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또한 늘 인상쓰면서 귀차니스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권해효는 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극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역할에 충실해왔다. 최근 종영한 ‘에어시티’에서는 본부장으로서의 경험은 풍부하지만 젊은 인재에게 어딘지 밀리는, 그러면서도 그걸 기분 좋게 인정하는 인물, 민병관 역을 해냈고, ‘여우야 뭐하니’에서는 대한민국에 건전한 성문화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세시봉 출판사 사장으로 코믹한 드라마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삶의 권태를 담은 인물들이 주로 차지한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는 날 백수에 가까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고시생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쓸데없이 요리에 목숨거는 보나빼띠의 총지배인으로 분했다. 그는 직장에 가면 꼭 있을 것만 같은, 그리고 같이 일하고 싶은 엉뚱하면서도 정이 가는 직장상사 같은 연기자다.

이밖에도 최근 주목할만한 조연 연기자는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귀차니스트 홍으로 열연하고 있는 김창완이다. 그의 연기는 능글능글할 정도로 능수능란 한 편안함에서 나온다. 연기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연기의 결은 때론 연기라기보다는 그게 본 얼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그런 생각을 멋지게 뒤집은 작품이 ‘하얀거탑’이다. ‘하얀거탑’에서의 우용길 부원장은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는 야누스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다.

주연보다도 때론 더 중요해진 조연배우들. 때론 감초처럼 맛을 주고, 때론 지나가는 말로 감동을 던지는 그네들이 있기에 드라마는 더 진실되고 재미있게 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짜 삶에서 만났던 중요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 같이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지만 없으면 안될 사람들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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