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 있으면 계곡도 있어.” 신연식 ‘1승’

1승

한때 촉망받던 배구선수였지만 현재는 망해가는 어린이 배구교실을 운영하는 김우진(송강호). 그는 해체 직전에 놓인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직을 맡게 된다.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는 김우진이 이 배구단의 감독이 된 건 새로운 재벌2세 구단주 강정원(박정민) 때문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스토리, 특히 ‘루저들의 성장서사’에 꽂힌 이 이상한 인물은 핑크스톰이 1승을 하면 상금 20억을 풀겠다는 파격 공약까지 내건다. 김우진은 적당히 감독 노릇을 하다가 그 이력으로 대학팀 감독으로 갈 꿈을 꾸고, 지는 게 익숙한 선수들도 패배의식에 빠져든다. 예상대로의 연전연패를 거듭하지만 그러면서 김우진은 의외로 점점 멋진 1승을 하고픈 욕망을 갖게된다. 

 

신연식 감독의 영화 ‘1승’은 배구를 소재로 다뤘지만 여러모로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 ‘록키’에 대한 오마주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뒷골목 복서였던 록키 발보아(실버스타 스탤론)가 갖게 된 세계 챔피언과의 대결 기회. 결국 록키는 패배하지만 멋진 경기로 관객들의 응원을 받는 다. ‘1승’은 ‘록키’의 서사를 거론하기도 하고 그 음악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핑크스톰이 펼치는 단 한 번의 짜릿한 명승부를 그려낸다.

 

“정상이 있으면 계곡도 있어. 정상 아래는 절벽이 아니라 계곡이야. 계곡을 걷다 보면 정상도 나온다.” 스포츠 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1승’ 역시 스포츠를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늘 정상만 있다고 여기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벽 끝이라 여기는 세태에 이 작품은 그 아래에 있는 계곡을 보라고 말한다. 그 계곡에서의 삶 또한 소중한 것이고, 거기서 저마다의 ‘1승’을 하다보면 정상에도 갈 수 있다는 것. 승리 아니면 실패라 말하곤 하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글:동아일보, 사진 : 영화 '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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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봉준호 ‘설국열차’

설국열차

꽁꽁 얼어붙은 지구.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거기는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나뉘는 계급체계가 존재한다.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빈민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머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아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이 계급화된 설국열차 안에서, 머리칸으로 가려는 꼬리칸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양극화되고 계급화된 세계를 은유하면서 그 대결이 과연 해법인가를 질문한다. 반란을 주도한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전투를 치르며 앞칸으로 나아가 드디어 머리칸의 절대권력자 윌포드(애드 해리스)를 마주하지만 그가 하는 말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폐쇄된 설국열차에서 균형은 필수이고, 그 균형을 위해서는 학살, 폭동 같은 것들도 ‘과감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 

 

꼬리칸의 해방을 외치며 앞칸으로 가는 문만을 향해 나아가는 커티스에게 남궁민수(송강호)는 말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쪽 바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그랬지만 균형을 말하며 불평등한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윌포드와, 그 시스템을 깨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커티스의 대결은 대선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등장하는 양자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양자택일만이 답일까. 남궁민수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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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햇볕. 허허 좋네예.” - 이창동 ‘밀양’

밀양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남편을 잃고 밀양에 정착하려 아들과 함께 내려온 신애(전도연)는 고장난 차를 고쳐준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을 묻는다. 하지만 종찬에게 밀양은 ‘경기가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이 가깝고, 인구는 많이 준’ 그런 동네다. 그에게 이름의 뜻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일 뿐. 신애가 그 뜻을 종찬에게 알려준다.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그러자 종찬은 그제야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름이 그런 뜻이였다는 걸 알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한다. “비밀의 햇볕. 좋네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앞으로 벌어질 신애의 비극과 그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종찬의 존재를 에둘러 설명한다. 아들이 유괴되어 시신으로 돌아오고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신애는 종교에 귀의해 평화를 얻었다 생각하지만, 막상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서는 절망에 빠진다. 유괴범 역시 종교에 귀의해 용서받았고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먼저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냐며 신애는 아파한다. 종교를 저주하고 피폐해져가는 신애를 구원해주는 건 과연 뭘까. ‘밀양’은 그것이 종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늘 옆에 있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 신애에게 종찬이 거울을 들어줄 때, 카메라가 틸다운되며 바람에 날려 바닥을 뒹구는 머리카락과 음지에 버려진 것들을 비추는 햇살을 담은 엔딩이 긴 여운으로 남는 이 작품은 묻는다. 당신의 밀양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또 당신은 누군가의 그런 존재가 되고 있는가.(글:동아일보, 사진:영화'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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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양우석 ‘변호인’

변호인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은 이 명대사로 잘 알려져 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청년을 구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송우석(송강호) 변호사의 일갈이다.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지만 그럼에도 내게 남은 이 영화의 명장면은 따로 있다. 그건 송우석 변호사가 고시 준비할 때 자주 갔던 국밥집 아지매 최순애(김영애)와의 일화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책까지 다 팔아넘기고 그 집을 찾은 송우석은, 밀린 외상값을 내려고 주머니 속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그만 도망치고 만다. 그 길로 다시 중고서점을 찾아 팔았던 책들을 되찾고 그렇게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찾은 국밥집. 송우석이 자신이 그 때 밥 먹고 도망친 놈이라며 외상값이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려 하자, 최순애는 만류하며 말한다. “자고로 묵은 빚은 돈 말고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라. 자주 오라꼬. 알긋나? 아이고 마 기분 째진다. 오늘도 공짜다.” 그 말에는 진심이 묻어난다. 빚지고 도망친 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자신이 차려준 밥 먹고 성공한 이를 기뻐한다. 감복한 송우석이 한번 안아봐도 되냐며 꼭 껴안자, 최순애는 마치 엄마처럼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이 국밥 한 그릇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건 값이 아니라, 거기 담긴 마음의 가치다. 호사스런 대접을 받고도 얹히는 마음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작은 국밥 하나의 신세도 잊지 않는 마음과, 그걸 그저 돈이 아닌 마음으로 환산하는 마음. 요즘 같은 시대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마음들이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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