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강박 버리자 <1박2일>이 얻은 것

 

서울 이 거대한 도시가 기적처럼 잠드는 1년 중 단 하루 설날. 빌딩과 인파 속에 숨겨졌던 낯선 서울의 얼굴을 찾는 단 하루의 마법 같은 시간여행.’ <12> 서울편은 이런 자막과 함께 지금껏 우리가 늘 봐왔던 차와 인파로 북적대는 서울이 아니라 텅 빈 낯선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익숙함에서 낯설음을 찾는 것. <12> 서울편으로 보여주려 한 것은 여행이 가진 이 마법적인 힘이었다.

 

'1박2일(사진출처:KBS)'

대학로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다방 학림다방, 장충동에 있는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 연지동에 있는 가장 오래된 사무실 대호빌딩, 중랑천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다리 살곶이 다리, 그리고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정동의 배재학당, 서울시립미술관, 중명전과 구러시아공사관. 이 오래된 공간들은 무심코 지나치며 살아왔던 우리들에겐 그다지 큰 의미를 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것은 시간과 흔적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 출연자들이 찍은 자신들의 사진과 그 똑같은 공간에서 찍은 부모님들의 사진이 오버랩 됐을 때 그들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1967년 초여름 김주혁의 부모님이 데이트를 하던 명동성당에 2014년 겨울 김주혁이 서 있다는 것. 1973년 봄 차태현의 부모님이 신혼여행 사진을 찍었던 남산 팔각정에 2014년 겨울 차태현이 서 있다는 것. 그리고 1978년 봄 김종민의 아버님이 사진을 찍은 창경궁에 2014년 겨울 김종민이 있다는 것.

 

공간이 사실은 그 시간의 추억들을 켜켜이 쌓아놓고 있다는 걸 <12> 출연자들은 물론이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들 또한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그들이 그날 하루 지나온 공간들이 주는 느낌 또한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 학림다방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음악을 들었을 것이며, 데이트 온 연인들이 태극당의 빵을 먹었을 것이며, 거의 100년이 된 대호빌딩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품었을 것인가. 5백년도 넘은 조선시대 지어진 그 살곶이 다리 위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걸어갔을 것이며, 정동의 그 역사적 현장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서려있을 것인가.

 

그날 하루 명동에서 시민들과 함께 환희를 연출한 김주혁과 데프콘이나, 남산의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버스킹을 했던 차태현과 정준영, 그리고 창경궁에서 때 아닌 쓸쓸한 보스 연기를 했떤 김준호와 김종민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이 곳을 다시 찾아 그 때의 기억과 추억을 되살릴 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의 기억들은 기둥 위에 새겨진 낙서처럼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갔던 그 길을 우리가 알던 그 분들도 똑같이 걸어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뛰게 만드는 일인가.

 

처음부터 특별한 장소는 없다. 추억이 그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뿐.’ 자막으로 드러낸 것처럼 이번 서울 시간 여행 편은 그래서 <12>의 새로운 출사표처럼 보인다. 새로운 공간과 여행지에 대한 강박을 벗어나는 일은 여행에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공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기억, 추억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 유호진 PD의 여행관이 투영된 <12>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

<무도>, 시간 없다더니 그것마저 도전소재

 

<무한도전>에게 도전 소재가 아닌 것은 없다? <무한도전> 빙고특집은 지난 8주년 특집으로 무한상사에 너무 심혈을 기울인 관계로 촬영 시간이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됐다. 당일 녹화해서 모레 방송으로 나간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자 김태호 PD가 가능하다고 했다며 유재석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 이번 빙고특집은 바로 이 시간에 쫓겨 즉석에서 아이템을 선정하고 그걸 도전으로 소화해내는 것 자체가 소재가 되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멤버들은 먼저 회의를 통해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아이디어를 마구 던지는 과정을 방송분량으로 만들어냈다. 정형돈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방송에 나갈 말만 해야겠다”고 말했고, <아빠어디가> 촬영현장을 무작정 찾아가자는 이야기부터 유재석 아들 지호와 박명수 딸 민서를 출연시켜 대결을 벌어자는 제안이 이어졌다. 특히 노홍철은 “폐쇄된 개성공단을 가보자”는 황당한 제안을 해 멤버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재석의 제안으로 결정된 빙고 게임 역시 즉석에서 게임 아이템을 결정하는 과정 모두가 방송분량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첫 게임으로 길거리에서 5분 안에 ‘지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찾기는 그 이름 선정에서부터 큰 웃음을 주었다. 갑순이, 말자, 순득이, 심지어 김깝십 같은 찾기 힘든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그래도 평범한 ‘지연’으로 선정된 것.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무한도전> 특유의 게임에 대해 시민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참여했다는 점이다. ‘지연 이름 찾기’에서는 한 남자가 자기가 지연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너스레를 떨기도 했고 ‘시민 말 넘기’ 게임에서는 정형돈이 아무 말도 없이 말 자세로 있는 모습에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하나 둘 모여들어 말을 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을 탄 인원이 짝수냐 홀수냐로 승자를 정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긴박감을 만들어주었지만, 결국 이 게임이 가능했던 건 시민들의 참여 덕분이었다.

 

‘개구기 스피드 퀴즈’나 ‘시민이 엉덩이로 이름 쓰고 그걸 맞추는’ 게임, 또 ‘시민이 찬 축구공 빨리 주워오기’, 또 순대를 1미터에 가깝게 끊어오는 게임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빛난 아이템들이었다. <무한도전>이 처한 위기상황(시간에 쫓기는)을 시민들의 도움으로 넘어서는 이 게임 아이템들은 그래서 꽤 의미심장한 풍경을 그려냈다. 대중들과 함께 해왔기에 지금의 <무한도전>이 있었다는 전언.

 

‘물을 머금고 간지럼 15초 견디기’ 게임이나 ‘핫도그 빨리 먹기’ 게임은 <무한도전> 특유의 몸 개그와 먹방의 묘미를 선사했고, 길이 이효리에게 전화를 걸어 “오빠 너무 섹시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지정어 듣기’ 게임은 이효리 특유의 ‘쿨한 응대’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했다. 이런 순발력 있는 아이템들을 쉽게 방송분량화 하는 능력은 역시 <무한도전> 8년의 관록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무한도전>이 이처럼 시간에 쫓겨 방송분량을 이틀만에 만들어내는 이번 특집은 어떤 면에서는 어려운 여건에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무한도전>의 고충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무려 8년 간 지속해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 한 복판에 나타나 무언가를 해도 거기에 참여해주고 호응해주는 시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무한도전>의 도전이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 게다.

 

빙고특집은 급조한 방송 자체를 아이템화함으로써 뭐든 ‘도전과제’로 승화해버리는 <무한도전> 특유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동시에 그것은 쉼 없이 달려온 <무한도전>의 어려운 처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또한 그러면서도 거기 함께 해준 대중들과의 호응으로 <무한도전>이 계속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이 정도면 급조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천 일', 얼마나 슬픈 얘길 하려는 걸까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스토리는 신파지만 이 대목은 들을 때마다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 나비부인의 한 대목을 들으며 서연(수애)은 지형(김래원)에게 말한다. "신파 싫어하잖아." 지형의 물음에 서연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이 사실은 신파였다고 한다. 이 짧은 대화는 이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를 말하는 듯하다. 신파? 신파면 어떤가. 그것이 우리네 인생의 비의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다면.

'천일의 약속'에는 자주 인물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인 설정들을 언급한다. 서연은 지형과 감히(?)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드라마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빈부 격차에 의한 부모들의 결혼 반대 같은 걸 찍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향기(정유미)와의 결혼날짜가 정해지자 지형이 그의 어머니인 수정(김해숙)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이미 양가가 정해놓은 결혼을 되돌릴 수 없느냐고 물을 때도 드라마 얘기가 나온다. 수정은 자신이 서연에게 직접 전화하는 그런 '막장'까지는 하게 하지 말라고 지형에게 당부한다.

'천일의 약속' 그 자체가 드라마지만 이렇게 드라마 얘기를 끌어옴으로써 하려는 얘기는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이라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하는 그 얘기가 때로는 우리 삶의 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 실제로 이 드라마의 설정은 지극히 상투적이다. 다른 빈부의 삶을 살아온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걸 반대하는 부모들. 게다가 치매라는 병까지. 만일 이것이 김수현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그 설정만으로 단박에 또 불륜에 불치냐 하는 비판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천일의 약속'은 그런 상투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상투성을 '기억'이라는 차원으로 다시 보게 함으로써 그 상투성을 극복하려는 드라마다. 서연이 치매를 앓게 된다는 설정은 그저 신파를 강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서연과 지형이 헤어지려 만난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시퀀스는 지극히 상투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우리 삶의 한 자락이 압축되어 있다 여겨지는 건 바로 이 기억의 문제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서로 만나러 달려가며 설레고, 늦게 왔다며 투정하고 싸우고, 그러다가 이 짧은 시간이 아까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다가 결국 끝이라는 걸 알고는 괴로워한다. 헤어지면 바로 그 기억을 싹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서연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오열하고 만다.

헤어지는 이들에게 기억이란 그처럼 천형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손에 잡을 수 없는 기억이란 오히려 지워버리고픈 고통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제 점점 기억을 잃어가게 될 서연은 과연 이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려 할까. 아니면 아무리 아파도 그 기억의 한 자락이 사실 가녀리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의 본질이었다며 끝끝내 부여잡으려 할까. 추억과 기억의 차이는 그리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는 작중인물의 얘기처럼 그녀는 이 아픈 기억조차 추억으로 간직하려 할까.

우리 삶을 기억의 한 조각으로 포착하려는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그만큼 아프고 슬픈 이야기다. 기억은 삶이고 기억을 잃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라지지만 누군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중요한 삶의 문제인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짧고 가녀린 삶에서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채(그녀는 동생을 엄마처럼 키웠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책을 쓰고 있다) 살아온 세월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 5년 후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뒤에는 어떨까. 우리 마음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너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나는 너를 언제쯤이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려놓을 수는 있을까." - 지형

"5년 후 쯤이면 아빠가 되어 있겠지. 10년 뒤에는 40대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그 때쯤이면 오늘이 누렇게 흐릿해진 사진이 되어 있겠지.... 겹겹이 날들이 쌓여가고 당신한테 나는 공룡시대의 화석이 되겠지." - 서연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 마지막 기억의 한 자락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미워할 것이다. 힘겨워할 것이고 아파하면서 행복해할 것이다. 우리네 기억 속에 남겨지는 그 모든 상투적인 것들이 사실은 우리네 삶이었다고 슬프게 긍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긍정은 우리를 어쩌면 영원하게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불멸을 피할 수 없는 삶이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니. '천일의 약속'은 그 지독히도 슬픈 기억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다.

'호우시절', 멜로를 넘어 삶을 관조하다

"그땐 참 좋았었지"하고 말하는 자의 눈빛은 쓸쓸하다. 시간은 그 좋았던 시절이 늘 좋은 시절이 되게 놔두질 않는다.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시간은 심지어 그 좋았던 시절의 기억마저 마모시킨다. 그러니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그 무차별로 흘러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허진호 감독의 다섯 번째 멜로, '호우시절'은 바로 이 시간을 응시하면서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좋았던 시절을 현재진행형으로 돌려놓는 영화다.

영화는 출장을 가게 된 박동하(정우성)가 이제 막 중국 청두에 내린 비행기 안에서 시차에 맞게 시계를 돌려놓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시간여행(?)에 대한 짧은 암시다. 그 여행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는 휴식 같은 여행이자, 두보의 시집을 들고 가는 사색의 여행이자, 그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과거의 좋은 기억 같은 설렘의 여행이면서, 그 위로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감정의 폭우 같은 여행이다.

박동하가 청두 땅에서 우연히 메이(고원원)를 만나 보내게 되는 3박4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산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밀도를 보여준다. 그 3박4일 속에는 박동하와 메이가 과거로 묻고 살아가는 미국 유학 때의 좋은 시절이 들어있고, 그 이후 어찌 어찌 하다가 시를 포기하고 직장생활에 안착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 박동하의 시간이 들어있으며, 중국으로 돌아와 불행을 겪고 여전히 그 불행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메이의 시간이 들어있다.

영화는 이 중첩된 시간들을 박동하의 시선으로 관조하면서 삶의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살짝 보여준다. 박동하와 메이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공간이 메이가 가이드로 일하는 두보초당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두보는 이처럼 이 영화의 공간이면서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시간이고, 또 그 공간과 시간 위에 흐르는 삶에 대한 관조이기도 하다.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 화두 같은 싯귀는 메이가 말장난처럼 동하에게 하는 질문, 즉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걸까."라는 말과 조우하면서,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의 감정을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연결시킨다. 허진호 감독의 멜로가 여타의 멜로와 다른 점은 그 속에 남녀 간의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랑을 그려 넣으면서도 그 위에 삶을 관조하는 시간을 부여한다는 점일 것이다.

'호우시절'은 그 멜로를 통한 삶의 관조라는 어찌 보면 균형 잡기 힘든 그 줄타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마치 출장길에서 잠시 일을 벗어나 여유로운 여행자의 마음을 만끽하는 자의 그것처럼 이 영화에 대한 허진호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어깨에 힘을 뺀 편안함이 묻어난다. 영화 내내 정우성과 고원원이라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들과 함께 편안하고 달콤한 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허진호 감독의 편안해진 영화의 걸음걸이 탓이다.

이 선남선녀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헤어짐 위에서 두보의 시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삶에 대한 어떤 울림을 전해준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서서 같은 언어를 소통하며 사랑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한때 과거의 것으로 치부해두고 마모시키고 있었던 바로 그 '좋은 때'라는 것. 즉 좋은 비가 때를 알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가 그 비를 좋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호우시절'은 바로 그 좋은 때로 우리를 인도해, 일상의 시간이 갉아버린 그 촉촉한 감성의 시간을 충분히 우리의 머리 위로 뿌려주는 영화다. 그러니 이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여행은 우리의 좋은 때를 떠올리게 하는 여행이자, 현재를 좋은 때로 바꿔주는 여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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