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과 정극의 균형을 잃은 '지붕킥'

"이거 시트콤 맞아?"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의 초반부에 이 질문에 담긴 뉘앙스는 칭찬 반 놀라움 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붕킥'에 이 질문은 질책 반 실망 반이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일까.

'지붕킥'은 여러모로 기존 시트콤과는 궤를 달리 했다. 시트콤 본연의 웃음 코드를 캐릭터들을 통해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정극의 분위기를 접목시켰던 것. 세경과 동생 신애의 상경기는 신파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 시트콤은 절묘하게도 신파가 갖는 감정 과잉을 또한 웃음의 코드와도 연결시켰다. 즉 동생 신애에게 학용품을 사주기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식의 설정은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이것은 희비극은 한 가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본 결과였다. 희비극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시트콤은 웃음과 눈물 양쪽이 모두 강화되었다. 웃다가 울리고, 울리다가 웃기는 시트콤을 보며 "이거 시트콤 맞아?"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매일 방영되어야 하는 살인적인 제작 환경 속에서 '지붕킥'은 그 본연의 힘이 조금씩 소진되어 갔다. 물론 멜로의 등장은 시트콤이라는 요리에 맛을 더하는 향신료 같은 요소지만, 그것보다는 매번 웃겨야 한다는 강박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용해 보였다. 초기 정음과 지훈(최다니엘), 지훈과 세경, 세경과 준혁(윤시윤), 심지어 준혁과 정음 같은 거의 모든 관계들을 엮어 멜로를 보여준 것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그 멜로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질척거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 세경과 신애의 신파가 시트콤과 잘 어우러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시트콤은 울리다가도 본연의 자세인 시트콤으로 회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웃음과 눈물의 균형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오면서 '지붕킥'은 웃음의 코드 보다는 멜로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매일 방영되는 시트콤에서 우리네 제작환경(거의 실시간 촬영에 가까운) 속에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뽑아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결국 쉬운 길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멜로가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게 된다.

웃음이 빠져버린 시트콤에서의 멜로는, 더 이상 향신료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저 설정된 관계의 반복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러니 그 멜로는 더 이상 거리두기 같은 쿨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세경은 변화 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 지훈만을 해바라기 하고 있고, 준혁 역시 그런 세경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갑자기 등장한 정음 집의 파산 설정은 이 반복적인 멜로에 어떤 변화를 주기 위함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관계의 질척거림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해리가 점점 아이다워지고, 정음이 된장녀의 습성을 버리며, 세경이 차츰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는 모습은 인물들의 성장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트콤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인 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인물의 부족함에서 그 웃음을 끄집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극에서 인물의 성장은 재미를 주지만, 시트콤에서 인물의 성장은 재미요소를 반감시킨다. 따라서 지금 황정음이나 해리는 초창기처럼 우리를 웃기지 못한다. 현재도 여전히 우리를 웃기는 인물은 정보석이나 이순재 같은 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처럼 정극적인 요소와 시트콤적인 요소를 엮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웃음도 감동도 모두 주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이르기 때문이다. '지붕킥'은 초반부에 이 쉽지 않은 선택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 시트콤은 차츰 지쳐가면서 결국 멜로에 지나치게 기대게 되었다.

펀(fun)했던 '지붕킥'이 뻔하게 된 것은 아마도 열악한 제작환경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작진들의 책임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나머지 남은 기간이라도 '지붕킥'의 초심, 즉 시트콤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대미를 장식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거 시트콤 맞아?"하고 칭찬 반 놀라움 반으로 묻던 그 질문을 다시 하게 되길 바란다.

시트콤, 왜 연예대상에서 상을 받아야 할까

시트콤은 과연 예능인가 드라마인가. 코미디라는 용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 MBC는 시트콤을 예능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연말 시상식에서는 껄끄러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2007년 무한도전 팀과 공동으로 연예대상을 수상한 이순재. 그는 '남의 잔치에서 상 받는 기분'이라며 어색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올 한 해 '무한도전'과 '세바퀴', '우리 결혼했어요', '황금어장', '놀러와'를 빼고는 그다지 선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밤'의 침몰과 '개그야'의 폐지의 여파가 컸기 때문일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과 '태희혜고지현이' 같은 시트콤이었다. 개그맨 김경진과 최다니엘이 남자신인상을 공동수상했고, 최우수상은 아예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보석과 '태희혜교지현이'의 박미선이 수상했다.

그런데 시트콤 출연자들의 수상은 어딘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물론 시트콤의 성격상 많은 웃음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의 수상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수상에 있어서 감회나 긴장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예대상의 수상은 웃음이나 재미를 많이 선사했다는 측면에서 예능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만, 연기로서 수상을 원하는 연기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처럼 오히려 껄끄러울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걸까. 애초에 시트콤이 예능으로 분류되게 된 데는 시트콤에 대한 평가절하가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시트콤은 드라마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어떤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이것은 시트콤이 발전하는데도 족쇄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유능한 시트콤 출신 작가들이 지금도 드라마쪽으로 전향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시트콤에 대한 낮은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다.

잘 만든 시트콤 한 편이 드라마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또 시트콤에서의 연기가 정극에서의 연기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이순재나 김자옥이 보여주는 로맨스 그레이나 정보석의 망가짐이 웃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명품연기가 사라질까. 왜 이들의 당당한 연기에 대해 제대로 시상해주고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할까.

시상식의 목적은 한 해 동안 얻은 결과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목적이 더 강하다. 시트콤에서 연기한 것을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 상을 주는 것은 마치 남의 밥상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보상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격려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시트콤에 대한 정체성의 재고이다. 시트콤은 그 장르적 특성과 인력구성으로 볼 때 드라마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것은 좋은 배우들과 능력 있는 작가들이 시트콤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선전을 기대하는 이유

웃음을 낮게 보는 시선은 아마도 오랜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우스워도 큰 소리로 웃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되던 그 문화 속에서, 웃음은 어딘지 비천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따라서 웃음을 주는 자 역시 광대로 하대되었다. 이것은 21세기 지금에 와서 상당부분 바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찬사는 이제 웃음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웃음을 조금은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트콤이다.

시트콤은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준말이다. 즉 상황별 에피소드를 담은 희극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코미디라는 표현이 주는 뉘앙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미디는 드라마의 영역일까, 예능의 영역일까. 과거 예능에는 코미디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콩트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예능에서 코미디라는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예능 프로그램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무대개그 정도로 분류되고 있고, 코미디를 지향하는 ‘희희낙락’ 같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것 역시 과거의 콩트 코미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코미디라는 단어는 드라마에 더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는 정극이라고 하는 드라마 속에서 쉽게 코미디를 발견하곤 한다. 로맨틱 코미디나 블랙 코미디가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시청자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과거처럼 신파적인 구도 속에서 질질 짜는 드라마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에서 어떤 경쾌한 웃음을 기대하게 되었다. 시트콤은 당연히 전형적인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시트콤이 드라마가 아니라 예능으로 분류되는 데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웃음에 대한 낮은 시선이 자리하는 게 사실이다.

과거에 잘 나가던 시트콤 작가였다가 현재는 정극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작가는 “시트콤을 하위장르로 보는 시선이 좋은 시트콤 작가들을 시트콤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트콤은 일일극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매주 2회씩 편성되는 미니시리즈보다 더 강행군을 하기 마련. 거의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면서 작업을 하기 일쑤다. 그렇다면 정극과 비교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시트콤이라는 작업이 용이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선의 작가들은 ‘눈물보다 만들기 어려운 것이 웃음’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해서 작업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도, 여전히 시트콤 작가를 낮게 취급하는 시선은 여전하다고 한다. 그러니 같은 고생을 하더라도 정극으로 시트콤 작가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좋은 작가를 확보하지 못한 시트콤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정극에 비해 그 상업적 가치나 작품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어떤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현 융복합되어 가고 있는 퓨전장르의 시대에 더욱 주목받아야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시점에 ‘지붕 뚫고 하이킥’이 보여주고 있는 가능성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극 드라마들도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10%대 중반 시청률을 이미 확보하는 대중성을 갖고 있는데다가, 작품으로만 봐도 다채로운 세대를 아우르는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웃음 그 이상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왠만한 트렌디한 드라마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물론 김병욱 PD 같은 믿음직한 시트콤 장인의 힘이 작용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시트콤이라는 장르 자체의 약진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선전을 바라게 하는 것은 모쪼록 이 시트콤의 성공이 시트콤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을 깨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트콤은 하위장르로 폄하될 존재가 아니다.

'지붕 뚫고 하이킥', 경계를 넘어서는 웃음의 가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칠순의 노인이면서도 김자옥과의 멜로를 선보이고 있다. 학생들에게 들킬까, 가족들에게 들킬까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그 비밀 데이트에서 이순재는 포복절도의 액션을 선보인다. 2층 학교 실험실에서 학생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이순재가 방독면을 쓴 채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식이다. 이 코믹 설정에는 두 가지 파격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설렘을 간직한 어르신들의 멜로와, 노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션의 파격이다.

이 파격은 지금까지 TV가 보여주었던 어르신들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깨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웃음의 대상은 어르신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트콤을 보는 온 가족이 이순재와 김자옥의 비밀 데이트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즉 그 안에는 이미 세대를 넘는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연애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 하고 시트콤은 묻고 있고, 바로 그 질문이 가진 상투성을 깨는 지점에는 그 파격이 가진 세대를 넘는 어떤 공감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상투적인 선입견의 벽을 깨는 방식은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선입견의 벽은 이 시트콤이 설정해 놓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캐릭터들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제 갓 상경해 서울의 풍경이 모두 낯선 9살 신애에서부터 10대의 고등학생 준혁, 20대의 지훈과 정음, 중년의 정보석과 이현경(오현경), 그리고 노년의 이순재와 김자옥까지, 이 시트콤은 캐릭터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그러니 이 다양한 세대를 포함하는 캐릭터들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시트콤이 보여주는 갈등들은 세대 간의 차이나, 살아왔던 배경의 차이, 성별의 차이, 직업의 차이, 국적의 차이 같은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성격과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지향점은 그러한 차이의 인정, 화해 같은 것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시트콤은 그 차이의 부딪침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화해의 계기를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순재와 딸인 현경 사이의 갈등은 세대 간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이미 어떤 화해를 전제하고 있다. 산골 소녀 신애가 서울로 상경해 겪는 이야기 속에는 도시와 시골이 갖는 문화적 갈등이 들어가 있지만 그것은 신애의 서울 적응기로 차츰 화해를 만들어간다. 정보석과 현경은 그 역전된 성별 역할로 달라진 부부관계를 모색하고, 줄리엔이 보여주는 따뜻함은 국적의 벽을 넘는 인간애를 보여준다.

게다가 이 시트콤은 장르가 갖는 상투적인 벽까지도 깨고 있다. 신애와 세경의 에피소드는 신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아버지와 헤어진 그들은 '아빠 없는 하늘 아래'에서 눈물 겨운 서울 살이를 하지만 이 시트콤은 이 비극을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본래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 시트콤은 잘 알고 있다. 고통이 고통이 될 때 비극이 되지만, 고통이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희극으로 바뀐다. 신애가 언니인 세경을 잃어버리고 울면서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장면은 고통스런 비극이지만, 그렇게 울면서도 식욕을 어쩌지 못하고 누군가 남겨놓은 컵라면을 먹고, 무료로 나눠주는 밥을 꾸역꾸역 먹는 장면은 그 고통을 무화시킬 정도로 충분히 희극적이다.

'지붕 뚫고'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 시트콤이 가진 유쾌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표현을 통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는 어떤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상투의 지붕을 뚫는 이 시트콤이 서 있는 자리다. 상투의 지붕을 뚫는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하이킥 같은 웃음은, 바로 이 현실의 상투가 만들어놓은 벽이 무너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상화된 상투의 틀을 깨는 데서 웃음을 유발하는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가진 고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지금 그 시트콤 고유의 미덕을 잘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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