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 왜 신세경을 추억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신세경의 이 말이 주문이 되었던 것일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그 주문 같은 말을 남긴 채, 비극적인 엔딩으로 사라졌던 전작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을 부활시켰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을 게다. 시트콤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그 엔딩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대중들은 신세경의 해피엔딩을 바랐다는 얘기다. 왜? 신세경이니까.

캐릭터와 연기자가 제대로 만났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의 신세경보다 더 돋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이 시트콤이 신세경이란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린 작품이라는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이 작품 속에서 신세경이 워낙 도드라진 존재였다는 데도 이유가 있다.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식모라는 역할, 하지만 그 역할과 어딘지 반전을 이루는 '청순 글래머'라는 기묘한 판타지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으로 되살아난 신세경을 보고 강승윤이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다며 다름 아닌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은 이 작품 속에서의 신세경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식모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경은 만약 이 시트콤에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다면 그 맨 바닥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계급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내뿜는 매력을 통해 이 계급적 관계를 무너뜨렸다. 이지훈(최다니엘)과 정준혁(윤시윤) 사이에서의 신세경의 멜로는 그래서 이 시트콤의 주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이었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보여주었던 신세경에게 닥친 비극적인 결말은 그래서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게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이 신세경의 새드 엔딩에 집착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시트콤 초반부에 이 새드 엔딩을 소재로 다뤄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백진희가 '바닥 뚫고 로우킥'의 결말을 고민하는 PD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준 것. 여기서 백진희가 말한 새드엔딩에 PD는 면박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말대로 시트콤 결말이 나간 걸 보게 된다. 이 소재는 김병욱 PD에게 '지붕 뚫고 하이킥'의 새드 엔딩 논란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신세경을 부활시켜 과거를 데자뷰하게 하면서 굳이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윤계상이 신세경을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세경은 마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멈췄으면 좋겠어..."하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교통사고가 나는 것처럼 편집된 장면을 내보낸 후, 다시 시트콤으로 되돌린다. "멀미가 멈췄으면 좋겠어."하고. 그녀는 결국 본인이 바라던 대로 아버지와 동생의 품으로 돌아가고 윤계상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낸다. 모든 건 바라던 대로 해피엔딩이 되었다. 하지만 이 뒤에 남는 찜찜함은 뭘까.

과연 김병욱 PD는 신세경을 부활시켜 새드 엔딩의 부채감을 털어내려 한 것일까. 어쩌면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신세경이라는 자신의 시트콤이 탄생시킨 배우의 존재감을 이번 작품에도 적절히 활용하고픈 욕구가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을 들끓게 했던 새드엔딩의 주인공이 다시 등장해 해피엔딩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 테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새드엔딩에서 해피엔딩으로 되돌려 보여주었지만 이 해피엔딩에 아무런 여운이 남지 않는다. 만일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이 지금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면 이토록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다음편인 이번 작품에 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혹시 극중의 비극이 신세경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기폭제가 됐던 건 아닐까. 김병욱 PD가 다시 부활시킨 신세경의 해피엔딩 뒤집기는 그래서 새드엔딩이 만들어낸 힘을 다시 실감하게 만든다. 신세경의 시간까지 멈추고 되돌리게 만들었으니까.


신세경은 어떻게 '하이킥'을 넘어 '뿌리'로 왔나

'뿌리 깊은 나무'(사진출처:SBS)

'지붕 뚫고 하이킥'은 두 명의 신예를 발굴했다. 황정음과 신세경이다. 황정음은 특유의 발랄함이 돋보였고, 신세경은 수많은 오빠들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청순가련의 마력이 있었다. 시트콤에서 두 인물이 주는 인상은 사뭇 달랐다. 황정음이 웃겼다면 신세경은 울렸다. 황정음이 말이 많았다면 신세경은 과묵했다. 거기에 논란을 일으킨 이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신세경이라는 배우를 그 이미지에 고착시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배우로서 신세경의 시간도 멈춰버렸다.

대중들의 과잉된 이미지를 갖게 된 신세경이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신세경이 짧은 광고를 통해 청순가련이 청순글래머로 포장되고 있을 때, 그녀는 황정음과 비교되었다. 황정음은 '자이언트'를 통해 시트콤이 아닌 정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이 들리니'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때도 신세경은 작품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다. 대중들에 의해 자신에게 얹어진 과잉된 이미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런 그녀가 돌아왔다. '뿌리 깊은 나무'의 소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의 '연착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말을 잃어버린 소이라는 캐릭터가 신세경에게 두 가지 효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신비감을 되살려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기자로서의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대중들에게 허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세경이라는 연기자를 위해 설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소이라는 특별한 캐릭터가 신세경이라는 배우와 제대로 만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소이는 '뿌리 깊은 나무'의 전반부에 그다지 중요한 인물처럼 보이지 않게 등장하지만, 사실은 이 사극의 중심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즉 세종 이도(한석규)의 한글 창제의 동인이 되는 인물이고, 그 말을 못한다는 상징적인 캐릭터는 그 자체로 (글을 모르는)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종 이도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강채윤(장혁)에게 유일하게 다른 삶을 꿈꾸게 하는 인물이다. 또한 모든 것을 기억해버리는 그녀의 능력은 마치 컴퓨터 같은 역할을 해내며 한글 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극의 대립구도인 밀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캐릭터다. 한 마디로 소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뿌리 깊은 나무'의 캐릭터 구조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소이라는 캐릭터에서는 그간 신세경이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면모들이 드러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는 세종에게 '전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를 외칠 때나 오랜 시간 그리워한 똘복을 만나는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는 좀 더 강인한 면모들이 드러난다. 임금과 물러나지 않고 대적하는 당참이 있고, 밀본 세력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면서도 방향과 발자국수를 세며 위치를 파악해내는 주도면밀함과 대담함이 엿보인다. 소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 보면 청순해 보이지만 결코 가련하지만은 않은 강한 인물이다.

이것은 소이가 말문을 열고, 강채윤과 함께 떠나라는 어명에도 불복하며 세종의 대의를 따르기로 소신을 밝히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극 여주인공들처럼 '오라버니'와의 소시민적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닫혀진 입을 열어주기 위해 한글을 창제하려는 임금의 대의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결코 강채윤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강채윤을 떠나면서도 그가 그녀를 따라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인 셈이다.

말 못하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오인되고 있다가 말문이 트이면서 숨겨진 능동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소이라는 이 절묘한 캐릭터는 그래서 신세경이라는 배우를 제 자리에 세워놓는 역할을 해준다. 청순하되 결코 가련하지 않은 이 당찬 배우는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멈춰진 시간' 속에 박제되었던 그 신세경이 아니다. 그녀는 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 봉인을 풀어냈고, 이제 우리 앞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한 명의 여배우로 서게 되었다. 한때 청순글래머라는 과잉된 이미지로 옴짝달싹할 수 없던 그녀. 그것을 깨버린 배우 신세경의 역습은 이제 시작되었다.


박하선, 황정음, 신세경처럼 발굴될 캐릭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에 박하선이 출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녀의 역할이 김병욱표 시트콤의 한 축인 멜로에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이 시트콤의 또 다른 재미인 멜로를 구축하고 있다. 만년 고시생 고영욱에 의해 억지춘향으로 그의 여자친구가 된 그녀는 그녀를 좋아하는 윤지석(서지석)과 삼각관계를 만들고 있다. 멜로에도 일종의 성장코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박하선의 멜로는 그 우유부단하고 착하기만 한 마음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사람들까지 다치게 하는 그 성격을 뛰어넘는 지점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박하선은 이 시트콤의 멜로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시작부터 사기꾼에게 당하고 끝없이 예의바른(?)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모습에서부터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줄리엔 강의 팬티를 입고 떡실신을 하고, 개에게 물려 광견병을 의심하며, 학생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미친 소'가 되더니, 수능귀신 앞에서는 군가를 부르고, 줄리엔강과 동거한다는 의심을 갖고 갑자기 들이닥친 교장선생과 박지선의 이목을 끌고자 롤리폴리 춤을 춘다. 지금껏 이 시트콤의 많은 캐릭터들이 웃음을 보여줬지만, 박하선만큼 다양하게 망가지며 웃음을 주는 인물도 없다.

박하선이 주는 웃음의 핵심은 그녀의 반듯한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 바른 이미지로 '동이'에서 인현왕후 역할로 대중들의 시선을 끈 박하선은 그러나 이 시트콤에서는 그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웃음을 주고 있다. 그 망가짐은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착한 성정 때문에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힘겨운 상황을 버텨내는 모습에서 그 배꼽 잡는 망가짐의 웃음이 생겨나는 것.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은 이 조금은 우울한 시트콤에서 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착한 성격 때문에 선의를 베푼 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은 각박한 현실을 에둘러 보여주기도 한다. 주인이 없어 배고파할 개를 위해 먹이를 주다가 물려 광견병에 걸릴까봐 신세한탄을 하는 식이다. 바로 이 점은 한없이 망가져도 추하지 않고 오히려 귀엽고 예쁜 박하선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공고하게 한다. 심적으로 그 선의의 마음을 동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멜로에서의 우유부단함은 민폐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랴 그것이 그녀의 한없이 여린 마음인 것을.

'하이킥3'는 바닥을 뚫는(?) 캐릭터들, 예를 들면 안내상이나 백진희의 조금은 궁상맞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궁상의 밑바탕으로서의 착한 마음을 제시하는 인물이 바로 박하선이다. 궁상을 단지 능력과 무능력으로 구분한다면 세상을 너무 경쟁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일 게다. 그들은 착한 것이지 무능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선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이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승자의 위치에서 그들의 궁상을 무능력으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박하선은 이 바닥 뚫는 시트콤에서 바로 그 낮은 자들의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망가짐이 웃음을 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그 때문이다. '지붕뚫고 하이킥'이 망가짐의 미학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두 인물을 발굴해낸 것처럼 어쩌면 '하이킥3'는 박하선을 발굴해낼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이 시트콤의 에이스였다.

'지붕킥'의 황정음과 신세경

술에 만취해 한 여인은 끊임없이 웃고, 한 여인은 끊임없이 울어댄다. 웃는 여인은 신세경이고 우는 여인은 황정음.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핵심적인 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술을 먹고 신세경은 웃고 황정음은 우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 시트콤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다시피 술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평상시에 억눌렸던 감정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 술을 통해서 웃고 있는 신세경과 울고 있는 황정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시트콤 속에서 우울한 상황에 놓여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상황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이순재네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는 처지. 그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한편 황정음은 신세경과 비교해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실제 속은 역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서운대 출신이라는 서러움과 돈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늘 얻어먹는다는 자괴감 속에서도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숨겨진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음이나 신세경은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 힘겨움의 강도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황정음의 슬픔과 신세경의 슬픔을 다루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시각이 다르다. 황정음은 슬픔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녀가 떡실신녀가 되고, 서운대라는 사실 때문에 버스의 서운대 광고에 들어간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상황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의 과장된 연출과 연결될 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삐에로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을 터뜨리게 하듯이.

반면 신세경은 슬픔을 슬픔 그대로 그려낸다. 이것은 시트콤의 시각이 아니라 정극의 시각이다. 물론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본질은 시트콤이기 때문에 신세경을 다루는 시각이 모두 정극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느 캐릭터들보다도 진지한 편이다. 따라서 신세경의 캐릭터는 시트콤과 정극을 오간다. 동생을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신세경이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여타의 시트콤들과 달리 웃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것은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지듯이, 시트콤의 시각과 정극의 시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그 자유자재의 연출력이 대중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시트콤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고, 감동은 거기에 어떤 의미까지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이 두 코드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뚫고 하이킥'만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을 주기도 하고, 그들이 울 때 웃음을 주기도 하는 그 반어법 같은 이 시트콤만의 쿨한 자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닐 때, 보는 이들은 그 웃음의 과장됨과 눈물의 질척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웃음과 감동의 강도도 세진다. 거꾸로 말해 웃기기 위해 웃기는 것과 울리기 위해 울리는 것은 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즉 이런 상반된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세련되게 웃음과 감동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과 신세경이 보석 같은 캐릭터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두 캐릭터는 실로 시청자들이 이 시트콤을 보며 웃고 울게 되는 그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잘 운용된 시트콤의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이미지까지 제고시킨다. 황정음과 신세경의 주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이 시트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기자들에게도 잘 만들어진 시트콤은 기회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정극도 해내지 못한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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