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패니메이션, J팝에 이젠 K콘텐츠와 협업까지 

이젠 <진격의 거인>인가. 영화로 개봉된 <진격의 거인 더 라스트 어택>이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23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 신드롬과 최근 불고 있는 J팝 열풍에 한일간 콘텐츠 협업도 늘고 있는 현재, J콘텐츠의 진격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진격의 거인

<진격의 거인> 단독 상영작 흥행기록 경신

작년 메가박스에서 단독 개봉한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애니메이션 <룩백>은 30만 관객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다. 57분짜리 중편인데다 다른 멀티플렉스에서는 방영하지 않고 오로지 메가박스에서만 방영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30만 관객 돌파는 이례적인 성공이라 봐야 한다. 그런데 재패니메이션 팬덤이 국내에 그만큼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성공을 그저 기적이나 우연처럼 보게 만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체인소맨>을 그린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그 내용 역시 만화가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하는가를 그렸다. 재패니메이션 혹은 일본 망가의 국내 팬들이라면 보는 것으로 일종의 ‘소장욕구’를 만족시키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이 흐름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는 작품이 바로 <진격의 거인 완결판 더 라스트 어택(이하 진격의 거인)>이다. 역시 메가박스 단독 개봉작인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이미 55만 관객을 돌파하며 작년 <룩백>이 썼던 단독 상영작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 작품은 2009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1년 간 연재됐던 만화가 원작이다. TV시리즈로도 제작되어 2013년에 25화가, 시즌2는 2017년 12화가, 시즌3는 2018년 10화가, 파이널 시즌은 2020년 파트1 16화가 2021년 파트2 12화가 방영됐고 완결편은 2023년 전후편(총 7화)으로 방영됐다. <진격의 거인>은 국내에서도 방영되어 일찍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진격의 ○○’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만큼 팬덤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다시금 화제가 된 데는 OTT의 영향도 적지 않다. 티빙, 넷플릭스, 웨이브에서 전편을 볼 수 있어 영화가 개봉한 후 ‘복습’하듯 다시 본다는 팬들도 적지 않고, 이러한 화제성에 팬으로 유입되는 이들도 많아졌다. 물론 전체 회차 수로만 90회가 훌쩍 넘은 대작이지만, 매 회 20분 정도의 분량인지라 숏폼에 익숙한 현 영상 소비 세태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 번 보면 끝없이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방대한 세계관 때문에 깊은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고, 그래서 더더욱 많은 떡밥들로 팬심을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재패니메이션에서 OST를 타고 넘어가는 J팝 열풍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는 OST의 인기로도 이어진다. 일찍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무려 49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 일본 록 밴드 10-FEET가 부른 ‘제ZERO감’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진격의 거인>의 인기는 링크드 호라이즌의 ‘홍련의 화살’, ‘심장을 바쳐라’ 그리고 히구치 아이의 ‘악마의 아이’ 같은 곡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이제 J팝 팬덤의 저변이 넓혀지는 일반적인 과정이 됐다.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가 국내에서 히트를 치면서 그 OST를 불러 화제가 됐던 요아소비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특한 음색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창력으로 ‘장송의 프리렌’, ‘주술회전’ 같은 일련의 애니메이션 OST를 부른 요아소비는 국내에도 두터한 팬층을 갖게 됐다. ‘은혼’의 OST ‘Some like it hot!’으로 유명한 스파이에어나, ‘스파이패밀리’,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OST로 큰 인기를 끈 오피셜히게단디즘, 또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그리고 ‘날씨의 아이’ 등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OST를 불러 국내 팬들의 주목을 받은 레드윔프스도 OST를 타고 J팝 열풍을 이끈 주역들이다. 물론 요네즈 켄시나 아이묭처럼 OST와 상관없이 유명한 J팝 아티스트들이 존재하지만, 재패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이런 유명 아티스트들을 OST에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그 시너지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국내의 J팝 열풍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건 최근 이들의 내한 공연이 급증한데다 그 열기도 뜨겁다는 사실에서다. 작년 말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공연한 요아소비의 티켓은 1분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요네즈 켄시, 아이묭, 유우리의 단독공연도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J팝 팬덤의 공고함을 보여줬다. 이들은 몇 년 전만 해도 국내 공연에서 몇 백 명을 모으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올림픽 체조경기장, 인스파이어 아레나, 킨텍스 등 대형 공연장에 관객들을 꽉꽉 채워넣을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콘텐츠 한일 교류도 뜨거워졌다

물론 K콘텐츠의 일본 열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따라서 J콘텐츠의 진격은 이제 한일 대중문화의 교류가 쌍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시계를 90년대 말로 되돌려 보면 이런 쌍방향 문화 교류는 ‘선언’적 의미만 있었을 뿐 그다지 가시적인 흐름은 잘 보이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단행한 일본 문화 개방 조치는 4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뤄져 2004년 전면 개방에 이르렀지만, 국내에서 J콘텐츠의 소비는 극히 미미했고 그것도 음성적인 흐름이 대부분이었다. ‘왜색 문화’가 들어온다며 우려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사실상 일본 문화 개방 조치는 K콘텐츠의 체질을 강화시켜주는데 일조했다. 즉 개방 이전에는 한국 방송사들의 일본 콘텐츠 베끼기가 일상이었다. 대중들에게 원천적으로 차단된 일본 콘텐츠였기에 공공연했던 베끼기는, 개방된 이후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이 이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개방으로 보다 경쟁력을 요구받게 된 K콘텐츠는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2003년 <겨울연가>가 일본을 강타했고 2010년대에는 소녀시대, 카라가 일본 내의 K팝 열풍을 이끌며 급성장한 K콘텐츠들의 일본 팬덤들이 생겨났다. 그 사이 우리에게도 J콘텐츠의 팬덤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주자는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변되는 재패니메이션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2021년 <너의 이름은>으로 국내에서 흥행을 거둔 신카이 마코토 열풍으로 이어졌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부터 <진격의 거인>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재패니메이션과 더불어 OST를 타고 J팝의 저변도 생겨났다. 여기에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는 <최애의 아이>, <은혼>, <장송의 프리랜>, <하이큐> 등등 다양한 재패니메이션 시리즈를 선보이며 보다 다양한 J콘텐츠를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해줬다. 정서적 차이 때문에 거리감이 있던 일본 드라마들도 다양성을 요구하는 OTT 구독자들에 의해 인기를 끌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나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같은 시리즈나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인 J콘텐츠들이다. 

 

K콘텐츠와 J콘텐츠의 양방향 성장과 교류가 이뤄지면서 양국 콘텐츠의 협업도 늘고 있다. 작년에 방영되어 양국에서 큰 인기를 끈 <아이 러브 유> 같은 시리즈나, 성시경과 <고독한 미식가> 고로상 마츠시게 유타카가 양국의 음식을 맛보는 콘셉트의 <미친 맛집>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최근 CJ ENM은 일본의 TBS와 함께 드라마, 영화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협업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K콘텐츠나 J콘텐츠의 진격이 일방향적인 것이 아닌 쌍방향으로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과거사 문제 같은 외교적 사안들이 정서적 거리감을 주긴 하지만, 적어도 콘텐츠의 영역에 있어서는 협업이 가능해진 한일 문화 교류의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글:시사저널, 사진: (주)애니플러스)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

장마철이 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이다. 흔히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빛의 마술사’라고 표현하지만, 필자에게는 ‘날씨의 마술사’로 더 각인되어 있다. 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날씨의 정경들을 보다보면 세상이 어떤 표정을 갖고 있다고 느껴진다. 때론 환한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만, 때론 한없이 처연한 눈물을 흘리고, 때론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바로 그 날씨의 정경들이 전해주곤 해서다. ‘언어의 정원’은 그 날씨들 중 특히 비의 다양한 표정들이 담긴 작품이다. 

 

비오는 날이면 오전 수업을 빼먹고 도심의 정원에 있는 정자에서 구두 스케치를 하는 고등학생 다카오. 그런데 어느 날 그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유키노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 어쩌다 말을 걸게 되고 비오는 날마다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언어의 정원’은 이 일련의 과정들 속에 두 사람의 감정변화를 내리는 비로 표현한 작품이다. 갑자기 맞닥뜨린 비에 쫄닥 젖어 유키노의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간 두 사람이 그 곳에서 옷을 말리고 함께 밥과 차를 마시는 고즈넉한 장면이 흘러갈 때 두 사람의 생각이 교차되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지만 창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그 풍경은 아주 짧게 스쳐가지만 그것이 마치 우리네 삶의 진짜 행복을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디든 나가기만 하면 험한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 장맛비 속을 뚫고 왔지만 쫄닥 젖은 우리들을 넉넉히 안아주는 그 온기가 있어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글:동아일보, 사진: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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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은 우리 대중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이 대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 담긴 정서를 한 마디로 담은 게 아닐까. 감독이 말했듯 문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다. 아침마다 그 곳으로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저녁에 돌아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재난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등굣길에 우연히 만난 사내 소타. 그는 폐허를 찾아다닌다. 스즈메는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이 알려줬던 폐허를 찾아갔다가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해주는데, 그것은 이승과 저승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이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문 앞에 놓인 고양이석상을 뽑아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문이 열리지 않게 몸으로 봉인해온 고양이신 다이진이었다. 문이 열리면 그 곳으로부터 미나미라는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오고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지진이 일어난다. 

 

문을 본 후 스즈메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미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거대한 미나미가 폐허에서 솟아나오는 걸 본 스즈메는 그 곳을 찾아가 애써 문을 닫으려 하는 소타를 발견한다. 소타는 미나미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단속을 하는 소임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도망친 다이진이 소타를 스즈메 엄마의 유품인 세발 다리 꼬마의자에 가둬버리고 도망치자, 스즈메는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다이진을 찾아 나선다.

 

말하는 고양이이자 신이 등장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는 문이나 저주를 받아 꼬마의자가 된 사람이 나오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판타지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지진이라는 재난상황은 일본에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아픈 현실적 상처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했다. 이 작품은 그래서 대지진이라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아름다운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지진이 남긴 상처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다. 

 

스즈메는 어린 시절 대지진으로 인해 엄마를 잃었고, 며칠을 엄마가 살아있다며 울며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타가 하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고 앞장선다. 문을 닫기 위해서 그 문이 있던 자리가 폐허가 되기 전 사람들이 나눴을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그래야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이 생겨난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난이 파괴해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그래서 이 순간에는 더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영화는 스즈메와 소타가 사라진 다이진을 찾아나서는 로드무비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여정 중 도처에서 열린 문으로 미나미가 튀어나오는 걸 두 사람이 막는 긴박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처럼 끔찍한 재난이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까지 보이는 두 사람의 여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해 마치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점이다. 그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스즈메를 챙겨주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온기를 전해준다. 

 

즉 이 이중적인 변주가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고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의미’ 같은 메시지를 강화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미나미가 보이지 않아 너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정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정조를 띤다. 그것은 곧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일상에 깃든 작은 빛들마저 축복처럼 느껴지게 구현해낸다. 심지어 도시나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이나 설렘, 두려움 같은 감정들까지 그가 그려낸 영상을 통해 전해질 정도다. 

 

반면 스즈메와 소타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 지진 때문에 엄마를 잃은 그 충격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소타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소타가 마침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되는 저주는 그래서 엄마가 만들어준 꼬마의자라는 점에서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세발 다리 꼬마의자는 뒤뚱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어 재밌는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 불안정함과 그럼에도 누군가 그 위에 앉으면 애써 버텨내는 소타의 모습을 통해, 재난이라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과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은유한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스즈메의 여정 속으로 들어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비극 같은 허망함 앞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결국 스즈메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폐허 위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다니는 어린 스즈메를 끝내 안아준다. 그리고 아이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 상황은 미래에서 온 스즈메가 과거의 어린 스즈메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어린 스즈메가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스즈메가 마주하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아마도 우리 식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에게 벌어졌던 그 많은 인재들을 대입해보면, 제대로 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한 미래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최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사 관련 문제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된 과거를 마주하지 않고 과연 미래의 문은 열릴까. 나라마다 다른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그걸 넘기 위해서는 저마다 과거에 벌어졌던 그 일들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비로소 과거의 문이 닫히고 미래의 문이 열릴 테니까. (사진:영화'스즈메의 문단속')

‘날씨의 아이’의 흥행실패, 과연 시국 때문 만일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전작이었던 <너의 이름은.>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7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거둔 감독이다. 국내에는 이미 그 작품 때문에 그의 전작들이었던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5센티미터> 등 또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 투자한 영화사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날씨의 아이>가 첫 주말에 약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에 적이 실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관계자는 공식 입장문까지 내놨다.

 

공식 입장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너의 이름은>에 비해 <날씨의 아이>의 성적이 저조한 이유가 지금의 냉각된 한일관계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물론 지금의 이런 시국이 이 작품의 성패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일 게다. 아무래도 일본 영화라는 사실이 주는 막연한 부담감(?)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주말에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 과연 실패라고 볼 수 있는지, 또 그 실패의 기준으로 <너의 이름은>의 흥행 성공을 내세우는 것이 온당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으로만 보면 <날씨의 아이>는 전형적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 스타일의 연출과 이야기 기법을 가져온 작품이다. ‘빛의 마술사’라는 지칭대로 빗방울 하나하나, 폭죽이 터지는 색감, 하늘의 풍경 등등이 만들어내는 감성들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색채로서 화려하게 표현해낸다. 그래서 그 색깔에 빠져들면 단지 눈만 건드리는 게 아니라 보는 이들의 감성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날씨의 아이>라는 날씨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품은 세계적인 기상이변 같은 지구적 위기의 문제를 특유의 판타지적 기법으로 들여다보고 머리만이 아닌 감성으로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야망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 기조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건 날씨가 사람들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그 사실이고, 그것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니면 색채로 표현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감정 과잉 부분이 몰입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잔잔하게 흐르던 감정을 어느 순간 폭발시키고 그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마치 구호를 외치듯 대사를 던지며 부감으로 거대한 도시나 자연으로 확장되는 그런 영상 연출과 음악이 이어지는 그 연출방식은 이미 <너의 이름은>에서도 충분히 반복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건 <너의 이름은>에서 큰 힘을 발휘한 연출이었지만, 이미 그것이 익숙한 관객들에게 비슷한 연출방식을 보이는 <날씨의 아이>가 그만한 효과를 발휘했을 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주관적 체험이고 그래서 그 반응은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의 흥행이란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날씨의 아이> 영화사측이 첫 주의 결과를 보고 내놓은 공식 입장문이 과연 공감할만한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공식 입장문에 담겨진 것처럼 영화사측은 ‘2019년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감독 중 한 명의 작품’으로 <날씨의 아이>를 꼽고 있고 그래서 이 정도 성적은 일찌감치 실패이며 그 이유는 한일관계 때문이라 내놓고 있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대단한 감독인 건 사실이지만, 모든 대중들이 영화사측처럼 생각하는 건 아닐 게다. 또 첫 주말에 33만 관객 수를 실패로만 보지 않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알겠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객관적 사실처럼 얘기하며 생각한 만큼 관객이 들지 않았다고 시국을 가져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과 행동이 아닐까. 반드시 관객 수가 그 작품 완성도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사진:영화'날씨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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