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가 묻힌다고? 그것이 <비정상회담>의 묘미다

 

요즘 대세로 불리는 조세호지만 <비정상회담>에 게스트로 출연한 그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터키 대표인 에네스 카야가 한국의 조직문화의 장단점에 대해 열정적으로 의견을 피력할 때 조세호는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회식자리 상황극에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나선 조세호가 보여준 반전 춤 실력도 가나 대표 샘 오취리가 나서 의외의 춤 실력을 보여주자 잊혀져 버렸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조세호가 주목된 시간은 엉뚱하게도 춤을 추다 장운동이 과도하게 됐다며 중간에 화장실을 갔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런 조세호에 대해 메인 MC들이나 외국인 대표들이 그걸 언급해주는 모습은 없었다. 만일 지상파의 토크쇼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자리를 비웠다 다시 온 조세호에 대한 토크가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비정상회담>에서 그런 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토크쇼의 주인공은 한국대표가 아니라 외국인대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인 MC들인 전현무, 유세윤, 성시경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얘기하는 걸 시청자들이 그리 바라지 않는다는 걸 셀프 디스 코드로 언급해 웃음을 주었다. 메인 MC가 이 정도니 게스트는 오죽할까. 한국대표로 출연한 게스트지만 조세호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건 처음 소개를 할 때뿐이었다. 이것은 조세호뿐만 아니라 이국주가 나왔을 때도 신해철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간에서는 <비정상회담>의 게스트 활용법이 잘못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성 토크쇼들의 틀로 <비정상회담>이라는 새로운 토크쇼를 재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비정상회담>에서 게스트는 그 날의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가끔 우리의 입장을 게스트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하지만 이런 역할은 메인 MC들도 똑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게스트가 상대적으로 잘 보일 수가 없다.

 

이것은 <비정상회담>의 게스트가 가진 한계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직까지 이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적응을 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기존 토크쇼들을 보면 게스트가 나와 자신의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때로는 개인기를 선보이는 것이 하나의 공식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지금의 시청자들이 바라는 것인가를 미지수다. 이미 시청자들은 연예인들의 홍보의 장이 되고 있는 지상파 토크쇼에 식상해하고 있다.

 

<비정상회담>이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해 4% 시청률에 육박하고 동시간대 지상파 토크쇼들과의 경쟁에 돌입하게 된 그 원동력이 사실 거기에 있다. <비정상회담>은 연예인 신변잡기는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회식문화를 외국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집중하고, 또 상하관계가 뚜렷한 조직문화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토론을 벌이는 장면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메인 MC들은 사실상 이들의 이야기에 효과적인 추임새를 넣거나 리액션을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비정상회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대표 게스트들은 어떤 자세로 이 토크쇼에 임해야할까. 일단 스스로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저 한국 대표로 거기 앉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외국인 출연자들이 얘기하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하며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전형적인 토론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비정상회담>의 다른 게스트 활용법은 여타의 지상파 토크쇼들이 참조할만한 일이다. 일단 연예인이 게스트로 섭외되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방송분량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치가 정해진다. 하지만 이런 기대치 정도로는 무언가 의외의 이야기를 바라는 지금의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시청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사보다는 좀 더 다양한 이야기와 의견을 원한다.

 

다양화된 사회는 온리 원(Only one)에서 원 오브 뎀(One of them)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것은 연예인처럼 과거 온리 원의 입장에 늘 있던 이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시선의 변화다. 하지만 많은 사람 중의 하나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소통방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비정상회담>은 그러한 달라진 소통방식을 통해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게스트가 묻힌다고? <비정상회담>은 오히려 그걸 즐기는 토크쇼다. 그리고 이것이 온리 원으로 출연하는 게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여타의 토크쇼들과 다른 점이다.

 

독설, 이독제독(以毒治毒)의 기능, 지나치면 독

예능 프로그램에 언제부턴가 등장해 거침없는 독설로 주목을 끌고 있는 이들이 있다. 예능계에 김구라, 박명수가 있다면, 가요계에는 신해철이 있고, 개그계에는 왕비호(윤형빈)가 있다. 하나같이 독설가라는 이미지로 읽히지만,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르다. 상대방의 말을 받아치는데 능한 김구라는 특유의 공격적이고 집요함이 특징이며, 박명수는 약간은 모자란 듯이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에게 호통을 치는데 능하다. 신해철은 특유의 직설어법으로 연예계에서부터 사회전반에 걸쳐 진지한 비판을 하는 반면, 왕비호는 독설을 개그의 틀로 끌어와 신비화된 스타들을 비틀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귀여운 독설가’이미지를 갖고 있다.

연예계에 독설가들이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작금의 달라진 방송 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대는 이제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할 수 없는 개방적인 대중사회로 변화해가고 있으며 이 상황 속에서 TV의 ‘맨 얼굴 숨기기 전략’은 거짓으로 치부되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폰카에 찍힌 연예인 굴욕사진들이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지고 화제가 되는 시대에, 아닌 척 하는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은 더 이상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대사들과 이벤트, 제스추어들은 ‘방송의 독’이 되었다.

박명수의 호통개그와 김구라의 막말개그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 ‘방송의 독’에 시청자들이 식상함을 느낄 때였다. 이전에는 재미없는 출연진들의 멘트에 억지로라도 웃음을 강요했었다면, 박명수는 그 재미없는 멘트에 대해 “야야야! 재미없잖아!”하고 호통을 쳤다. 김구라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숨기고 있는 연예인들의 이면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약점으로 지목된 부분들을 거침없이 들춰내 이야기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물론 과격해 보이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독으로서 독을 치유하는 이독제독(以毒治毒)의 기능도 한다.

김구라가 ‘명랑히어로’에 출연한 김성주 아나운서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부르고, 김국진을 ‘이별의 아이콘’으로 부를 때, 일부 시청자들은 그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이독제독의 기능이 수행된다. 김구라는 문제가 되었던 연예인들에게 갈 모든 비판을 자신이 대신 한 셈이 되며, 그걸 통해 거꾸로 비판을 동정과 이해의 시선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들이 ‘그 비판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지나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한 말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에는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설의 기능을 프로그램화 한 것이 ‘무릎팍 도사’다. 초기 문제 있는 연예인들이 기꺼이 곤혹스러워 보이는 질문공세를 받을 각오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는 바로 이 독설의 기능이 가져올 이점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집 같은 분위기에 살풀이를 한다는 컨셉트는 애초부터 ‘무릎팍 도사’가 이 기능들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걸 잘 말해준다. 면죄부라고 하면 지나치겠지만 적어도 ‘문제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를 상쇄시키고 그 문제를 시청자들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설은 지나치면 독을 제거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된다. 아프지만 솔직하고 직설적인 이야기와 비방은 다르며, 독설과 막말은 다르다. 이미 인터넷 환경을 통해 누구나 독설을 내뱉는 이른바 ‘독설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자칫 독설은 본래의 진정성의 틀에서 벗어나 주목도를 높이려는 형식전략의 하나로 변질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우려에 대한 자성 때문일까. 최근 들어 김구라나 박명수, 그리고 프로그램으로서의 ‘무릎팍 도사’는 특유의 독설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독설은 아직 유효하다. ‘공감 가는 악플러’는 늘 널리 퍼져있는 찬양가들과 함께 공존하면서 건전한 균형감각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속히 건전한 독설의 대가들이 귀환하기를 기대한다.

TV가 버린 가요, 라디오로 회귀하나

침체된 가요계에도 봄은 오는가. 최근 라디오를 통해 또 라이브 무대를 통해 그동안 실종되었던 우리네 가요들이 조금씩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봄날 눈 녹듯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한 변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가요계 전반의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이다.

눈감고 음미하게 만드는 관록의 중견가수들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은 90년대 가요의 호황을 이끌고는 한동안 긴 동면을 하고 있던 중견가수들. 이승환, 현진영, 이승철, 신해철, 신승훈, 김현철, 김동률, 김건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최근 십대 중심의 댄스음악시장으로 침체된 분위기에, 일제히 신보를 들고 나왔다.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압축해 말한다면 “역시 관록! 아직도 쟁쟁하다”는 것이다. 그 노래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눈을 감고 음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들이 동시에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숨어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과거 90년대 가요계의 호황을 만들었던 7080이라는 구매력을 갖춘 가요소비층이 존재한다는 것. 그동안 몇몇 기획사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가요시장이 다양성보다는 10대 중심의 획일성을 보여왔고 이로써 그간의 가요소비층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지점에서 중견가수들의 복귀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간 가창력과 음악성으로 승부해온 가수들의 든든한 뒷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섹시컨셉을 벗어나려는 가수들
‘10대 중심의 가요’라는 상품기획에는 반드시 댄스뮤직이라는 장르와 TV라는 매체의 결합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팔짱끼고 앉아 듣는 음악보다는 좀더 ‘참여하고 행동하는 음악’으로서 댄스뮤직은 10대의 전유물이 되었고, 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TV는 ‘보는 음악’에 폭발적인 엔진을 장착시켰다. 가수들은 점점 더 현란한 댄스와 파격적인 의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른바 섹시컨셉가수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 몇 번 눈길을 끌면서 눈을 즐겁게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귀는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들 섹시컨셉가수들은 발라드라는 장르를 선보이거나(이효리), 섹시컨셉을 벗으려 하거나(서인영), 가창력과 도전적인 여성상으로의 변신을 꾀하고(아이비) 있다.

비트보다 멜로디를 택한 힙합
그나마 힙합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줬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과제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마치 이전 가요계에서 정통 록이 처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 너무 파격적이면 대중성이 따르지 않고 적절한 타협(?)은 자칫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파격적이라는 것은 힙합이나 정통 록 자체가 갖는 특성(이를테면 저항정신 같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타협이라 함은 서구장르를 우리 것화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힙합의 인기는 대중성보다는 매니아적인 특성이 강하게 되었다. 몇몇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바비 킴이나 윤미래 같은 아티스트는 그저 힙합이라 부르기보다는 ‘바비 킴적인’, ‘윤미래적인’이란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들의 성공은 힙합의 성공이라기보다는, 힙합이란 장르 속에서 살아온 그들이 우리 가요문화와 절묘한 결합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 성공한 힙합(?)들의 특징 역시, 퍼포먼스적인 랩보다 멜로디성이 강조된 ‘듣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가요경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라디오, 비디오스타 죽일까
이러한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TV와 라디오 사이에서 가요가 점차 라디오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요순위 프로그램들의 TV로부터의 퇴출은 사실상 이 ‘보는 음악’이 자초한 결과가 크다. ‘TV 가요 프로그램 = 10대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면서 요란한 의상에 현란한 몸 동작이 난무하는 가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점점 떨어진 것. 게다가 자정에나 편성되는 라이브뮤직 프로그램들은 그저 명맥만 유지할 뿐, 과거의 영광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이제 TV와 가요가 동거하던 시대는 끝나고 있는 것 같다. 대신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것은 라디오다. 이것은 TV가 가요를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디오라는 특성이 지금의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현상과 잘 맞아떨어지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공개방송이란 장점을 가진 라디오는 기획과 상품화로 치달으면서 가요계가 처한 현실을 본 모습으로 돌리는 기능을 해준다. 여기에 컴퓨터와 라디오가 만나자 그 폭발력이 더해진다. 컴퓨터라는 일상도구에 자연스럽게 음악이 붙게된 것이다.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고 하지만, 이제는 라디오가 비디오스타를 죽이는(Radio killed the Video star) 시대가 아닐까. 역시 노래는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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