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체험까지 개고생으로 만드는 상술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이런 자막과 멘트가 흘러나왔을 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해봤을 것이다. ‘개고생’이라는 말이 주는 특유의 어감 때문이다(물론 이 단어는 표준어다. 하지만 어감은 여전히 비하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불쾌한 단어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욕이라도 들은 것 같은 감정을 갖게 한다. 티저광고로서 아무런 설명이 없기 때문에, 이 단어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맥락 속에 들어가면 엉뚱하게도 마치 모든 샐러리맨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순간 샐러리맨들은 개고생하러 집 나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바탕에 깔리는 ‘아내의 유혹’의 한 장면. 은재(장서희)의 치밀한 복수로 거리로 내몰린 정교빈(변우민)이 쓰레기통에 숨어 있다가 나와 거지꼴로 국밥집을 흘끔거리고, 노숙한 씻지도 못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 영상은 그래도 애교가 있다. 변우민의 막장 표정을 보는 순간에는 웃음도 터진다. 아마도 막장드라마라 지칭되는 이 드라마에 대한 모종의 희화화도 한몫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엄홍길 편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산악인으로서 산에 대한 도전을 하는 그 행위가 이 광고를 통해 개고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하나의 가치가 개고생이라는 한 단어로 전락하는 그 장면에는 극단적인 냉소주의가 숨겨져 있다. 일반인 편에는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몰린 피서지를 찾은 가족들과 무전여행을 하는 한 사내의 개밥그릇을 넘보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그 행위들을 역시 개고생으로 의미 지운다. 이 정도까지 오면 목적(자신들의 메시지만 전달하면 된다는)을 위해 가치 따위는 개고생으로 치부해도 된다는 막장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이 광고가 개고생으로 치부하는 행위들은 각각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현실(매개된 삶이 아닌 진짜 체험의 삶이란 의미로서의)과의 직접적인 대면이라는 점이다. TV나 기타의 매체를 통해 보면 편안한 것이고 괜스레 직접 하는 체험이나 경험은 개고생이다. 그러니 이 광고의 논리적인 메시지는 광고 마지막에 늘 등장하는 집 모양의 아이콘 위에 떠 있는 ‘ㅋㅋ’가 말해주는 것처럼 ‘집 밖에서의 개고생’보다는 ‘집 안에서의 ㅋㅋ’를 즐기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ㅋㅋ’란 이 광고의 실체인 KT의 새로운 유선통합브랜드인 쿡(QOOK)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광고가 불편한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이 광고의 메시지는 편안하게 집안에서 쿡(QOOK) 서비스를 즐기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실체는 쿡(QOOK)을 통한 매개된 삶(잔짜의 삶은 개고생이니까)의 가치가 더 높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가치의 전도다. 이 땅 위의 그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자본의 속성은 이제 체험이나 도전 같은 가치까지도 뒤집어 상품으로 포장한다. 이렇게 보면 개고생이란 단어의 즉각적인 불쾌감은 이 메시지가 주는 불쾌감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다. 물론 어쩌면 이 광고는 논란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논란의 끝에 남는 것은 논란의 이유보다는 논란의 강도만큼 높아진 브랜드 인지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당한 일이지만 어쩌면 이 글조차 이 광고의 한 부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 시간 그저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아내의 유혹’의 낚시질 영상에 걸려든 적이 있다. 그 장면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누군가의 눈빛은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챙겨보는 드라마가 아닌지라(이걸 왜 챙겨봐야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 상황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의 풍경이 전하는 ‘이거 뭔가 벌어졌구나’하는 느낌이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긴박한 효과음은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면서 그 벌어진 뭔가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 드는 생각은 ‘왜 내가 이걸 보고 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지나던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려 들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점이나, 그들이 왜 싸우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틈입으로 들어온 싸움이라는 풍경이 주는 날선 느낌이다. 그 풍경을 보면서 혹자는 일상 속에 침묵해왔던 내면의 억압을 대리해보기도 할 것이며, 혹자는 백주대낮에 웬 쌈질이라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내용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일단 사람들은 모였다.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는 것, 이른바 막장의 본색이다.

그 질이란 것을 살펴보면(그걸 살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연속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남편의 내연녀인 애리(김서형)가 남편과 함께 은재(장서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므로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은재가 살아 돌아와 민여사(정애리)의 딸 민소희로 살아가며 남편 교빈(변우민)과 애리에게 복수를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구도이기에 좀 어설프기는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볼만하다.

그런데 더 이상 구경시킬 싸움이 없었던 지 갑자기 죽은 줄로 알았던 민소희가 살아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재를 몰아붙인다. 한편 애리의 아들 니노(정윤석)의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서 은재의 오빠 강재(최준용)는 혼란에 빠진다... 끝없는 관계의 반복 혹은 돌출.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악역 애리가 은재의 친구이자, 강재의 애인이자, 은재남편 교빈의 내연녀란 사실은 이 드라마가 캐릭터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걸 빼먹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익숙한 코드의 반복이 주는 식상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이 드라마가 내세운 것은 속도다. 이른바 ‘빠른 전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의 나열은 느린 속도로 전개될 때는 그만큼 욕먹을 소지도 많다. 하지만 빠르게 진행시키면 말이 달라진다. 기대효과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과정의 빠른 진행은 충분히 자극적인 결과(대립 상황, 싸움풍경)로 보상받는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에만 집착하는 형국. 막장의 또 다른 본색이다.

그러나 속도에 편승하면서 뭉개져 보이지 않던 그 과정의 풍경은 속도에 익숙해지거나, 그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속도가 느려질 때가 되면 이제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드라마의 말미에 다다르자 ‘왜 내가 저걸 보고 있지’하는 그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 중독적인 속도에서 하차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비판적인 시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청률이란 양적 잣대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이 드라마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는 시청률은 드라마를 더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만든다.

질적인 것보다 양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에 이미 익숙하게 겪어왔던 것들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막장의 본색은 그 드라마를 파탄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 한 편의 파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질적 실패와 양적 성공, 과정의 실패와 결과의 성공이 주는 추상적인 성공 방정식은 어쩌면 전염병처럼 번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불황이라는 호명은 때로는 이 모든 것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 남성 부재의 공간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한명인(최명길)은 명진그룹의 회장이고, 그녀의 남편인 이정훈(박상원)은 부회장이며, 그녀의 아들인 이민수(정겨운)는 홍보실장이다. 가족이 기업 속에 그대로 포진하고 있는데, 그것을 기업의 권력구조 속에서 보면 남편이나 아들은 모두 한명인의 손아귀 속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드라마의 캐릭터 파워하고도 일치한다. 한명인이라는 캐릭터는 이정훈이나 이민수라는 캐릭터를 늘 압도한다.

한편 이정훈의 내연녀인 은혜정(전인화)과 이정훈, 그리고 그의 딸인 은수진(한예인)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도 이정훈은 늘 약자의 위치에 있다. 은혜정이 이정훈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쟁취하려 능동적인 선택(예를 들면 언론에 의도적으로 스캔들을 흘린다든지, 한명인에게 의도적으로 가까워진다든지, 혹은 자신의 집으로 그 두 사람을 동시에 초대한다든지 하는)을 한다면 이정훈은 늘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한숨을 쉴 뿐이다.

따라서 이 한명인-이정훈-은혜정이라는 불륜의 삼각관계가 주는 긴장감은 능동적인 캐릭터인 한명인과 은혜정의 대결구도에서 발생한다. 이정훈은 그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움츠린 존재이고(심지어 한명인과 은혜정이 왜 이 수동적인 남자를 사이에 두고 쟁투를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렇게 되자 이 여성 캐릭터들의 능동성은 본래 이 드라마의 영화 원작이 그리고 있는 여자 주인공들의 신파를 지워버린다. 영화에서는 여성이 자신을 희생(자식을 포기)하는 신파적 멜로에서 드라마의 힘이 발생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두 여성이 한 남성을 차지하려고 하는 욕망의 대결구도에서 드라마의 힘이 발생한다.

이것은 한명인과 그녀의 자식인 이민수, 그리고 그와 사사건건 부딪치게되는 최윤희(박예진)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민수와 최윤희는 애초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없었지만, 한명인이 최윤희를 며느리로 점찍는 순간부터 서로 얽히게 된다. 여기서도 이민수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명인과 최윤희는 마치 게임을 하듯 팽팽하게 부딪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수록 드라마는 더 흥미진진해진다. 이것은 한명인-이정훈-은혜정이라는 대결구도의 자식 버전이다.

즉 이 드라마는 한명인과 은혜정, 그리고 최윤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어디에도 이정훈과 이민수의 입장을 동등한 위치에서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정훈과 이민수는 이 여성들의 손바닥 위에 놓여진 공기 돌처럼 이리저리 그녀들이 만들어낸 상황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할 뿐이다. 이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의 2009년 판이 과거의 그것들과 확실히 선을 긋는 대목이자 그간 달라진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68년에 영화로 개봉된 이래 수 편이 제작되었고 또 2002년도에까지 리메이크되는 동안 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존재는, 2009년 판 ‘미워도 다시 한번’이 보여주는 세계만큼이나 변화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조의 여왕’이 그리는 아줌마의 세계 속에서 삭제된 남성들이나, 늘 전통적인 사극 속에서 남성의 대상으로서만 취급받던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들을 무릎 꿇리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여걸로 재탄생되는 것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심지어 ‘아내의 유혹’같은 완성도를 찾기 힘든 드라마 속에서도, 삭제된 남성(정교빈)과 여자들끼리의(은재와 애리의) 대결구도로 나타날 정도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모로 드라마의 주 소비층으로 자리한 중년여성들에 편향된 결과다. 어쩌면 이제는 과거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그려진 여성들로 인해 가부장적 사고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났던 것처럼, 거꾸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혹은 배경)이 되어 남성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길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징후는 벌써부터 아버지 캐릭터의 실종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중이다.

‘워낭소리’와 막장드라마, 그 불황기 영화와 드라마의 상반된 선택

이미 60만 관객을 넘어서 독립영화로서는 꿈의 1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워낭소리’.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사람을 닮아버린 소가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한편 수줍게 “좀 하는” 영화라며 지난 겨울 살며시 다가 온 ‘과속스캔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외관들 속에서 수수한 얼굴로 다가온 ‘과속스캔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리며 불황기 찬바람에 서늘해진 관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진정성을 선택한 영화, 막장을 선택한 드라마
어찌 보면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작은 영화들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타고 전해진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불황기 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보여진다. 극장 밖에서 세파에 흔들리며 버티던 관객들은 극장 속 몇 천 원의 도피처 속에서 위안과 성찰을 요구했다. ‘과속스캔들’은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는 소시민들에게 “아직 당신은 꽤 하는 사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워낭소리’는 먹고살기 급급한 현재, 오히려 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노동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해주는 감동의 시간을 선사했다. 실로 진정성의 성공이었다.

반면 같은 불황기 속, 안방극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2월9일자 일일 시청률표를 보면 그 1위가 SBS의 ‘아내의 유혹(34.3% AGB닐슨 자료)’, 2위가 KBS의 ‘꽃보다 남자(26.2%)’, 3위가 MBC의 ‘에덴의 동쪽(23.3%)’이다. 이것은 지난 한 주의 주간 시청률과 거의 같은 결과(주간시청률에는 SBS의 주말극장 ‘유리의 성’이 하나 떠 끼어있을 뿐이다). 이 시청률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방송3사의 대표주자가 바로 드라마라는 점이며, 그 드라마들은 막장이라 불려지거나, 각종 논란 속에 허우적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느리게 걷는 ‘워낭소리’와 속도에만 편승한 ‘아내의 유혹’
영화가 선택한 진정성, 드라마가 선택한 막장. 불황에 대한 이 상반된 선택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서로 다른 매체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두 매체의 과금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순수하게 관객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매체인 반면,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간접적인 잣대를 통해 광고로 수익을 얻는 매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영화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그것이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면 드라마는 작품성보다는 화제성에 더 치중하게 된다. 즉 완성도가 떨어져 욕을 먹으면 영화로서는 사형선고가 될 수 있지만, 드라마로서는 오히려 논란을 통한 시청률 상승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완성도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워낭소리’와 ‘아내의 유혹’의 상반된 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낭소리’의 속도는 말 그대로 소걸음에 가깝다. 그 느린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담히 쌓아놓은 것이 ‘워낭소리’의 미덕이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작품의 개연성이나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마저 휘발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자극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속도감은 지속적인 자극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성도의 구멍을 메워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영화처럼 불황기 속에서 어떤 진정성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4부작이었지만 호평을 받았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 쏟아진 찬사는 여전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도 어쩐 진실된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상관없는 시청률의 양적 판단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드라마 시스템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욕하면서 보는 이 병적인 시청으로 휘둘려야 할까. ‘워낭소리’처럼 그 따뜻한 울림이 대중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드라마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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