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우려 불식시킨 <보이스 키즈>의 무대

 

사실 아이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선입견을 만든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갖기 마련인 서바이벌이라는 그 극단의 상황을 아이들까지 겪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보이스 코리아>의 아이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보이스 키즈>가 시작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기대보다 우려가 앞섰던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일 게다.

 

'보이스키즈'(사진출처:Mnet)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보이스 키즈>는 그런 우려를 기대로 바꿔 놓았다. 그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귀와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아이들은 해맑았고 진정으로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리틀 로이킴 이우진은 음정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 특유의 미성으로 서인영의 의자를 돌리게 만들었고,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김초은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울랄라 세션의 ‘아름다운 밤’을 불러 코치 전부를 올턴시켰다.

 

<슈퍼스타K4>에 출전했던 정은우는 브라운아이드소울의 ‘브라운시티’를 매력적인 목소리로 안정감 있게 불러 코치들을 매료시켰고, 특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윤시영은 꿈을 노래하는 ‘투마로우’를 불러 그 압도적인 성량과 가창력으로 코치들과 관객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자칫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지만 아이들만의 순수함과 꿈에 대한 도전이 훈훈함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이렇게 된 데는 <보이스 키즈>만이 가진 특별한 이유들이 있었다. 먼저 많은 우려들을 미리 염두에 두고 그런 요소들을 사전에 제거해냈다는 점이다. ‘가족 엔터테인먼트쇼’를 주창한 것은 그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그 가족이 같이 나와서 함께 응원해주는 모습은 자칫 차가워질 수 있는 오디션이라는 경쟁 무대를 따뜻한 가족들의 잔치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보다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보이스 키즈>만이 가진 특별한 오디션 형식에서 비롯된다. <보이스 코리아>처럼 심사위원이 아니라 코치를 세우고, 그 코치들이 심사가 아니라 거꾸로 참가자에게 간택(?)받기 위해 심지어 애교까지 보여야 하는 이 역전된 형식은 <보이스 키즈>를 온전히 아이들 중심의 오디션이 되게 해주었다.

 

또한 그간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성인들과 함께 아이들을 함께 세웠었던 전적은 <보이스 키즈>라는 아이들만의 오디션에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위대한 탄생2>에 나왔다가 떨어졌던 이서연이나 <슈퍼스타K4>에 나왔던 정은우, 또 <슈퍼스타K3>에 나와 호평 받았지만 중도에 탈락했던 손예림의 같은 학교 선배인 천재인은 모두 <보이스 키즈>라는 무대가 있어 좀 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오디션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보이스 키즈>는 향후 배틀 라운드에서도 양자 대결이 아니라 삼자 대결을 선택한다고 한다. 지나친 경쟁구도를 굳이 연출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그렇다면 <보이스 키즈>는 오디션이라면 핵심적일 수 있는 서바이벌의 자극을 빼고 무엇으로 대중들을 사로잡겠다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하게도 노래 그 자체가 주는 감동이다. 이로써 자칫 지나친 경쟁으로 볼썽사나운 무대가 될 수도 있었던 <보이스 키즈>는 가족과 음악과 감동을 선택함으로써 아이라도 괜찮은 오디션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너무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의해 경쟁에 지쳐버린 많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노래를 듣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메이퀸>, 아역 분량 왜 이렇게 길까

 

“아동학대로 확 신고해버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그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아이 해주(김유정)를 끝내 내쫒는 계모. 다음날 벼랑 위에 쓰러진 해주를 업고 온 산(박지빈)이와 창희(박건태)에게 “뭐 하러 그 애를 데리고 왔냐”고 계모가 화를 내자, 산은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것은 <메이퀸>이란 드라마를 스스로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아무리 불행했던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라지만 어른이 아이를 이토록 학대하는 모습은 너무 과하다는 인상이 짙다.

 

'메이퀸'(사진출처:MBC)

어린 해주의 삶은 어린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기 때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 버려지고 계모의 구박덩이로 자라난 해주의 모습은 어른과 아이의 역할이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계모는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해주에게 모든 집안일을 맡기고, 식구를 챙기게 한다. 병을 모아 판 돈으로 어렵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계모는 거꾸로 반찬투정이다. 게다가 어린 아이를 같은 방에 잘 수 없다며 차디찬 마룻바닥에 재운다.

 

물론 이것은 과거 신파극의 전매특허와 같은 소재들이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살아낸 해주라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다루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가려는 방향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부분을 이토록 자극적인 장면으로 수회에 걸쳐 보여주는 건 신파적인 극성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물론 신파극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지만, 그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가하는(심지어 스스로도 학대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TV라는 매체에 과연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특히 폭력배 앞에 아이가 내몰리는 장면은 가뜩이나 아동 폭행 사건들로 흉흉한 요즘, 너무 버젓이 방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려 한 목적이라고 해도 아이들끼리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침몰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이런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면서 이 어린 해주는 어린이 같은 느낌이 없어졌다. 심지어 해주가 계모의 아기까지 받아내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니.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학대받는 아이는 해주만이 아니다. 장도현(이덕화)의 집에서 하인처럼 기거하는 박기출(김규철)의 아들 창희(박건태) 역시 학대받는 아이의 모습이다. 장도현의 아들 일문(서영주)은 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나쁜 어른의 모습 그대로다) 창희와 그 아버지 기출을 괴롭힌다. 물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일문 역시 장도현이라는 어른에게 학대받는 아이처럼 보인다. 왜 이토록 이 드라마는 어른들에 의해 고통 받는 아이들을 이렇게 긴 분량(아역분량이 유독 길다)으로 다루고 있는 걸까.

 

물론 드라마로서 성장을 위한 고난을 극대화하려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고 반복적인 것은 의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자칫 아이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자극적으로 다루다보면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칠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역을 이토록 길게 다루는 이유는 물론 김유정이나 박지빈, 박건태 같은 어른 못잖은 명품 아역연기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역을 세웠을 때 그 자극의 강도가 더 크다는 계산도 있다고 여겨진다. 무한 시청률 경쟁 속에 자극을 위해 전면에 세워지고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참담해진다. 이건 현실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티아라 사태와 왕따를 부추기는 사회

 

한 아이돌 걸 그룹의 문제로 일단락 될 수 있었던 티아라 사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놓여진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무한 경쟁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경쟁하게 내버려두는 것을 기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무한 경쟁’에 접어들었다. 경쟁사회는 일련의 암묵적인 순위를 대중들의 몸에 각인시켜 놓음으로써 자체적으로 통제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티아라'(사진출처:코어콘텐츠미디어)

경쟁사회에서는 승리자가 아니면 패배자(우리가 흔히 루저라 부르며 민감해 하는)가 된다. 여기서 승리자가 사회의 다수를 지향한다면 패배자는 소수가 되어버린다. 이 다수와 소수를 나누는 사고방식은 왕따가 생겨나는 핵심적인 구조다. 다수에 적응하지 못하면 소수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이는 왕따가 되기 쉽다. 왕따라는 존재는 그래서 자신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인간이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그런 행동조차 하게 되는 것은 그 왕따와 동류가 되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결국 왕따 문제의 발원지는 경쟁사회라는 통제 시스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티아라 같은 아이돌 그룹들(이건 비단 아이돌 그룹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이 처한 상황이 이 시스템과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팀을 이루고, 그 팀은 언제든지 멤버를 교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퇴출된다는 공포는 많은 관계의 문제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소한 의견 충돌 같이 소소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왕따 같이 심각한 양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실 실체가 드러나지도 않은 왕따설로 문제가 일파만파 커져버렸지만 티아라 사태의 핵심적인 문제는 왕따설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그 핵심은 이 기획사의 매니지먼트의 문제다. 이런 소문이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다툼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기획사는 과연 거기에 합당한 매니지먼트를 했던 것일까. 살인적인 스케줄과 적응하지 못하면 퇴출시키는 그런 시스템 속에서 화영이나 다른 티아라 멤버는 모두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어린 아이들이 그 힘겨운 스케줄 속에서 부상당한 화영에게 그래도 무대에 오르자며 ‘의지’ 운운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들은 왜 소속사에 좀 더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지 못했던 걸까.

 

물론 스스로도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강자로 존재하는 소속사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시스템을 만들고 제시하는 자가 늘 강자인 법이다. 그래서 게임은 늘 룰을 만드는 이가 이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착각은 있다. 제 아무리 소모품처럼 멤버를 갈아치우며 그 통제를 통해 성장 가속도를 유지하려 한다고 해도 이들은 결국 사람이고, 그들이 하는 일은 그래도 음악이라는 창의적인 작업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소속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팀을 만들어 내보내면 대중들은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거꾸로 대중들이 주도권을 쥔 시대다. 대중음악이라는 행복 산업에서 행복하지 않은 그네들이 제대로 행복을 전파할 수 있을까. 또 대중들은 그 가짜 행복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 것인가.

 

티아라 사태는 본래 사건보다 일파만파 커진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무한 경쟁 시스템의 뒤안길에 놓여진 그림자를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기획사의 멤버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듯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경쟁만이 아니라 즐거워서 일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관리 시스템이 요구된다.

 

학교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왕따 사건들이나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들을 그저 아이들의 문제(누군가는 가해자고 누군가는 피해자인)처럼 치부한다면 실제 이 가혹할 정도로 비정한 경쟁 시스템이라는 진짜 가해자는 가려지고 말 것이다. 티아라 사태가 왕따 문제로 또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이런 핵심적인 문제들이 분노의 형태로 그 사태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그저 티아라의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제 표면화된 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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