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무엇이 대선배들을 극찬하게 하는가

 

서태지는 정규 9집 앨범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발매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아이유 덕분에 잘됐다는 표현을 썼다. 그는 자신을 보컬리스트라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면서 프로듀서라 생각한다며 내 노래를 남이 부르면 어떨까를 항상 생각하고 아이유를 떠올렸다고 했다. “10대들에게 영향 미친 건 아이유 덕을 많이 봤다. 아이유를 업고가고 싶다. 나는 아이유 초기 음악을 많이 들었다. ‘’, ‘마시멜로는 댄스가 아니라, 락킹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유의 보이스 컬러는 보물이다. 여자싱어에서 기적이다. 나보다 아내가 더 팬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이유(사진출처:서태지 컴퍼니)'

아이유는 김창완의 너의 의미를 되살려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즉 본래 김창완의 곡인 너의 의미를 아이유가 리메이크해서 불렀는데 거기에 김창완이 자청해 피처링을 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그만큼 아이유가 재해석해놓은 너의 의미가 김창완에게도 특별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너의 의미를 부르기도 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냐는 물음에 김창완은 아이유를 나의 청춘이라고, 또 아이유는 김창완을 나의 미래라고 답했다고 했다.

 

이제 가요계는 아이유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면 성공한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이미 정규3모던 타임즈에서 최백호, 양희은 등과 작업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신구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감성의 가능성을 우리는 이미 느낀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유의 목소리는 서태지의 표현대로 보물이다. 통기타 하나 들고 목소리로만 승부해도 충분할 만큼 깊고도 잔잔한 아날로그적 정서가 그녀에게서는 묻어난다. 물론 그녀의 스펙트럼은 그 아날로그에서 디지털까지 훨씬 폭이 넓지만.

 

김창완의 너의 의미를 비롯해, ‘꽃갈피앨범에 수록된 리메이크곡 거의 대부분이 부활된 것은 마치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공존시키는 그녀의 마법 같은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나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또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은 그렇게 흘러간 노래에서 소환되어 우리 앞에 다시 그 명곡의 얼굴을 드러냈다.

 

아이유는 초창기 시절부터 지켜주고픈 아저씨 팬들을 양산했던 가수였다.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단단한 가창력은 아저씨 팬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어떤 이미지적인 효과 덕분이었다면 지금은 가수라는 본분으로서 아저씨들의 감성을 파고들고 있다. 그녀를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그 목소리만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 것.

 

무엇이 이 어린 소녀에게 이토록 원숙하면서도 단단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 걸까. 영락없는 소녀의 톡톡 튀고 밝은 모습 이면에서 느껴지는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은 아마도 그녀가 살아낸 현실의 무게감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그래서일까. 김창완이 너의 의미의 말미에 도대체 넌 나한테 누구니?”라고 피처링한 것처럼, 그녀의 노래를 들은 이들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넌 도대체 누구니?

 

아이유로 선 공개된 서태지 소격동’, 그 반응은?

 

서태지의 소격동프로젝트가 아이유의 목소리로 선 공개됐다. 노래가 아니라 다른 것들로 계속 이슈가 됐던 서태지인지라, 음악에 대한 관심은 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 ‘어디 노래는 얼마나 괜찮은지 들어보자는 조금은 뒤틀린 심사에, 그래도 서태지니 기대된다는 기대감이 얹어져 반응도 양 갈래로 나뉜다.

 

'소격동 프로젝트(사진출처:서태지 컴퍼니)'

그렇다면 아이유가 부른 소격동은 어떨까. 먼저 늘 새로운 장르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줘 왔던 서태지라는 존재감만큼의 특별한 새로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조용히 읊조리듯 부르는 발라드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팝에서는 이미 여러 가수들에 의해 시도됐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장르적인 것을 떠나서 음악 자체로만 들어보면 소격동이라는 노래가 담고 있는 독특한 정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기에는 서태지가 예전에 불렀던 발라드들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향수와 추억이 만져진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묻혀진다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트렌디하고 세련된 날카로움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아이유가 먼저 소격동프로젝트의 문을 연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7,80년대의 음악을 불러도 전혀 이물감이 없을 정도로 아날로그 감성을 자기 식으로 잘 풀어내는 아이유가 아닌가. 아이유가 부르는 소격동은 그래서 마치 이미 예전에 서태지가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는 듯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아이유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는 심지어 일렉트로닉이 가진 차가움마저 부드럽고 따스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부조화는 그래서 소격동이라는 곡이 가진 이중적인 특징을 균형 있게 잡아준다. 그 이중적인 특징이란 가벼운 발라드 감성처럼 느껴지면서도 소격동이라는 공간이 주는 시대적 정조가 주는 무거운 비감이 뒤섞여 있는 데서 나온다.

 

벌써부터 인터넷에는 이 곡의 가사를 거꾸로 들어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즉 앞에서부터 들으면 마치 연인이 옛 추억을 되밟는 듯한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지지만, 뒤에서부터 가사를 되짚어보면 과거 소격동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에 대한 시대적 정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음악적 감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향수와 추억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재에 되돌아보는 과거란 심지어 시대적 아픔마저도 하나의 그리움처럼 아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치 영화 <써니>에서 시위대가 광장에서 전경들과 부딪치는 80년대의 최루탄 뽀얀 풍경 위에 조이(Joy)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가 흐를 수 있는 것처럼.

 

소격동이라는 결과물을 두고 보면 그것이 과거 서태지가 해왔던 파격적인 혁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듣기 좋으면서도 정서를 건드리는 꽤 괜찮은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잘못된 홍보 마케팅으로 신곡에 대한 괜한 호들갑이 만들어낸 논란 같은 것이 없었다면, 노래의 발표만으로도 충분히 역시 서태지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곡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괜한 예능 단독 출연 사실로 만들어진 서태지에 대한 논란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게다가 아직 서태지가 부르는 소격동은 발표되지도 않았다. 과연 반전은 일어날 수 있을까. 영화 <명량>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말처럼, 서태지는 과연 시끄러운 논란마저 긍정적인 화제로 바꿔낼 수 있을까. 시선은 이제 서태지가 부르는 소격동에 집중되고 있다.

 

여자 연예인에게 섹시 콘셉트는 양 날의 칼

 

또 섹시 콘셉트인가. JYP측은 걸 그룹 미스에이의 정규 2집 ‘허쉬(Hush)’를 소개하면서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콘셉트 중에 가장 파격적이다. '섹시 수지'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고 한다. 왜 미스에이라는 걸 그룹의 신보를 소개하면서 굳이 ‘섹시 수지’를 전면에 내세웠을까. 당연하게도 미스에이의 신보에서 수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가장 크기 때문일 게다.

 

사진출처:건축학개론

영화 한 편으로 순식간에 국민첫사랑의 이미지를 꿰찬 수지가 아닌가. 이 첫사랑의 이미지와 섹시 이미지는 사뭇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니 JYP측은 오히려 이 부분을 강조해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에서 ‘섹시 수지’를 강조했을 게다. 사실 미스에이의 섹시 콘셉트는 이미 ‘터치’의 붕대 의상에서부터 선보여졌고 심지어 선정성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미스에이의 섹시 콘셉트가 새로운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수지가 가진 국민첫사랑의 이미지를 오히려 섹시 코드로 반전시킴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기대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결국 섹시 코드를 내세워 국민첫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소비시키는 셈이다.

 

하지만 여가수의 섹시 콘셉트는 확실한 음악적 성취가 따라주지 않을 때 득보다는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확실히 ‘섹시 수지’라는 이미지는 대중들의 이목을 주목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수지의 청순 이미지는 상당 부분 희석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첫사랑의 아이콘으로까지 불리던 청순 이미지가 수지가 가진 가장 큰 에너지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수지의 영향력은 가수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드림하이>와 <건축학개론>이라는 두 작품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녀의 연기력 때문은 아니다. 작품의 캐릭터와 그녀의 이미지가 맞아 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가의 서>에서 수지가 보여준 연기를 생각해보라. 팬덤이 없었다면 연기력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게다.

 

결국 수지가 갖고 있는 힘은 이미지다. 청순한 외모와 순수한 느낌으로 <건축학개론>의 서연 같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 그런데 그 이미지를 ‘섹시’로 바꾸겠다는 거다. 물론 가수나 연기자나 다양한 이미지에 도전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을게다. 하지만 수지의 경우는 자꾸만 새로운 이미지를 덧대기보다는 노래든 연기든 어느 쪽에 좀 더 자신의 공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이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저런 이미지를 쓰는 것은 자칫 스스로를 알맹이 없는 껍질로 만들 수 있다.

 

알다시피 대중문화에서 섹시 이미지란 여성들에게는 거의 마지막에 쓰는 카드나 다름없다. 물론 적당한 섹스어필은 여자 연예인들에게 어느 정도 요구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해당 연예인의 이미지 소비만 빠르게 할 뿐이다. 과거 박진영에 의해 본인 스스로도 별로 원하지 않은 과감한 섹시 콘셉트를 선보였던 박지윤의 사례를 떠올려보라. 결국 그녀는 다시 가요계로 돌아오는데 상당한 세월이 걸리게 되었다.

 

최근 ‘24시간이 모자라’로 과감한 섹시 콘셉트을 선보인 JYP의 선미도 마찬가지다. 무릎을 꿇고 골반을 튕기는 춤은 잠시간 화제가 되었지만 노래가 받쳐주지 못하면서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결국 섹시 콘셉트로 화제가 되고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노래가 대중들의 귀를 자극하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섹시 콘셉트를 내세운 가수의 부담만 늘어나게 된다.

 

여가수의 섹시콘셉트는 물론 수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대부분의 여가수들은 ‘섹시’가 무슨 필수품인 양 달고 노래를 발표한다. 심지어 국민여동생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아이유도 새 앨범의 포장을 ‘섹시’로 했고, 김예림 같은 독특한 음색의 가수 역시 팬티를 노출하는 티저로 섹시 이미지를 포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과 수지는 다르다. 아이유나 김예림이나 음악적으로 이미 충분한 성취를 갖고 있는 가수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본격 활동에 들어가면서 처음 이목을 끌기 위해 내놓았던 ‘섹시’ 이미지를 슬그머니 지워버렸다. 영민한 전략이다.

 

최근 현아와 현승의 트러블메이커가 새롭게 발표한 ‘내일은 없어’의 뮤직비디오에 대해 무수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뮤직비디오의 구성이 해외 뮤지션의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한편에는 공개 3일 만에 유튜브 조회수 5백만 뷰를 넘어섰다는 식으로 ‘19금 열풍’의 성공을 예고한다. 물론 이 정도의 수위를 보여주면서 이런 반응이 안 나타날 리는 없다. 하지만 현아의 노출과 섹시 이미지는 어쩌면 그녀에게는 갈수록 부담이 될 가능성도 높다.

 

클라라가 시구 한 방으로 드라마와 예능의 핫한 아이콘이 되는 과정은 지금의 섹시 과열 경쟁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어떻게든 시선을 끄는 데 있어서 여자 연예인에게 섹시 이미지만큼 강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라라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에 걸맞는 연기력이나 예능감 혹은 음악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성공가능성은 오히려 더 희박해진다.

 

수지는 아직 어리다. 이제 겨우 19살이다. 연기든 노래든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능성이 더 많은 연예인이다. 당장의 수익을 위해 소모되기보다는 좀 더 큰 가능성을 내다보고 부족한 면을 먼저 채워나갈 수는 없는 일일까. 섹시 수지를 기대하라고 하지만 사실 우려가 더 큰 이유다.

 

‘시청률의 제왕’이 꼬집은 <최고다 이순신>, 그 실상

 

‘이 드라마는... 달리기에 지쳐있는 우리 사회에 위로와 희망,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기획되었다.’ 이 문구는 <최고다 이순신> 기획의도의 한 부분이다. 이 기획의도에는 행복이란 ‘더 많이 가진다고 더 높이 올라간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사랑’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고다 이순신>의 기획의도는 이처럼 순수하고 심지어 소박하다.

 

'최고다 이순신(사진출처:KBS)'

아마도 이것은 진짜 <최고다 이순신>이 애초에 그리려했던 것들일 게다. 하지만 25일 종영에 즈음해 이 드라마를 되돌아보면 기획의도가 무색해질 정도로 방향이 엇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가 애초 다루려던 것은 위로와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였을지 모르겠지만, 실상 드라마가 계속 보여줬던 것은 막장에 가까운 엄마들의 부모로서 해서는 안될 패악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애초에 ‘출생의 비밀’을 드라마 전체의 동력을 삼은 시점부터 어쩔 수 없는 엇나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순신(아이유)의 아버지가 그녀의 친모인 송미령을 구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아니 이순신의 친모가 그녀를 키워준 김정애(고두심)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야기된 것이었다. 친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이순신은 그래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애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다음은 둘째 언니인 이유신(유인나)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구박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드라마의 상반기가 지나가고 중반에 이르게 되면 이제 친모인 송미령의 패악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친모인 줄 모르고 이순신을 배신하고, 후에 친모임을 알게 된 후에는 딸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전체 내용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이유신과 박찬우(고주원)의 반대를 이겨낸 전형적인 결혼이야기가 들어있고, 이혼한 이혜신(손태영)의 전남편과의 갈등과 새 남자 서진욱(정우)과의 어디서 많이 보았던 로맨스가 들어있을 뿐이다. 이렇게 새로운 내용이나 메시지 없이 달려온 50부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어떤 가치나 의미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드라마가 결국 가지려는 의도는 시청률로 귀결된다. 적당한 가족 드라마적 요소와 신데렐라 스토리를 섞고 그 안에 이른바 시청률을 위한 공식적인 설정들을 집어넣으면 괜찮은 시청률을 가져갈 수 있다는 안이한 선택. 이런 선택이 가능한 것은 이 편성 시간대가 사실상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KBS 주말 저녁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최고다 이순신>의 안이한 선택은 그만한 보상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간의 드라마들과 비교해 보면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드라마를 쓰고 연출하고픈 작가나 연출자는 없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애초에 특별한 아이디어나 메시지가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아이유와 조정석을 캐스팅함으로써 그 힘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이야기가 받쳐주지 않는 드라마는 이들의 존재감마저 그다지 키워놓지 못했다. 아이유는 늘 구박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쳐도, 조정석 같은 연기파 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이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 데는 대본의 결함이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흥미로운 건 같은 KBS의 <개그콘서트> ‘시청률의 제왕’이라는 코너에서 <최고다 이순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이다. 드라마 제작자인 박성광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걸 보면서 대뜸 이렇게 말한다. “주말드라마답지 못하게 이게 뭐야? 이래서 어머니들이 좋아하겠어? 어머니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 넣어서 한 번 가보자! 악녀!” 이 개그코너는 드라마에서 이순신을 선배라는 입장을 이용해 교묘하게 괴롭히는 최연아(김윤서)를 패러디하면서 심지어 “어어 재수 없어!”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박성광을 보여준다.

 

뜬금없이 대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나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게 해주겠다며 보여주는 ‘엇갈림 삼종 세트’ 역시 그저 개그의 하나로 웃어넘길 수 없는 건, 그것이 실제로 <최고다 이순신>이 해왔던 시청률을 위한 장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틀에 박힌 자극적인 공식들을 사용해 시청률이 올라가는 걸 보며 제작자인 박성광이 “아이고 재밌어. 아이고 재밌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긴다. 뭐가 재밌다는 말인가. 공식에 낚인 시청자들이?

 

종영에 즈음해 <최고다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드라마는 어떤 면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던 걸까. 물론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고 최고가 되는 건 아니라는 주제를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틀에 박힌 공식만 반복하면서 이 드라마는 엇나가버렸다. 설마 ‘시청률의 제왕’이 보여주는 것처럼 시청률만 높으면 심지어 “재밌다”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식이 계속된다면 주말극의 왕좌라는 자리조차 위태로워질 건 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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