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봉준호 ‘설국열차’

설국열차

꽁꽁 얼어붙은 지구.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거기는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나뉘는 계급체계가 존재한다.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빈민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머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아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이 계급화된 설국열차 안에서, 머리칸으로 가려는 꼬리칸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양극화되고 계급화된 세계를 은유하면서 그 대결이 과연 해법인가를 질문한다. 반란을 주도한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전투를 치르며 앞칸으로 나아가 드디어 머리칸의 절대권력자 윌포드(애드 해리스)를 마주하지만 그가 하는 말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폐쇄된 설국열차에서 균형은 필수이고, 그 균형을 위해서는 학살, 폭동 같은 것들도 ‘과감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 

 

꼬리칸의 해방을 외치며 앞칸으로 가는 문만을 향해 나아가는 커티스에게 남궁민수(송강호)는 말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쪽 바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그랬지만 균형을 말하며 불평등한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윌포드와, 그 시스템을 깨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커티스의 대결은 대선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등장하는 양자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양자택일만이 답일까. 남궁민수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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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효과, 박신혜 효과보다 컸다

 

<별그대>노믹스.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의 경제효과를 지칭하는 말이다. 전문가들이 <별그대>의 경제효과를 추산하는 건 무려 3조원.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중국인들은 김수현과 전지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구매하게 되었다. 이들이 입는 의류와 화장품은 물론이고, 전지현이 드라마 속에서 했던 치맥(치킨과 맥주) 문화에 빠져든다. 성지가 되어버린 <별그대> 촬영지는 중국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물론 중국에 진출했거나 관련 사업을 하는 이들도 <별그대> 특수를 누리기 마련이다.

 

'별에서 온 그대(사진출처:SBS)'

도대체 무엇이 다른 드라마와 달리 <별그대>의 경제효과를 이토록 크게 만들어냈던 걸까. 지난 23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는 이색적인 컨퍼런스가 열렸다. ‘<별에서 온 그대> 열풍으로 본 중국사회의 이해.’ 이 거창한 제목의 컨퍼런스에는 중국 전매대학 연극영상학부의 리셩리 교수, 북경방송국 드라마센터 마케팅부 샤오제 주간 그리고 CJ E&M China 드라마부문 책임 프로듀서인 정태상 PD가 발표자로 나왔다.

 

사뭇 진지하게 진행된 이 컨퍼런스는 <별그대> 열풍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국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였다. <별그대>의 중국 성공에 대해 리셩리 교수는 이미 한국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여성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는 점과 인터넷의 힘을 강조했다. 중국의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생겨난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불균형은 지금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양극화와 유사한 정서를 만든다는 것. 그것이 나라는 달라도 <별그대>라는 작품 하나가 양국에서 동시간대에 열광을 만든 이유라는 것이다.

 

동시간대에 한국과 중국에서 비슷한 열풍이 불었다는 점은 중요한 지점이다. 즉 과거 <겨울연가>로 인한 욘사마 열풍이나, <미남이시네요>로 촉발된 장근석 열풍은 국내와 해외의 온도차가 컸다는 점이다. 그래서 거꾸로 해외에서 먼저 터지고 그 다음에 국내에서도 관심을 갖는 순서로 한류바람이 불었다는 것. 하지만 <별그대>는 다르다. 국내와 해외가 동시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리셩리 교수가 얘기하는 양국이 비슷하게 겪는 양극화와 그 정서가 바탕이 됐다는 얘기다.

 

중국은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하나의 대륙에 가깝다는 정태상 PD의 이야기는 리셩리 교수가 남방과 북방이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정서가 다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방의 정서가 따뜻한 멜로의 분위기를 가진 우리네 한류 드라마에 더 열광적인데 반해 북방의 정서는 정치 같은 딱딱한 이야기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적인 정서의 남방과 남성적인 정서의 북방으로 설명될 수도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별그대>의 열풍이 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산업적으로 더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로 여주인공 천송이의 캐릭터가 주효했다는 지적이었다. <상속자들>에 비해 <별그대>가 더 마케팅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던 이유는 여주인공이 화려한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상속자들>의 여주인공은 가난한 신분이기 때문에 여성 소비자들의 구매에도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들은 한류 드라마의 힘을 여전히 장르적으로는 멜로의 힘으로 보고 있었다. <상속자들>의 이민호 열풍이나 <별그대>의 김수현 열풍 등 멋진 남자 주인공에 대한 주목은 한류 드라마가 중국의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번 <별그대>가 특이했던 점은 전지현이라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열풍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여주인공에서 벗어나 이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워너비가 됐던 점이 작용했다.

 

<별그대>는 종영했지만 여전히 <별그대>를 얘기하는 것은 중국에서 새롭게 촉발된 한류드라마의 열기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날 컨퍼런스에 참석한 장태유 감독은 지금껏 드라마를 갖고 이런 진지한 자리는 처음이라며 하지만 대단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종영했지만 <별그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여운은 또다른 한류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왜 하필 지금 '정도전'일까

 

왜 하필 정도전이었을까. 여말선초 이 난세만큼 사극이 사랑한 시기도 없을 게다. 거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라는 인물이 있다. <조선왕조 500>은 물론이고 <용의 눈물>, <대풍수> 같은 사극이 이성계라는 난세의 영웅을 소재로 다뤘다. 변방을 지키던 무장이 왕이 되는 과정이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대선이라는 정치적 변혁기를 매 번 치르게 되는 우리에게 이 인물은 그 때마다 상징적인 의미가 덧붙여진 채 재해석되었다.

 

'정도전(사진출처:KBS)'

그런데 이 시기를 다루면서도 KBS가 정통사극의 부활을 알리며 가져온 인물은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다. 물론 <정도전>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지만 이 사극에서 이성계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극의 첫 시작부터가 정도전(조재현)이 이성계(유동근)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결국 정도전의 정치력과 이성계의 힘이 만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니, 정도전을 다루면서 이성계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드라마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훨씬 효과적인 인물은 이성계다. 무장으로서 원에 쫓겨 고려로 들어온 홍건적을 물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해서는 원나라 나하추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고려민들의 구세주로 떠오른 인물. 그의 연전연승 이야기는 조선 건국의 정치적인 이야기와 맞물려 훨씬 다이내믹한 장면들을 보여줄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다르다. 그가 이성계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세운 것은 맞지만 그것은 끊임없는 정치적인 투쟁의 결과다. 즉 정도전을 다루는 사극은 결국 본격 정치를 다룰 수밖에 없고, 그것은 칼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말로써 벌어지는 정치 대결이 사극의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극 <정도전>은 고려 말 이색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정도전과 정몽주(임호)를 위시한 신진사대부들과 고려 말 원나라와 결탁해 권력을 잡은 권문세가의 대표 이인임(박영규)과의 정치대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쇠퇴해가는 북원의 끝자락을 잡고 고려 말의 권세를 계속 유지하려는 이인임과 북원과의 고리를 끊고 새롭게 등장하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새 세상을 꿈꾸는 정도전의 대결. 여기에 최영(서인석) 같은 고려의 충신과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수렴청정을 한 명덕태후(이덕희), 그리고 왕실외척세력인 경복흥(김진태)의 힘겨루기가 들어가면서 정치대결은 더 복잡한 양상을 만들어간다.

 

정치적 이상과 포부가 큰 정도전이지만 적 아니면 도구로만 상대를 생각하는 현실 정치 9단 이인임을 이겨낼 수는 없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이인임에 맞서 정도전이 유학자들의 성지인 대성전으로 들어가 단식투쟁을 벌이자 이인임이 최영의 힘을 빌려 무력 진압 해버리는 현재의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아 보이는 장면은 그의 만만찮은 정치력을 보여준다. 정도전은 결국 이인임과의 수차례 대결에서 패배한 연후에야 이상과 현실 정치의 봉합을 꾀하게 되는 셈이다.

 

정도전은 이처럼 그 정치적 성장담이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나 그래도 TV 사극으로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은 인물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을 다루는 데는 그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정도전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과 관련이 있다. 정도전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재상이 통치하는 나라를 꿈꾸었다. 즉 왕에 따라서 정치가 농단되는 것을 봐온 그로서는 왕이 누가 되던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수차례의 대선을 겪으면서 그 때마다 가졌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은 단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좌절을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에 그토록 꿈꾸었던 민생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했던 양극화 해소 역시 지난 1년 동안 아무런 해결점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정치가 바로 서고 나라가 제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믿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왕이 아닌 시스템의 개혁을 꿈꾼 정도전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건 지금 현재 대중들이 느끼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서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대선에 대한 누적된 실망감은 이제 표상되는 대표자의 얼굴이 아닌 실제적인 현실 정치 시스템의 변화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정도전>이라는 쉽지 않지만 좀체 눈을 떼기 힘든 본격 정치 사극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가 아닐까.

신데렐라 없어도 더 쫄깃한 '응답1994'의 멜로

 

멜로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된다? 적어도 <응답하라 1994>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가 초거대 재벌가들 사이에 들어간 신데렐라 이야기로 너무 뻔하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신데렐라 없고 심지어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멜로만으로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과거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이 그랬고,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과 공효진이 그랬듯이 잘된 멜로의 연기자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4>의 멜로는 정우라는 배우에 대한 신드롬을 만들고 있고 또한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고아라까지 매력적인 연기자로 재탄생시켰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촌스런 멜로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주목받게 된 것은.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주인공이 과거 1994년의 어떤 인물과 결혼을 했는가를 찾는 다소 단순한 멜로를 그린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멜로가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누구와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관계가 발전됐는가 하는 점은 마치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친오빠처럼 다가와 점점 가슴 뛰게 만드는 오빠로 느껴지게 되는 쓰레기 정우나, 그저 하숙집을 들락거리다 점점 가까워지게 되는 칠봉이 유연석은 그 설정 자체가 신데렐라 멜로와는 다른 <응답하라 1994>의 특별한 멜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연세대라는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에다 직업적으로도 향후 의사가 될 의대생이거나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야구선수다.

 

이것은 나정이(고아라)네 하숙집에 들어와 그녀와 장차 결혼할 지도 모를 다른 후보군들도 마찬가지다. 해태(손호준)는 순천시 버스회사의 막내아들이고, 빙그래(바로)의 부모는 충북 최대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며, 삼천포(김성균)는 한번 나가면 기름 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이다. 물론 이들은 초재벌도 아니고, 드라마는 오히려 이 ‘잘사는 촌놈들’이라는 설정을 신데렐라 이야기로 활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머 코드라면 모를까.

 

이들 촌놈들이 상경해 벌이는 멜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당대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팬클럽 활동을 하며 하숙방에서 술내기 게임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그들이 보여주는 멜로란 오지 않는 삐삐를 밤새워 기다리거나 게임을 빙자해 뽀뽀를 하거나 혹은 아플 때 꼭 껴안아주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이지 않고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하듯 과시하는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멜로가 그 어떤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쫄깃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멜로 속에 존재하는 평등한 시선과 특유의 공감대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4년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어딘지 촌스럽고 능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오히려 멜로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정이를 좋아하면서도 표현은 친오빠처럼 무뚝뚝하게 던지는 쓰레기가 그렇고, 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칠봉이가 그렇다. 해태와 조윤진(도희)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대부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진다.

 

<응답하라 1994>가 신데렐라 이야기 없이도 더 아련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1994년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이 가진 힘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그것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그 청순의 한 기억이란 현실적인 것과 일정부분 거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첫 사랑의 설렘에 집안 형편이나 학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한 어쩌면 1994년만 해도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초재벌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거의 하녀처럼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판타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많았지 그것이 사랑도 넘을 수 없는 계급이 되는 현실, 얼마나 치졸하고 치사한가.

 

그래서 이러한 양극화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 나정이네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멜로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큰 판타지로 다가온다. 돈이나 현실이나 집안이나 학벌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설레며 하는 사랑.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사랑은 그러나 심지어 치사한 신데렐라 스토리에마저 빠져들게 만드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랑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요즘 청춘들은 학비 마련하랴 취업 준비하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는 이 너무나 편안하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청춘과 사랑이 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양극화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멜로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응답하라 1994>의 평범한 멜로가 더 강력한 이유다. 양극화 자체를 지워버린 완전한 평등의 멜로라니.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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