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309동 성폭행 편 후폭풍 거센 이유

 

<그것이 알고 싶다> ‘수상한 조서-309동 성폭행 사건의 진실’편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성폭행 사건은 조서를 통해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둔갑했다. 그것도 그 조서로 인해 가해자가 된 이들은 이제 겨우 중학생들이었다. 마치 토끼몰이 하듯이 협박과 회유를 통해 없던 일을 있는 것처럼 조서를 꾸며 결국 아이들의 미래까지 파탄내버린 해당 경찰은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싶다(사진출처:SBS)'

한 지적 장애 2급의 소녀를 중학생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으로 데려가 집단으로 강간했다는 이 충격적인 조서는 제 아무리 가해자들이 철부지 아이들이라고 해도 용서하기 힘든 내용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사건일수록 그 진위를 보다 정확히 밝히는 것이 경찰로서 아니 그저 어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상식일 것이다. 그 진실 여부는 자칫 한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서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 어디에도 이런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미 결과를 상정해 놓은 틀 안에서 장황하고 자세한 설명이 붙은 질문이 던져졌고 아이들은 그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가끔씩 질문에 반박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그들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서에서는 빠져 있었다. 이미 경찰의 머리 속에 그려진 대로 조서는 꾸며졌을 뿐이고,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다 털어놨다는 거짓말에 속아 그 조서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조서 과정을 우리는 익숙하게 영화나 소설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범죄자를 추궁하는 형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그래서 <투캅스> 같은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클리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영화이고, 하나의 풍자 코미디이기에 웃을 수 있었지만 만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어떨까. 우리는 과연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범죄도 아닌 ‘집단 성폭행’ 같은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다면 그건 피눈물이 날 일이 아닌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고 절대 현실에서는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것도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아이들 같은 약자에게 자행된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조서 내용에는 아이들의 실제 진술과는 달리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저질스런 단어들이 씌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실로 당시 피해자인 지적 장애 2급의 소녀가 사실은 동네의 아저씨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유린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피해자인 지적 장애 2급의 소녀나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아이들이나 모두 어른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방송 이후 경기지방경찰청 게시판에 비난이 쇄도하는 등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대중들이 분노하고 엄정한 수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일이 조서 과정을 담은 영상을 분석하고 그것을 조서와 비교해 그 과정의 문제를 드러낸 <그것이 알고 싶다>는 왜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주었다. 덮여진 진실을 꺼내 공개하는 과정은 억울한 당사자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을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간 영남제분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온 ‘사모님의 수상한 외출’이나 국제중학교의 편법과 비리를 파헤친 ‘수상한 배려-귀족학교 반칙스캔들’처럼 이번 ‘수상한 조서’ 역시 그런 언론의 기능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여겨진다.

 

정치적 사건이든 경제적 사건이든 혹은 사회적인 문제든 세상에 알고 싶은 진실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것들은 언론을 통해 잘 보여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다 찍어놓은 방송분까지 여러 가지 이유가 붙여져 방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럴수록 더욱 알고 싶다. 거기 숨겨져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물론 <그것이 알고 싶다>가 다루는 소재는 한정적이지만, 그래도 이 프로그램은 분명 언론이 왜 필요하고 존재하는가를 에둘러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 대중들은 그것이 알고 싶다.

박시후의 편지, 용기일까 무리수일까

 

“하지만 사건 이후에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제 곁에 있어주신 여러분을 보면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성 스캔들로 인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박시후가 팬 카페에 그간의 심경에 대해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그 편지에서 박시후는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팬들을 가족이라 칭하며 그 “가족이 있어 다시 한 번 꿈을 꾸고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려 한다”고 했다. 언젠가 배우로서 복귀할 뜻을 전한 것.

 

'청담동 앨리스(사진출처:sbs)'

팬 카페에 올린 글이니만큼 일반 대중을 향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지해주는 팬들이 얼마나 고마울 것인가. 그 지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네 연예 언론들은 팬 카페든 미니 홈피든 아니면 SNS든 다분히 사적인 이야기들도 끄집어내 공론화하는 습성을 가졌다는 점이 문제다. 물론 박시후 스스로가 의도한 점이 있을 지도 모지만.

 

어쨌든 팬 카페에 글을 올리는 순간(그것도 박시후가 아닌가!)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공적인 이야기처럼 전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일반 대중들의 정서가 팬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2월 갑자기 불거진 박시후 관련 성 추문은 그가 일반 대중들에게 갖고 있던 반듯한 이미지에 커다란 흠집을 만들었다. 게다가 이 스캔들 공방은 점점 가열되면서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까지 공개되는 극한의 상황까지 이르렀다. 대중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박시후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성폭행을 주장했던 여성이 합의에 의해 고소를 취하했던 것. 결국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아는 것으로 남겨지게 됐다. 문제는 법적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쨌든 드러난 치부는 설혹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잘못도 거기에 분명 들어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던가. 물론 성폭행 주장 여성의 말처럼 그가 가해자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이야기다.

 

이처럼 여전히 의혹이 남아있고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박시후가 팬 카페에 올린 편지는 너무 앞서가고 있는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팬 카페에 올린 팬들을 위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겠지만, 그것이 밖으로 유출되었을 때 일반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마치 온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듯한 뉘앙스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게다.

 

“길고 거센 이번 여름 장마처럼 저에게도 모진 비가 내렸지만 그 비를 이겨낸 만큼 더욱 땅이 단단해지리라 믿습니다.” 박시후의 소망은 이것이 그냥 한 때 지나가는 비였으면 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대중들의 마음은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가 다시 단단한 땅이 되려면 바로 이 지금의 현실 인식을 바라보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은 행동이나 말 한 마디가 중요한 시점이다. 특히 본업이 대중들을 캐릭터에 몰입시켜야 하는 연기자라면 그 손상된 이미지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지워질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섣부른 용기보다는 좀 더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독도는 우리 땅, 굳이 말해야 아나

 

카라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던 걸까. 미니 앨범 쇼케이스에서 한 기자가 던진 낚시질에 상황은 일파만파가 되어버렸다. 일본에서 독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그 질문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당연하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답했다면 그 후폭풍은 일본에서 날아올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이 당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점에서 박지윤 아나운서가 기술적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피하게 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카라(사진출처:DSP미디어)

그런데 이렇게 되자 ‘카라가 독도 현안에 침묵했다’는 식으로 논란이 만들어졌다. 무슨 발언을 한 것도 아니고 앨범 발표하는 자리에서 엉뚱한 질문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만으로 생겨난 논란이다. 그런데 그 후에도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심지어 ‘카라의 침묵이 두고두고 아쉽다’는 식의 독도 발언을 강요하는 기사까지 나왔다. 이 정도면 아예 대놓고 논란을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다. 이건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변치 않는 기정사실일 것이다. 카라도 마찬가지고, 그 어떤 한류스타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런데 왜 굳이 그것을 묻고 확인하려 드는 걸까. 여기에는 묘한 파시즘적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독도 관련 현안이 한일 양국 사이에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도에 대해 발언하면 애국이고, 회피하면 매국이라는 식의 구분 짓기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물며 언론이라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이런 짓을 자행하는 건 자신의 무개념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이런 식의 구분 짓기와 논란 만들기는 기실 일본이 원하는 그대로이기도 하다. 굳이 우리 땅을 갖고 그게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독도를 분쟁지구화하려는 일본은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굳이 외치도록 강요한다. 치졸한 짓이다. 국가가 나서서 문화적 취향까지 이리저리 뒤흔드는 행위는 마치 전쟁에서 국가적 이익과 무관한 무고한 아이들이나 아녀자들에게까지 총구를 들이미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어쨌든 이런 도발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독도를 호명해 애국자와 매국자를 가리려는 행태는 그 자체가 매국적인 행위임을 왜 모를까.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구화하려는 행위와 대중문화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교류하려 하는 한류의 부딪침은 그래서, 무형적인 문화가 국가를 넘나드는 21세기에 여전히 물리적인 영토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일본의 20세기적 제국주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카라를 비롯한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현재 직면한 것은 바로 이 일본의 20세기적 제국주의의 망령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이다. 국가와 국가를 소통시키는 문화의 첨병으로써 양국 간의 이해와 공감을 넓혀왔던 그들이 아닌가.

 

이런 시점에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동조해서 우리 스스로 애국과 매국을 나누는 행위는 그런 점에서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독도 문제는 좀 더 차분하게 풀어나가야 저들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자칫 흥분하는 순간, 기정사실이던 독도는 분쟁지구가 되어버린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그잖아도 논란을 가중시켜 이익으로 취하려는 저들과 함께 춤을 추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라가 굳이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걸 굳이 확인하려는 행위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기정사실 또한 뒤흔드는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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