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대조영'을 닮았다

'자이언트'는 지금껏 우리가 개발시대를 다루던 시대극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던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자이언트'를 '에덴의 동쪽'이나 '야망의 세월'의 연장선으로 바라봤던, 그래서 이 시대극이 국책성 드라마가 아닌가 하던 그 의구심은 전혀 다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봄날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자이언트'가 닮은 것은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장영철 작가의 전작인 '대조영'에 가깝다. 하나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음모와 암투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도 모를 정도의 복마전으로 벌어지는 세계. 그것이 '자이언트'다.

사극 속의 영토는 이 시대극으로 와서는 강남땅으로 바뀌었다. 개발을 앞두고 누가 그 땅의 개발권을 차지하느냐가 이 개발 시대에 벌어진 전투이고, 또 그 개발예정지를 땅값이 오르기 전에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이 전투의 승리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철 공사권을 대륙건설에 빼앗긴 후 절치부심하던 조민우(주상욱)가 지도를 보면서 노선을 바꾸는 것으로 역세권의 땅을 매입해온 대륙건설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사극 속 전투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강남땅에서는 때론 조폭들을 앞세운 분쟁지에서의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이 영토 전쟁에서의 장군 격인 건설사 대표들과 참모들의 끝없는 음모가 자행되기도 한다. 정치인들과 건설사 대표들 간에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로비와 정보전은 그러나 이 전쟁이 그 땅에 살아갈 우리네 민초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전쟁을 벌일 뿐, 국민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벌어졌던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장영철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란 우리가 그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말려든 싸움 속에서 끝없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고,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똑같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초반부 황태섭(이덕화)이 매립지 공사를 사이에 두고 대륙건설의 홍기표(손병호)와 대결구도를 벌일 때, 마치 황태섭이 선이고 홍기표가 악인 것처럼 드라마가 흘러가던 것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후에 홍기표가 이미주(황정음)를 돌보는 인물임이 드러나고, 황태섭 역시 이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선악 구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악의 화신인 조필연(정보석)과 민홍기 국장(이기영)이 벌이는 대결구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한 때 '대조영'이 보여주었던 그 '양파 껍질 같은 대결구도'의 현대판이다. 당장에는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껍질 하나를 벗겨내면 그 구도가 180도 바뀌고 또 벗겨내면.... 이 집요한 진흙탕 싸움은 굉장한 극적 재미를 만들어주는 것인 동시에,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화려한 강남의 마천루가 얼마나 더럽고 피가 철철 흐르는 복마전을 통해 세워진 것인가'를 잘 드러내주는 요소들이다. 그 진흙탕 싸움 위에 원치 않게 생존을 위해 서게 된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는 이 욕망의 싸움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과장되지도 미화되지도 않은, 그저 그 싸움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낸 가족의 한 표상일 뿐이다.

낚시를 하고 있는 강남의 큰 손에게 홍기표가 돈을 빌리러 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대부분을 간략하게 축약해낸다.

"오늘따라 입질이 없구나."는 큰 손의 푸념. 그러자 이어지는 홍기표의 말.
"썩은 물에서 고기가 나올 리가 없죠. 예전엔 이곳에서 고기가 제일 잘 잡혔었는데.."
"이렇게 만든 게 당신들이잖소. 강남을 개발하면서 가장 먼저 망가진 게 바로 이 한강이니까."하고 말하는 큰 손. 그러자 신념에 찬 듯 말하는 홍기표.
"강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개발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반박하는 큰 손.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사람들 마음까지 혼탁해진 건 어떡하고."

이 대사들이 마치 개발시대의 한 시점에서 오고간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바로 이 부분은 이 시대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명품 남성 캐릭터 전시장, '추노'의 여성 캐릭터 문제점

'추노'의 이다해가 또 구설수에 올랐다. 과도한 화장, 노출신에 이어 이번에는 극중 송태하(오지호)와의 갑작스런 키스신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항간에는 언년이 살생부, 혹은 '추노 데스노트'가 화제가 될 정도다. 언년이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다해 때문에 줄초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다해가 이렇게 드라마 속 캐릭터를 연기하며 논란이 됐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에덴의 동쪽'이 방영될 때, 그녀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도중에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유는? 캐릭터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민혜린이란 캐릭터는 극 초반에는 거대 언론사 사장인 아버지에 반항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후에 가면 그 언론사의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변모한다.

여성 캐릭터로서의 멜로에 있어서도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요령부득의 인물이었다. 그녀의 언니인 혜령의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 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노동운동을 함께 하던 이동욱(연정훈)과 연인관계인 듯 보였는데, 나중에는 그 형인 이동철(송승헌)을 짝사랑한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민폐형 캐릭터에 상황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인물이니 이다해로서도 연기한다는 게 실로 어려웠을 터다.

그렇다면 '추노'의 언년이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추노'에는 멋진 남성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대길(장혁), 최장군(한정수), 왕손이(김지석)는 드라마판 '놈놈놈'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지게 그려지고, 그들이 추적하는 송태하(오지호) 역시 슬픈 운명 속에 굴하지 않고 서 있는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고 있다. 때론 해학적인 느낌을 주는 업복이(공형진)는 물론이고 심지어 악역을 맡고 있는 황철웅(이종혁)이나 천지호(성동일)조차 멋있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들은 그렇지 못하다. 언년이는 날아오는 화살 앞에 그저 비명을 지를 뿐, 그 화살을 손목으로 받아내는 송태하 같은 능동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원손을 구하기 위해 달려야만 하는 송태하의 발목을 잡는(스스로도 극중에서 그런 대사를 한다) 그런 캐릭터다. 오히려 대길 패거리와 함께 다니는 설화(김하은)가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이 캐릭터 역시 민폐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기껏 노래를 불러주거나 말을 지키는 캐릭터다.

여각의 큰 주모(조미령), 작은 주모(윤주희) 역시 최장군만 바라보며 그를 연모하는 해바라기형 캐릭터들이다. 그들이 극에서 그 이외에 부여받은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업복이 옆에서 애틋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초복이(민지아)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명나라 자객인 윤지(윤지민)가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였으나, 송태하의 단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러니 '추노'라는 사극에는 남성 캐릭터들은 우글우글한 반면, 이렇다 할 여성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 뇌성마비 연기를 하고 있는 이선영(하시은)이 호평 받는 것은 그녀가 이 남성들의 판이 되어버린 사극에서 그 설정 때문에 한 발짝 물러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화살을 이다해가 맞는 이유도 명백히 보인다. 이다해가 연기자로서 어떤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이 죄가 아니라면, '추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언년이 논란은 모두 제작진의 문제라고밖에 볼 수 없다. 화장은 연출에 의해 의도된 것이고, 노출 역시 의도된 신들이며, 그것을 갖고 블러 처리를 하거나 뺀 것도 모두 연출에서 한 것이지 이다해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년이의 수동적이고 민폐적인 캐릭터는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만큼 섬세하게 고민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그러니 여주인공으로서 도드라진 이다해가 모든 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다해가 "여배우로서 사는 게 힘들다"고 토로한 것은 이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 캐릭터를 하나의 인형이나 남성들의 판타지, 혹은 꿰다 논 보릿자루처럼 그려놓는 한,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는 그 한계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선덕여왕'이 그린 여성 캐릭터와 '추노'가 그리고 있는 여성 캐릭터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듯이, 드라마를 보는 제작자의 여성에 대한 시선은 그 캐릭터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구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지 않을까. '추노'는 멋진 남성 캐릭터들의 전시장이지만, 또한 여성 캐릭터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신파’라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그 용어는 주로 최루성 멜로물, 자극적인 설정 남발, 뻔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처럼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 현재의 작품을 얘기할 때, 신파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신파 코드들이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때로는 호평받는 작품 속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이 코드를 버리고서는 대중성을 얻기가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시청률 45%를 넘긴 국민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흔히들 착한 드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은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 착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으로 보았을 때 여타 자극적인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계모라 해도 남편이 죽자(실은 살아있지만) 자식을 내치고 그 유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인 은성의 동생 은우까지 멀리 내다버리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른바 신파 코드(이것은 신파라기보다는 신파적인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착한 심성으로 하늘이 도와 결국, 잘 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우리네 고전적인 이야기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으로, 신파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이 계모 백성희로부터 버려지지만, 그 착한 심성으로 거의 신적인 존재인 장숙자 여사(반효정)의 구원을 받는(게다가 왕자님인 선우환(이승기)까지!)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나 극적 구성에 있어 신파 코드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파 코드의 활용은 이미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신파 코드인 출생의 비밀은 최근 드라마들만 예로 들더라도 쉽게 발견된다. 시대극을 표방한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다시 리메이크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역시 그러하며, 심지어 최근 방영되는 사극 <선덕여왕>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에서도 이 코드는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 이유는 그 신파적인 코드가 자극적인 감정 분출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는 바로 이 자극적인 감정 분출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파적인 코드들, 예를 들면 출생 비밀, 불륜, 불치 같은 소재들을 섞어 심지어 개연성을 무시하고 나열했던 드라마들이다.

한때 이러한 신파 코드들이 활용되는 드라마들이 외면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트렌디물이라 불리던 멜로 드라마들의 퇴조와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으로 일어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환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과연 신파적이고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는 사라졌을까? 잠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호응은 낮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감정 과잉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식의 신파 코드를 반드시 끼워 넣는다. <카인과 아벨>은 의학 드라마에 가정 비극(이 코드는 <찬란한 유산>과 유사하다)을 넣었고, <태양을 삼켜라>는 액션 드라마에 트렌디한 멜로 구조를 끼워 넣었다.

신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신파가 주로 다루는 감정의 분출을 근간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음악 등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친정 엄마와 2박3일> 같은 연극은 암에 걸린 딸이 친정 엄마를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신파조의 극으로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신파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들 즉, 틀에 박힌 대사나 연출 등을 벗어나 같은 소재라도 새롭고 진지한 접근을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2009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역시 바로 이런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신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신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신경숙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또한, 대중음악에 있어서 신파적인 코드들은 주로 외환위기 시절에 활용되었었다. 조성모의 <아시나요>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등장한 이른바 소몰이 창법들의 창궐과 퇴조는 신파 코드가 가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현재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신파 코드가 담겨진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 출연 같은 웃음의 코드를 동시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수가 트리플 크라운(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승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분야 진출은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통해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것은 마치 <찬란한 유산>이 구사한 감정의 양면 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가요에까지 신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어떤 시기에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파가 가진 어떤 힘이 우리네 문화 속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한국식’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한다. ‘한국식’ 블록버스터, ‘한국식’ 액션, ‘한국식’ 의학 드라마 등등. 그런데 여기서 ‘한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자리한 특유의 ‘감정 중심 문화’와 ‘특유의 끈끈한 관계의 문화’가 들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리우드식의 아드레날린 과잉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폭풍, 혹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콘텐츠에 더 익숙하다.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하드보일드한 감정 배제의 스토리텔링을 할 때,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끌어올리는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이것은 볼거리 위주의 콘텐츠들이 갖는 대규모의 투자와 대규모의 소비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우리네 문화 산업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볼거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물량 투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인력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흔히들 신파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 상투적인 설정과 뻔한 스토리, 게다가 그런 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이성적인 문화의 소비자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에 치중하는 우리식의 문화 경향을 모두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부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감정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했을 때 갖게 되는 부정적인 인상을 제거하면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발전적인 것이 아닐까.(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막장’과 ‘국민’이라는 용어, 남용되고 있다

막장. ‘갱도의 막다른 끝’. 흔히 ‘갈 데까지 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최근 드라마들이 불륜과 자극적인 설정과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이 말은 그런 드라마들을 지칭하는 접두어가 되어버렸다. 이 ‘갈 데까지 간’ 드라마에 대한 반발심이 ‘막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막장’이라는 용어는 실로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오히려 ‘막장’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일찌감치 막장의 전염병을 터뜨리고 화려한 시청률로 사라진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해, 현재 그 스피디한 전개로 실험성까지 바라보게 되는 ‘아내의 유혹’이 그 대표주자. 이제 이 전염병은 일일드라마나 가족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에덴의 동쪽’이나 ‘꽃보다 남자’같은 미니시리즈 같은 프라임 타임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문제는 마구 사용되는 ‘막장’이란 용어의 남용이다. 자극적인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지적하는 ‘막장’이라는 극단적 표현은 지나치게 남용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시청자들을 ‘막장’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세대가 극단적으로 욕하지만 여전히 그 수요층(그것도 강력한 충성도를 가진)이 존재하는 이들 드라마들의 상업성은, 익숙해진 막장을 더욱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막장드라마는 그 본질인 조악함을 그 상업적으로 변모한 용어 아래 숨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장’이라는 용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남용되던 ‘국민’이라는 용어와 만나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로도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시청률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은 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양적인 판단(시청률)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고, 막장드라마가 그 시청률에 도달하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 동거하게 되었다. ‘아내의 유혹’에 혹자는 이렇게 이름 붙였다. ‘국민막장드라마.’

‘국민’이라는 질적인 판단으로 불려져야할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양적인 판단으로 그 의미를 남용하게 되면서 그것이 양적인 팽창(시청률 확보)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막장’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그렇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라는 본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야할 용어가 아주 가깝게 다가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막장’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 부정적인 질을 질타하는 용어에서 양적인 성공을 상찬하는 용어로 변질되고 있다.

‘국민’이나 ‘막장’과 같은 드라마에 붙는 말들은 둘 다 모두 질적 판단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전자가 그 질의 긍정적 측면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 부정적 측면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지금 모두 양적인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막장’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고(오히려 상업적으로 성공한 드라마로 보이게 된다), ‘국민’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 질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시청률이란 잣대가 가진 진짜 무서운 얼굴이 아닐까. 이제 이들 막다른 길을 달리는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은 용어의 차원을 넘어 좀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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