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의 열광에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남다른 시선이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

“이렇게나 저하를 연모하면서 후궁 되기는 왜 싫은 건데? 제조상궁마마님의 힘이 아니더라도 넌 후궁이 될 수 있어. 그저 저하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기만 하면.” 영조의 분노를 사 위기에 처한 이산(이준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성덕임(이세영)에게 서상궁(장혜진)은 그런 말로 위로를 건넨다. 사실이다. 이미 이산은 성덕임을 마음에 두고 있고, 그 사실은 성덕임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서상궁의 말에 성덕임이 오히려 던지는 질문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왜요? 왜 연모하면 후궁이 돼야 해요? 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후궁이 돼서 무슨 좋은 꼴을 본다고. 새로운 여인들이 날마다 줄줄이 굴비처럼 들어올 걸요? 모두가 내로라하는 사대부가의 여식일 거고 젊고 어여쁠 거고 그 꼴을 보면서도 입도 뻥긋 못하고 참고 살아야 되는데 그게 후궁 팔자인데 왜 그렇게 살아야 돼요? 저하가 소중해요. 하지만 전 제자신이 제일 소중해요. 그러니까 절대로 제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 않을 거예요. 제대로 가질 수 없는 거면 차라리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게 나으니까.”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의 이 대사는 어째서 이 사극이 현재의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하는가를 잘 드러낸다. 사실 이산과 성덕임의 이야기나 영조와의 갈등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이미 대중들에게도 친숙하다. MBC <이산>이 이미 이산과 의빈 성씨의 로맨스를 다룬 바 있고, 워낙 사도세자로부터 이어지는 영정조시대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옷소매 붉은 끝동>이 다른 건 성덕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서다. 사극들이 여러 차례 재연한 것이지만, 궁녀들은 마치 왕의 간택을 받는 일이 팔자를 고치는 일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성덕임은 그 당연한 것처럼 치부되던 재연에 질문을 던진다. 성덕임은 후궁이 된다는 것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런 현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이산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뜻이다.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자각. 성덕임은 바로 이 자각 때문에 도드라지는 캐릭터고, 이 캐릭터는 다름 아닌 이 사극을 달리 만드는 동력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 이산의 사랑만을 기다리며 간택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이산은 물론 자신을 지키고 보다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까지 쟁취하려는 인물이다. 

 

어느 비 오는 날 강아지를 키우려 하지 않는 이산에게 성덕임이 그 이유를 묻자, 이산은 “어려서 어미를 잃었는데 주인까지 잃게 되면 불쌍하니까”라고 답한다. 그것은 분란도 많고 해치려는 자들도 많은 궐에서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성덕임의 대꾸가 흥미롭다. “저하께서 승하하시면... 전.. 출궁당합니다.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기는데 불쌍하지 않습니까?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말씀 하지 마옵소서.” 물론 거기에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이산에 대한 농이 섞여 있지만 성덕임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먼저 소중하게 여기는 캐릭터다. 

 

연회에 생감과 게장이 올라온 일로 인해 대노한 영조(이덕화)가 이제 이산을 죽일 듯이 칼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그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를 구원해줄 존재는 다름 아닌 성덕임이다. 성덕임은 과거 사도세자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영조로부터 받아낸 금등지사, 즉 끝까지 이산을 지켜주고 선위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문서를 찾아내는 것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박상궁(차미경)이 보관했던 휘항에 생겨진 봉(峯)이라는 글자와 혜빈 자가(강말금)의 가락지에 새겨진 오(五) 그리고 덕임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명(明)이라는 글자를 풀어 금등지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건 아마도 대전의 용상에 있는 달과 해 그림 사이에 놓여진 봉우리 그림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싶다.

 

이산이 계속 처하게 되는 위기 속에서 성덕임은 자신의 능력(이야기 능력, 수수께끼를 푸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며 <옷소매 붉은 끝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성덕임이라는 과거 사극 속 궁녀들과는 너무나 다른 여성 캐릭터를 세움으로써 가능해진 일이다. 이산을 사랑하지만, 그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 캐릭터. 그래서 훨씬 더 자기 주도적인 인물 덕분에 <옷소매 붉은 끝동>은 사극이지만 현재적인 공감대를 강력한 몰입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사진:MBC)

‘원 더 우먼’, 갑질, 시월드, 비리, 위선에 날리는 강력한 한 방

원 더 우먼

“다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깝쳐!”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이 된 채 졸지에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이하늬)가 된 비리검사이자 조폭 행동대장 외동딸 조연주(이하늬)는 꾹꾹 눌렀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자신이 진짜 며느리인 줄 알고, 재벌가 시월드에서 꼭두각시에 노예처럼 대접받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도 그러려니 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당하기만 했던 강미나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서는 뭐든 해왔던 비리검사이자 거의 조폭급의 싸움 실력으로 그들과도 결탁되어 있는 조연주다. 그의 본성이 터져 나오며 재벌가 시댁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란 듯이 일침을 가하는 장면은 마치 이 드라마가 패러디해 따온 제목 <원 더 우먼>의 그 슈퍼히어로를 떠올리게 한다. 

 

계속 무시하듯 장난치는 큰며느리의 아들에게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소리치고, 그런 그에게 얘가 장난 좀 한 걸 갖고 뭘 그러냐는 큰며느리에게도 똑같이 쏘아붙인다. 꼴에 남편이라고 끌어 앉히려는 한성운(송원석)에게 “이해? 말이 좋아 이해지 나보고 그냥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거잖아?”하고 일침을 가하고, 급기야 참지 못한 시아버지이자 한주그룹 회장인 한영식(전국환)이 큰 소리로 “조용히 못해!”하고 소리치자 주춤하기는커녕 더 큰 소리로 “언성 높은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아니 이게 무슨 노름판도 아니고 왜 갑자기 소릴 질러요? 아이고 깜짝이야!”하고 외친다. 이렇게 일일이 한 사람씩의 공격에 맞대응하는 모습은 마치 원더우먼이 빗발치는 총알들을 팔찌로 막아내고 공격한 자들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SBS 금토드라마 <원 더 우먼>의 이 속 시원한 사이다 장면은 이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카타르시스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 순간 이 독보적인 여성은 노예처럼 시월드에서 핍박받아온 그 응어리를 마치 총알처럼 쏘아댄다. 과장된 코미디로 연출되어 있지만 마침 추석 명절을 보내고 온 며느리들 중에는 이 광경이 주는 시원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여성 캐릭터가 겨냥하고 있는 건 시월드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세계만이 아니다. 마침 이 여성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며느리에게조차 갑질이 일상이 되어 있는 재벌가다. 남편은 대놓고 바람을 피고, 집안사람들은 유민그룹의 막내딸인 이 여성이 물려받게 될 유산에만 관심이 있다. 재벌가 며느리지만 가사도우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의 스케줄을 가진 이 여성은 그래서 재벌가라는 회사의 갑질 아래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 같은 위치를 드러낸다. 그러니 이 여성이 싸워나가는 건 시월드의 핍박만이 아니라, 갑질하는 세상의 핍박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쩌다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가 된 이 여성의 실체는 비리검사이자 조폭인 조연주다. 그러니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그 법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성공하려 애써왔지만, 이제 재벌가 며느리의 역할을 하게 된 그는 그 남다른 법 지식을 갖가지 비리와 위선으로 점철된 재벌가와 싸우는데 활용하게 된다. 물론 비리를 캐거나 혹은 후계자 승계구도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성혜(진서연) 같은 적이나 조폭들의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도 그의 잠재된 능력(?)이 튀어나온다. 저도 모르게 조폭들을 때려눕히며 “나 왜 이렇게 잘 싸워?”라고 하는 대목은 코믹하게 그려져 있지만 이 독보적인 캐릭터의 무소불위를 잘 드러내준다. 

 

사실 <원 더 우먼>은 그 흔하디흔한 ‘왕자와 거지’ 코드와 기억상실 코드를 틀로 가져왔다. 다분히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 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익숙한 코드를 통해 축조해낸 무소불위의 여성 캐릭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는 비리검사였으며 조폭이었지만 재벌가 며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 주먹, 돈을 모두 쥘 수 있는 캐릭터다. 중요한 건 이런 잠재적 능력을 이 여성 캐릭터가 무엇을 하는데 쓰는가 하는 점이다. 정의의 사도 같은 캐릭터와는 멀고 적당히 속물적이지만 불의는 참지 못하는 이 캐릭터는 저도 모르게 시월드와 싸우고, 갑질하는 세상과 싸우며,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해온 위선적인 기득권자들과 싸운다. 

 

물론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일주일 간 갑질하는 세상에서의 갖가지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 몸에 안고 주말을 맞이한 시청자들에게 한 시간 동안의 시원시원한 사이다를 날려주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다. 특히 이 한 여성 캐릭터에 이러한 다양한 사회의 갑질 구조를 부여한 건 이 드라마의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여성과 약자들의 연대적 지지가 그 캐릭터 속에 자연스럽게 부여될 수 있어서다. 아마도 최근 등장한 여성캐릭터 중 독보적인(One) 여성 캐릭터(The woman)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사진:SBS)

요즘 대박드라마에는 대박 여성캐릭터가 있다

 

여성 캐릭터들이 달라지니 시청률도 화제성도 펄펄 난다. SBS 월화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의 차영진(김서형), 종영한 SBS <하이에나>의 정금자(김혜수) 그리고 최근 신드롬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김희애)가 그들이다.

 

기존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이들 작품들은 시청률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최고시청률 10.5%(닐슨 코리아)를 찍었고, <하이에나>는 14.6%로 종영했으며, <부부의 세계>는 6회 만에 18.8%를 기록하며 향후 JTBC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던 <스카이 캐슬>을 넘어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들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확실히 다르다 여겨지는 건, 이들의 새로운 캐릭터가 사실상 드라마의 주제의식과 색깔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스릴러지만 동시에 나쁜 어른들로부터 한 학생을 지켜내려는 어른들의 고군분투를 다루는 작품이다. 여기서 차영진 형사는 범죄를 추적하는 불꽃 형사의 면면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은호(안지호)라는 아이를 지켜내려는 따뜻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카리스마와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의 특징은 드라마를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이면서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휴먼드라마적 느낌까지 더해준다. 차영진이라는 색다른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세우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이 드라마만의 색깔이다.

 

종영한 드라마 <하이에나>는 이른바 ‘정금자의 방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힘이 중심이 됐던 드라마였다. 가진 건 없지만 그래서 물불 가리지 않고 승소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하는 정금자는, 일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는 유쾌한 캐릭터로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거대 로펌과 중소 로펌, 갑과 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구도를 역전시키는 이 정금자라는 여성 캐릭터의 통쾌한 반전극은,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윤희재(주지훈)와 기존의 성 역할 구분을 무화시키는 반전을 보여준 바 있다.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지만, 이처럼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오히려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설정은 성 역할 구분이 이제 구시대의 산물이 됐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부의 세계>는 폭력적인 남성들의 세계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이를 감수하기보다는 대적하는 이야기 구도를 갖고 있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는 그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이혼하는 지선우(김희애)라는 여성 캐릭터는 그래서 이 이야기 구도의 중심에 서 있다. 그간 무수히 많은 불륜 소재 드라마들이 나왔지만 <부부의 세계>가 그것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이 지선우라는 색다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혼을 하면서 남편에게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그래서 결국 남편과 내연녀 그리고 그 내연녀의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저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남편의 폭력을 유도하는 고육지책까지 써서 이혼과 동시에 아들의 양육권까지 얻는다.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이 여성 캐릭터의 반격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스릴러에 따뜻함을 더해주고, 일과 사랑 모두에서 성 역할 구분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며, 피해자로 감수하기보다는 가해자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여성 캐릭터의 변화. 시청자들은 그 반가운 변화에 호응하고 있다. 요즘의 대박드라마에는 대박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사진:SBS)

‘검블유’, 여성 캐릭터들의 진화 어디까지 왔나

 

tvN 수목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했요 WWW(이하 검블유)>가 종영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과 일에 있어서의 아슬아슬함을 넘어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른 <검블유>. 어찌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로맨틱 코미디의 틀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드라마라 볼 수 있지만, 어째서 이 드라마는 다르게 보였을까.

 

그것은 캐릭터의 힘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제목에 담긴 ‘WWW’가 세 명의 여성(Woman)을 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드라마는 배타미(임수정), 차현(이다희) 그리고 송가경(전혜진)이라는 세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배타미는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착하거나 도덕적인 선택만을 하는 여성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즉 검색업계 1위인 유니콘에 있을 때도 그는 도덕적인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기기 위해 현실적인 선택을 할 줄 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유니콘에서 해고되어 경쟁업체인 바로의 TF팀 팀장으로 왔을 때 차현과 대립하게 됐던 건 바로 그런 부분 때문이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차현은 배타미의 현실 타협적인 면들과 부딪쳤다.

 

이런 면면은 늘 착함과 바른 선택만을 강요받으며 다소 수비적인 입장만을 드러내곤 하던 여성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배타미는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동시에 싸울 줄도 아는 인물이었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옳다면 옆에 두고 쓴소리를 들을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이 점은 차현이라는 그와는 사뭇 다른 ‘정의의 화신’과 워맨스에 가까운 밀당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송가경 역시 기존 여성 캐릭터들의 면면을 온전히 뒤집어놓은 인물이다. 결혼을 꿈꾸거나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곤 하던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이혼을 결심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결혼만이 유일한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혼을 통해 자신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그걸 묵묵히 옆에서 도와준 남편 오진우(지승현)와 이혼 후 진정한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로맨틱 코미디에서 늘상 보여주던 남녀 캐릭터의 위치를 뒤바꿔 보여주는 묘미 또한 이 드라마가 캐릭터의 매력을 만들어낸 중요한 힘이었다. 비혼주의자인 배타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남인 박모건(장기용)의 관계는 기존 신데렐라 틀을 뒤집어 놓았고, 특히 차현이 보호해주며 주도적으로 사랑을 이끌어낸 설지환(이재욱)이라는 캐릭터는 이 드라마가 끄집어낸 보물 같은 매력이 있었다.

 

여성 캐릭터들의 진화를 도전적으로 실험한 작품이지만 남는 아쉬움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일의 세계에 있어서 초반부의 꽉 찬 긴장감이 뒤로 갈수록 조금씩 풀려버린 느낌이 있어서다. 정부의 실검 조작에 관여하려는 문제나 포털 사용자 정보열람 같은 사안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공격에 대통령이 사과하는 장면은 물론 사이다 설정의 드라마적 판타지라고는 해도 너무 간단하게 처리된 면이 있다.

 

또한 이런 색다르고 능동적인 여성상이 등장하면서도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삼각 멜로 구도가 다시 들어가는 대목도 아쉬웠던 부분이다. 배타미와 박모건의 사랑 사이에 갑자기 들어와 그 관계에 위기를 만들어낸 피아노 선생님 정다인(한지완)이 그렇다. 굳이 이 새로운 관계와 인물을 가져온 드라마가 과거의 로맨틱 코미디 틀을 다시금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블유>는 확실히 이 변화해가고 있는 시대에 로맨틱 코미디도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작품이었다. 특히 차현 같은 우리 시대에 어울릴 법한 매력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끄집어낸 것이나, 그 상대역으로서 설지환 같은 역시 바람직한 매력의 남성의 모습을 포착해낸 점은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 출신답게 귀에 콕콕 박히는 대사와 멋진 캐릭터들을 그려내면서도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다소 도발적인 이야기를 과감히 시도해 보여준 권도은 작가의 향후 행보가 기대되게 만든 작품이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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