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기꺼이 홍길동과 함께 역적이 되고픈 이유

연산(김지석)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혹독해진다. 여악들이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엄마에게서 떼어낸 후 땅에 묻어버리라고 하고, 임금이 사냥을 나오는 곳에 들어오는 자는 목을 잘라 성문 앞에 내건다. 급기야 학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익명서’를 붙인다. 지금으로 치면 대자보다. 그 익명서를 붙이다 잡힌 이들은 역시 죽을 때까지 두드려 맞는다.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이 하필이면 연산군 시절의 그 암흑기를 사극의 소재로 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결국 사극이란 과거의 어느 시점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고, 따라서 그 시점이란 현재와 조우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역적> 작가의 우리네 현재의 삶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이 연산군 시절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다. 

<역적>에는 지금의 우리가 처한 시국 상황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다수 등장한다. 익명서를 붙였다고 끌려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다 못한 길동(윤균상)이 그들을 구해내고 싶다고 하자 길동의 형 길현(심희섭)은 궁의 담이 높아서 백성들이 그걸 넘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것보다는 감히 임금을 범하지 못하는 그 ‘마음의 담’이 높아서라는 것.

지난 탄핵 정국 때 대통령을 감히 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존재처럼 감싸던 이들이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의 담’일 것이다. 이미 시대는 왕의 시대가 아니라 국민의 시대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과거에 살아가는 이들은 대통령을 받들어야 할 존재로 여기고, 국민은 왕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마음의 담’이 공고해지는 건 임금 혼자가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싼 촘촘한 권력구조 때문이다. “그래. 전하는 조선의 쌀이고 군사고 땅이지. 해서 전하 뒤에 숨어 쌀과 군사와 땅을 얻는 자들이 많아. 그자들은 아무리 임금이 학정을 해도 자신들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임금은 안전해.”

임금 주변에 달라붙어 권력과 사익을 추구하는 비선실세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임금을 보호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담’이 무너지지 않고 공고해진다는 걸 <역적>은 길현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낸다. 결국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백성 스스로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길동은 숨어서 움직이는 도적이자 의적이 아니라, 나서서 세상을 바꾸는 역적이 기꺼이 되려 한다.

“성님, 말을 들으니 사람들 마음의 담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줄 이제야 알겄소. 해서 밤에 몰래 백성들 꺼내오는 일은 안하겄소. 대신 벌건 대낮에 백성들 꺼내 올랍니다. 만약 벌건 대낮에 임금님 안방에 들이닥친 미친놈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백성들 마음의 담이 좀 낮아지지 않겄소?” 숨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모든 것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싸워나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최근까지 촛불을 들고 부조리를 알리려고 했던 그 집회의 의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궁극의 목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임금이지만 감히 범할 수 없다는 ‘마음의 담’ 때문에 하지 못했던 임금을 바꾸는 일이다. “하늘에서 큰 눈이나 우박이 내리면 한 해 농사를 다 망쳐버리지요. 그런데 어쩌겠소. 그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임금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도 아니고 큰 눈도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요.”

길동의 이 연설은 마치 탄핵 정국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들려오던 그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연상케 한다. 연산의 폭정과 비선실세들 그리고 이어지는 탄핵의 목소리. <역적>은 탄핵 정국을 일찌감치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역적’ 윤균상, 사적 복수에서 공적 소명으로

“성님, 어리니를 봤소. 어리니가 임금님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소. 성님, 나 그동안 못된 짓 많이 하고 살았소. 충원군한테 복수도 하고 금주령 때 술 팔믄서 건달들 제끼느라 손에 피도 많이 묻혔소. 억울한 사람들 도와준답시고 미운 놈들 다리도 숱하게 분질러 줬소. 야, 나는 화 많이 내고 살았소. 그런디 성, 워째 지금은 화가 안 나고 맴이 슬프요. 집 뺐기고 가족 잃은 사람들 눈물이, 우리 어리니 눈물 같고, 가령이 눈물 같고, 소부리 아재 눈물 같소. 나는 툭하면 화가 나는 존재인데, 지금은 어째 화는 안 나고 눈물만 난답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드디어 길동(윤균상)이 세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가족과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에 대한 사적인 복수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억울한 백성들 괴롭히는 이들을 응징해왔다면, 연산(김지석)의 폭주로 망가져가는 세상 앞에 그는 조금씩 공적인 소명의식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핍박받는 이들이 세상과 싸우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것에 오히려 화를 내고 보기 싫다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랬던 그가 이제 쓰러져 가는 백성들의 피를 보며 그 아픔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의 아픔인 것으로 느끼게 됐다. 그의 그릇은 세상을 품을 만큼 커졌다. 처음에 그 그릇의 크기는 가족을 담는 정도였지만 그 후 익화리 사람들을 담는 정도로 커졌고 이제는 세상을 담을 정도로 커졌다. 

<역적>은 우리에게 고전의 인물로 남아있는 ‘홍길동’을 재해석한 작품.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데 어째 그 옛 시절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권력자의 불통과 폭주로 그려지면서 그것이 어떻게 백성들의 고혈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길동이라는 애기장수라는 메시아의 등장이 마치 백성들 하나하나의 소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폐비되어 사약을 받은 어머니를 가진 불행한 과거사는 연산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연산의 주변에는 그래서 비선실세들이 넘쳐난다. 그의 아픔을 건드리고 그 고통을 촉발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이들. 연산의 폭주를 막기 위해 대간에서 나서 왕의 잘못을 고하지만, 그들을 모두 처벌하는 풍경은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권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위를 범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의 혀를 자르고 발목을 잘라내는 그 행태들을 낱낱이 기록한 행록과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송도환(안내상)을 위시해, 충원군(김정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 같은 이들이 바로 비선실세다. 그들은 왕을 위한답시고 충언을 말하지만, 사실은 권력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양반의 백성 수탈을 정당화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인물이다. 불통하고 폭주하는 왕,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비선실세들. 이러니 <역적>의 홍길동 이야기가 옛 이야기로 보일 리가 없다. 

길동을 잡아 힘줄을 끊고 뼈를 부숴 애기장수의 힘을 없애버린 연산은 그를 갖고 사람사냥 놀이를 한다. 연산은 스스로를 사냥꾼으로 그리고 길동을 그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으로 다룬다. 연산은 왕이고 길동은 한갓 도적이다. 그런데 <역적>은 그 실상이 정반대라는 걸 보여준다. 과연 누가 진짜 왕이고 누가 도적이며,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짐승인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가 도적이고,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눈 자가 짐승이 아닌가.

“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이다. 폭력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정치인이다. 난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을 써야 다스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쳤을 뿐이다.” 연산이 길동에게 하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인간을 믿지 않는 존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정치의 유일한 길을 폭력이라 여기는 이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다스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역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혁명가 홍길동, ‘역적’의 재해석이 흥미로운 까닭

“상전나리 나리께선 아내를 죽인 남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법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같은 일자무식 무지랭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겠는데 똑똑하신 웃전들께선 진정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걸 모르신단 말입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홍길동(윤균상)은 상전 김자원(박수영)에게 그렇게 묻는다. 간통했다며 아내를 살해한 정중부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그에게 복수를 한 장인 김덕형을 한성부 서윤 조정학(박은석)이 오히려 신문을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부당함을 되묻는 질문이다. 

헬조선. 남편이 아내를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세상이다. 양반은 양인을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못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대명률에도 들어있는 헬조선의 법도란다. “해서 간통한 아내는 임금을 저버린 신하를 벌주듯 남편이 벌주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자라는 것은 본시 집안에서는 아비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이지요.” 충원군 이정(김정태)은 이것이 나라가 바로 서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충원군의 그런 생각의 뒤에는 사실상 유자를 내세워 국정을 농단하는 송도환(안내상)이라는 비선실세가 존재한다. “어찌 인간에게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이 없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죠. 이런 구분이 없는 세상이란 무질서이고 무질서란 곧 뭐다? 혼란을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서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라야 하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가 이루어지면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고 이러한 이치가 이루어지면 집안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며 임금은 임금다워지고 신하는 신하다워지고 남편은 남편다워지고 아내는 아내다워지는 것입니다.”

송도환의 요설은 신분사회, 차별사회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 반상의 계급 안에서 질서가 유지되어야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결국 ‘다스린다’는 표현 안에 이미 숨겨져 있듯이 권력자들이 말하는 ‘통치의 기술’을 교묘한 유자의 논리를 통해 풀어낸 요설일 뿐이다. 

홍길동은 한성부에 억울하게 끌려간 김덕형을 구해내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전소설 속에 등장하는 홍길동이야 복면 쓰고 당장 한성부 감옥을 공격했겠지만 그러는 대신 그는 김자원에게 부탁해 연산(김지석)을 활빈정에 오게 하고는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듣게 만든다.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통해 김덕형의 딸의 죽음에 동정심을 갖게 만들기 위함이다. 

결국 홍길동의 이런 마음을 흔드는 지략으로 연산은 신하들에게 묻는다. “정중부가 아내를 죽인 것이 마땅하다 이 말인가. 진정 그대들 모두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마침 자신과 함께 수학해온 조정학이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조참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길현(심희섭)은 분연히 나서 사건의 부당함을 피력한다. 

“허나 아내 김동이 이미 죽어 참으로 남편을 배신했는지 알 수 없지 않사옵니까. 헌데 아내를 죽인 후에 그 아내가 투기하였다 간음하였다 빠져나간다면 죽은 아내의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하겠나이까. 그럼에도 한성부 서윤 조정학이 정중부의 죄상은 밝힐 생각도 하지 않고 외려 딸을 잃은 김덕형만을 신문하고 있나이다.” 길현의 이 말에 동조한 연산은 김덕형을 풀어주고 정중부의 죄를 낱낱이 밝히며 한성부 서윤 조정학을 다른 직으로 좌천시키라는 명을 내린다. 

억울하게 남편에게 맞아죽은 한 처자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이 안에는 <역적>이 재해석하고 있는 홍길동의 흥미로운 면면이 드러난다. 물론 괴력을 사용하는 홍길동의 모습이 간간히 등장하고는 있지만 <역적>은 그렇다고 홍길동은 그런 의적으로만 해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의적이라기보다는 사업가의 외피를 쓴 혁명가에 가깝다. 

그가 혁명가로 보이는 까닭은 이른바 ‘삼종지도’ 운운하며 임금과 신하가 아비와 자식이 또 남편과 아내가 차별받는 세상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큰 어르신으로도 불리고 길동이로도 불리며 또 발판이라도 불렸던 홍길동은 이러한 수직적인 계급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채수빈)에게 “여자라 하여 밥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길동이 아닌가. 

<역적>이 단순히 홍길동을 탐관오리 혼내주는 의적으로 그리지 않고 헬조선의 잘못된 시스템과 대적하는 혁명가로 그리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더 이상 탐관오리 혼내주는 의적이 보여주는 판타지가 지금의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속 시원한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그깟 탐관오리 몇을 혼내 준다한 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의 대중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적>이 그리고 있는 의식 있는 혁명가로서의 홍길동이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다.

사극은 무조건 장편? 늘어뜨리기보단 더 압축할 필요 있다

우리네 사극은 아직도 그 앞에 ‘대하’라는 수식어를 붙이길 좋아한다. 그래서 사극이라고 하면 적어도 30부작, 길게는 50부작 정도의 장편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선입견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하사극’의 시대가 여전히 유효할까. 최근 방영되었거나 방영되고 있는 사극들, 이를테면 KBS <화랑>, MBC <역적>, SBS <사임당, 빛의 일기>를 보면 사극이라고 무조건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임당, 빛의 일기(사진출처:SBS)'

종영한 <화랑>의 경우 20부작이었지만 굵직한 이야기는 실종되고 대신 인물들의 멜로와 소소한 미션들이 매회 배치되면서 기대이하의 성적으로 끝나버렸다. <화랑>이라고 하면 삼국통일을 이룬 그 인물들의 장중한 이야기가 있어야 했지만 이 사극은 화랑을 ‘꽃미남’ 아이돌처럼 해석함으로써, 애초에 하려던 신분으로 좌절된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내려던 의도마저 흐려져 버렸다. 이런 이야기라면 굳이 20부작이 필요했을까. 

30부작 <역적>은 역사에 기록된 실존인물 홍길동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지만 그 절반에 해당하는 16부 동안 길동의 아버지 아모개(김상중)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물론 이 사극이 갖는 현재의 현실을 빗댄 해석들은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주인공 홍길동의 활약과 이야기들이 생각만큼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괜찮은 기획의도를 가진 작품의 시청률이 왜 갈수록 꺾어져 8%대까지 주저앉았는가를 설명해준다. 

역시 30부작인 <사임당, 빛의 일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사극과 현대극을 뒤섞은 드라마는 벌써 17부가 방영되었지만 애초에 그리려던 사임당(이영애)의 예술혼은 아직까지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고려지를 재현해내려는 사임당의 이야기가 치열한 대결구도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애초 기획의도였던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로서의 워킹맘 사임당의 일과 사랑, 그리고 예술의 세계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는 미지수다. 

사실 30부작은 그나마 과거의 사극들이 대부분 50부작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방영되고 있는 <역적>이나 <사임당>을 두고 보면 그 30부작도 너무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회 한 가지씩의 굵직한 사건들이 전개되며 밀도 있는 드라마를 기대하는 시청자들로서는 “아직도 그 얘기야?”라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게 당연하다 여겨진다. 

지상파에 종편, 케이블까지 합쳐져 우리네 드라마 편수는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지상파가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를 빼고도 한 주에 6편을 내놓고 있고, 케이블이 월화와 금토 또는 토일 편성으로 3편을 종편은 매 주 한 편씩을 내놓고 있다. 이것만 해도 일주일에 시청자들에게 보여지는 드라마가 10편에 달한다. 

이처럼 늘어난 드라마 편수는 시청자들이 더 압축적인 드라마를 요구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괜스레 질질 끌기보다는 한 편을 봐도 몇 편을 본 것처럼 확실한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 그게 아니라면 굳이 채널을 고정시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극은 그래서 과거의 연속극의 특성에서 더 과감한 탈피를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사극이 그래야한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은 50부작이었지만 매회 빈틈이라는 걸 느끼기 어려울 만큼 압축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역적>이나 <사임당> 같은 사극은 굳이 30부작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느슨함을 보이고 있다. 이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이탈하는 시청자를 잡기는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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