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내 스타’, 허술한데 끌리는 이 드라마의 이상한 매력

금쪽같은 내 스타

이 드라마 어딘가 이상하다. ENA 월화드라마 <금쪽같은 내 스타> 이야기다. 소재와 극적 구성의 코드를 보면 어딘가 상투적이고 허술하다. 예를 들어 ‘기억 상실’이라는 코드가 그렇다. 이 코드는 시한부, 출생의 비밀처럼 옛 드라마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곤 하던 설정이 아닌가. 너무 과하거나 혹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그 코드가 들어오면 대충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거라는 걸 예상할 수도 있는 그런 코드다. 

 

그런데 <금쪽같은 내 스타>의 기억 상실 코드는 신박한 변주가 들어있다. 그건 ‘시간 순삭’ 타임리프 같은 방식으로 기억 상실이 쓰였다는 점이다. <금은방 소녀>라는 드라마로 당대를 풍미한 톱배우 임세라(장다아)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깨어나 보니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타임리프를 한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5년 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25년 전의 기억은 살아 있지만 그 간의 기억이 사라지자 마치 시간여행을 해버린 듯한 상황에 놓인다. 

 

25년의 세월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데, 과거의 반짝반짝 빛나던 임세라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고시텔에서 초라하게 늙어 있는 봉청자(엄정화)가 되어 있다(봉청자는 임세라의 본명이다). 그러니 궁금해진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당시 매니저였던 강두원(오대환)은 이제 가장 큰 연예기획사의 대표가 됐고, 늘 임세라를 질투했던 배우 고희영(이엘)은 칸느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배우가 됐다. 또 임세라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민태숙(차청화)와 스타일리스트였던 사선영(조연희)은 유명 메이크업샵과 의상실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들이 벌인 모종의 사건이 의심되는 정황이다. 

 

기억 상실 코드가 ‘시간 순삭’ 타임리프 같은 방식으로 신박하게 변주되지만, 이야기는 또 어딘가 익숙한 서사로 흘러간다. 임세라가 봉청자가 되게 된 숨겨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와, 이를 돕는 과거 임세라 시절에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형사 독고철(송승헌)과의 로맨스가 더해진다. 여전히 봉청자의 편에 서서 그녀의 재기를 돕는 민태숙과, 돌아온 봉청자에 위기감을 느끼는 고희영과 강두원 그리고 사선영의 대결구도가 세워진다. 

 

어딘가 상투적이고 익숙한 서사의 구도로 다시 회귀하지만, 기묘하게도 드라마는 봉청자라는 인물이 다시 연예계에 뛰어들어 재기해가는 그 과정을 응원하게 만든다. 재기하는 과정에서도 익숙한 구도를 깨고 나오는 기발한 변주가 들어가는데, 그것은 ‘막장드라마’를 통해 오히려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설정이다. 이른바 ‘무싸대기’를 날리는 짤이 유행처럼 퍼져나가면서 봉청자는 순식간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재기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코믹과 과장이 더해진 판타지로 현실적인 개연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미 봉청자라는 인물에 연민과 동정을 갖게 된 시청자들은 그 판타지를 유쾌하게 받아 들인다. 또한 고시텔에서 살아가는 봉청자와 그 이웃들이 보여주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대가 만드는 연대의식 같은 것들이 마치 봉청자라는 인물을 이들의 대변자처럼 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봉청자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독고철과의 로맨스도 사적인 멜로의 달달함과 더불어, 이처럼 권력자와 결탁해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착취하는 자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그래서 <금쪽같은 내 스타>는 어딘가 이상한 드라마다. 막장처럼 보이고 때론 상투적인 소재나 구도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이 인물이 잘되길 응원하게 만들면서 자꾸만 보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임세라에서 봉청자로 넘어오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잡아끈 엄정화라는 배우의 진정성과 매력이다. 이 작품은 마치 엄정화라는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봉청자라는 인물에 투영해서 허구로 그려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만큼 엄정화의 진심이 담긴 연기가 작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게 만든다. 

 

25년 세월의 직격탄을 받은 듯한 홍조 띤 얼굴로 억울한 신세를 토로하는 엄정화의 연기는 보는 이들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 힘이 이 제목부터 어딘가 촌티를 의도적으로 내고 있는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다. 또 봉청자와 더불어 엄정화를 응원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이 이상한 드라마에 엄정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사진:ENA)

‘삼매경’, 지춘성 배우가 온몸으로 그려낸 연극 같은 우리네 삶

삼매경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한 가운데 가부좌를 튼 동자승이 바위처럼 앉아있고, 다른 배우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거나 동작을 반복하면서 무대 위를 오고 간다. 처음에는 저게 무언가 싶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바람과 나무와 새들 같은 자연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저 텅 빈 무대이거나, 어딘가 천정이 새는 지하실 음습한 연습실 같아 보이던 무대가 순간 거대한 숲속으로 보이는 순간, 관객은 말 그대로 ‘삼매경’에 빠진다. 연극 <삼매경>으로 들어가기 위한 몸풀기라고나 할까. 

 

연극이 시작되면 거기 배우 지춘성이 서 있다. 그는 진짜 배우 지춘성이지만, 이 연극에서는 지춘성을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지춘성이 지춘성을 연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묘하지만, 그가 34년 전 함세덕 원작의 <동승>에서 동자승 도념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상황은 더더욱 기묘해진다. 지춘성은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 그 아이가 되어보고 싶어.” 

 

<삼매경>은 연극배우 지춘성이 34년 전 <동승>이란 작품에서 도념 역할을 맡아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그 연기가 스스로는 실패라 여겨 다시 그 연기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야기다. 지춘성은 그러니까 지춘성을 연기하면서, 지춘성이 연기했던 동자승 역할을 다시 연기해 보겠다고 하는 셈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때의 도념 연기를 곱씹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그 과거의 분신이 그를 칼로 찌른다. 그건 아마도 34년간이나 자신을 괴롭히던 완벽하지 못했던 연기에 대한 회한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른 것일 게다. 그 순간 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연극과 현실이 뒤섞이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삼매경

과거의 지춘성은 모든 것이 연기에 맞춰져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슬퍼하는 일보다 찾아온 조문객의 특이한 말투를 기억해 연기에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연기의 길은 결코 쉽지 않고, 어쩌면 이뤄지지 않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완벽하게 타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나친 자의식에 대해 비판받으며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무의 상태가 되어 캐릭터에 자신을 일치하라는 이야기는 그럴 듯 하지만 실상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결국 ‘사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으로 들어가 <동승>을 재창작하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인물들이 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면서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삼매경>은 끝없이 완벽한 연기를 열망하는 지춘성이 이를 위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연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자연물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다시 자연물이 되는 과감한 연출로 표현되고, 불가의 득도를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의 무거움이 느껴지는 언어들과 속세의 껄렁한 단어들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웃음으로 이어지다가, 끝끝내 지춘성 배우의 절절한 진심이 묻어나는 대사로 먹먹한 감동을 안긴다. 

 

그런데 도대체 <삼매경>은 왜 지춘성 배우의 이 끝내 실패로 끝나는 끝없는 완벽한 연기의 도전을 두 시간 동안 무대 위에 펼쳐 놓은 걸까. 그건 이 작품의 극 중 극인 <동승>과 맞닿아 있다. 함세덕의 희곡 <동승>은 어린 시절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재회할 날만을 기다리는 도념이라는 동자승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마침 죽은 아들의 재를 지내기 위해 절을 찾은 미망인이 도념에게 정을 느껴 입양하려 하고, 도념 역시 미망인에게 모성을 느껴 따라가려 하지만 주지는 업보를 쌓는 일이라며 이를 반대한다. 결국 도념의 열망은 미망인의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토끼를 잡는 살생까지 저지르게 되고, 주지가 이 일을 알게 되면서 입양은 좌절된다. 하지만 도념은 끝내 눈 내리는 날 어머니를 찾아 절을 떠난다. 

 

<동승>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건 불가의 해탈이라는 궁극의 경지와 배치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세에 대한 욕망과 그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도념이 새 어머니를 갈구하는 모습은, 인간이 열반하지 못하고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탄생하기를 원하는 환생의 욕망을 그려낸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어머니를 갖고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원하지만 그 삶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욕망과 열망에 사로잡힌 삶이니 말이다. 

삼매경

<동승>을 다시 완벽하게 연기하고픈 지춘성 배우의 열망은 바로 그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배우는 마치 환생하듯 끝없이 무대에 오르고 같은 역할을 반복하지만 완벽한 그 인물이 되는 데는 늘 실패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헛된 미완성의 갈망을 멈추는 것이 저 주지가 동자승에게 말하듯 현명한 방법일 수 있지만,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지춘성 배우는 그래서 연기의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끝까지 연극무대로 환생의 삶을 반복해 왔던 그 아름다운 미완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마지막 지춘성 배우가 관객들에게 건네는 말은 그래서 똑같이 저마다의 무대 위에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끝없이 미완성인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위로를 담았다. “한겨울, 다람쥐가 먹으려고 등걸 구멍에다 모아 둔 잣 마냥, 한 줌 밖에 안되는 저의 인생을 여러분들은 목격하셨습니다. 그저 연극밖에 몰랐던 아둔한 작은 배우가 이 극장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어. 언젠가 긴긴밤 잠이 안 오실 때 오늘 보신 장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깨무십시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동자승 도념과 지춘성 배우가 하나가 된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안녕,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그 장면은 지춘성 배우가 무대를 떠나는 것이지만, 저 어린 동자승이 절을 떠나는 장면처럼 오버랩된다. 미완성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이랄까. 그 순간 깊은 <삼매경>에서 막 깨어난 듯 무대에서 관객들은 깨어난다. 이제 그들은 극장을 벗어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무대로 들어갈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진:국립극단)

배우의 연기와 우리의 삶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 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의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유어 아너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써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와 스크린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 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니!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메서드 연기의 대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 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2009년 방영된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였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인

물론 연극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바뀌면서 연기의 방식도 다양해졌다. 메서드 연기가 국룰로 여겨지던 시대는 연극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배우들에게 메서드 연기는 당연했다. 하지만 매번 찍은 걸 모니터로 확인해 가며 보다 효과적인 연기를 찾아나가는 요즘 같은 영상의 시대에 연기는 본인이 빠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효과도 중요하게 됐다. 김명민 스스로도 최근 들어 너무 지나치게 메서드를 고집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며 이를 덜어내는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메소드 연기든 그렇지 않든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인플루언서, 유튜버의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 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돈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아나간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2024.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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