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캔들’, 달콤 코믹한 로맨틱 코미디에 얹어진 묵직한 주제의식

일타 스캔들

“뭐 하나만 질문 드려도 돼요? 쌤 말씀대로 쌤이 저 30분만 봐주셔도 5천만 원인 셈인데, 그런데 저 왜 봐주시는 거예요? 저희 엄마 도시락은 만원도 채 안되는데.” tvN 토일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남행선(전도연)의 딸 남해이(노윤서)는 일타강사 최치열(정경호)이 자신에게 굳이 1대1 과외를 해주는 이유를 묻는다. 이른바 ‘1조원의 남자’로 불리는 최치열이 남해이의 과외를 해주며 얻는 건 남행선이 챙겨주는 만원도 채 안되는 도시락이 전부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하지만 최치열이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답변은 의외로 큰 울림이 있다. “계산 빠르네. 금방 늘겠어. 아, 가격과 가치는 다른 거잖아. 나는 그 도시락에 그만큼의 가치를 부여한 거고. 너도 내 시간을 그렇게 만들어 주길 바라. 나는 무조건 최선 다할 테니까 너는 5천만 원 이상의 결과를 끌어내 보라고.” 가격과 가치. 일타 수학강사다운 답변이지만, 거기에는 <일타스캔들>이라는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는 작품이 갖고 있는 진심이 어른거린다. 

 

그건 모든 게 가격으로 환산되고 그래서 비싼 만큼 가치가 있을 거라 착각되는 세상이지만, 실제 가치란 가격만으로는 매겨질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메시지다. 1조원의 경제적 가치를 움직이는 최치열이지만, 그에게 더 큰 가치는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것과 수면제 없이 푹 잘 수 있는 일이다. 일에 치여 살면서 그는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섭식장애와 수면장애를 갖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과거사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한 학생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는 학원을 홍보하는 광고 속 인물처럼 말끔해 보이고, 어떻게든 그 수업을 듣기 위해 줄을 서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추앙받는 스타지만, 그러한 화려함은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진짜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우연히 먹게 된 남행선의 도시락을 먹을 때다. 

 

그런데 도대체 남행선의 도시락에 무엇이 들었길래 1조원의 남자 최치열이 이러한 가치를 부여한 걸까. 최치열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남행선의 음식은 사실 최치열이 젊은 시절 혼자 임용고시 준비를 할 때 매일 대놓고 먹었던 식당의 그 맛을 갖고 있다. 그 식당 사장이 다름 아닌 남행선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고로 사망하고 언니가 맡긴 조카를 책임지기 위해 남행선은 핸드볼 선수의 길을 접고 이 반찬가게를 연다. 그 맛이 그대로 이어졌고, 최치열은 바로 그 시절의 맛을 부지불식간에 떠올리며 그 음식을 찾게 된 것. 그러니 그 가치는 최치열 말대로 가격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남행선이 떠맡게 된 반찬가게를 그저 월 매출 얼마로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도망간 언니 대신 떠맡게 된 조카를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딸로서 키워왔다. 또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동생 또한 부양해왔다. 자기 인생은 저 뒤편으로 밀어버리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살아온 남행선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 반찬가게를 어찌 돈 몇 푼의 가격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일타스캔들>이 왜 그토록 서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길가 어디서든 발견하는 작은 가게 하나를 그저 월매출 얼마 정도의 가격으로 결코 가치매길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의 진심이 거기에는 녹아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건 이러한 작품의 진심을 연기를 통해 끌어내고 있는 정경호와 전도연의 가치다. 전도연이야 워낙 연기 베테랑이라는 걸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그는 <일타스캔들>이라는 작품 속에서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로맨틱 코미디라는 가벼운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결코 그렇게 가치매겨질 수 없다는 걸 때론 웃기고,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짠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경호 역시 매 작품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지만, <일타스캔들>은 그 완숙미가 느껴질 정도로 철저히 준비된 배우의 면면을 보여준다. 등장부터 진짜 일타 강사의 면면을 고스란히 입은 모습을 보여줘 유쾌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때론 보듬어주고픈 가녀림까지 최치열이라는 인물 속에 다양한 결을 부여했다. 

 

전도연도 정경호도 강사로 치면 ‘일타강사’쯤 되는 ‘일타 배우들’이라는 건 이제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들의 연기가 그저 화려함에 머물지 않고 시청자들의 가슴을 건드리고 뭉클하게도 만들어내는 진짜 이유는 그 연기에 ‘진심’의 가치를 담고 있어서다. 가격 같은 속물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작품이 하려는 메시지 같은 진짜 가치를 전하는 모습이 있어 이들의 연기가 빛이 난다. (사진:tvN)

‘일타 스캔들’, 공감 가는 로맨틱 코미디 만든 연출의 비결

일타스캔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때론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 혹은 지나치는 역할조차 연기 공백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조연들이 ‘미친 존재감’을 보이는 건 이제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거의 단역처럼 보이는 이들조차 진짜 현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착 달라붙는 연기를 보여줄 때 시청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드라마에 보다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디테일한 밑그림이 그 위에 전개되는 사건들에도 보다 리얼한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tvN 토일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바로 그런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중심은 역시 타이틀 롤인 전직 핸드볼 선수였다가 지금은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남행선(전도연)과 자칭 타칭 ‘1조원의 사나이’로 불리는 수학 일타강가 최치열(정경호)이다. 자문 관련한 논란과 잡음들이 생겨났지만, 정경호의 최치열이라는 일타강사 연기는 시청자들을 드라마에 빠져들게 만드는 공감 가는 몰입감을 선사했다. 

 

유명한 일타 강사들이 하는 강의 스타일을 철저히 분석한 듯한 대본도 그렇지만, 특유의 끼가 넘치는 강의 과정들을 디테일하게 보여준 점이 먼저 리얼한 공감을 만들었다. 게다가 정경호는 지나치게 넘치는 프라이드와 더불어 어딘가 빈 구석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면을 통해, 본인은 진지하지만 보는 이들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코미디 연기를 더해줬다. <일타 스캔들>이 강남 학원가를 둘러싼 사교육 문제 등을 풍자하는 다소 무거운 메시지를 갖고 있지만, 그 결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걸 정경호는 첫 회 만에 분명히 보여줬다.

 

여기에 전도연의 연기가 더해졌으니 더할 나위가 없어졌다. 물론 <프라하의 연인>처럼 전도연 역사 로맨틱 코미디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배우지만 그간 영화에 주력하면서 다소 무거운 연기들을 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반찬 가게를 하며 조카 남해이(노윤서)를 딸처럼 키운 남행선이라는 인물의 억척스럽지만 따뜻하고 그래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최치열과의 달달하고 코믹한 연기가 반갑기 그지없다. 

 

남행선의 딸 같은 조카 남해이 역할의 노윤서는 <우리들의 블루스>로 익숙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똑 부러지는 자기주도형 고등학생 역할을 선보인다. 이모지만 엄마 같은 남행선이 짊어지고 있는 버거운 짐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래서 자신은 짐이 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인물이다. 이제 신인이지만 연달아 괜찮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타 스캔들>이 웰메이드라고 여겨지는 대목은 주변 인물 하나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 대목에서다. 남행선의 절친 김영주 역할의 이봉련은 대사 하나하나를 찰떡같은 연기로 표현해 시청자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유쾌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최치열의 매니저이자 기획자인 지동희 역할의 신재하도 일에 있어서는 적당히 경직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치 형 동생 관계 같은 끈끈함을 잘 표현하고 있고, 저마다 개성이 톡톡 튀는 학부모를 연기하는 장영남, 김선영, 황보라의 찰진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는 “엄마가 진짜 너무하셨다. 조금만 밀어주면 전교 1등 할 애를 어떻게 이렇게 방치를...” 같은 현실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사를 치는 학원 실장이나, 이미 학원에서 선행을 해 자신의 수업은 잘 듣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그 현실의 답답함을 드러내는 전종렬(김다흰) 같은 담임선생님은 물론이고 그런 선생님의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우리도 경각심이 필요하긴 해. 학원강사들만큼 연구 안 하잖아요, 솔직히.”라는 대사를 툭 던지는 다른 선생님까지 빈틈이 없다. 

 

사실 이처럼 주조연은 물론이고 그보다 작은 역할들까지 리얼한 연기가 나올 수 있는 건 배우들의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공감 가는 대사를 채워 넣는 대본과 더불어 그 상황에 대한 디테일을 파고들어 연기지도를 하는 연출자의 공이 절대적이다. 그 하나하나의 공들임이 똑같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작품의 질감을 달리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일타 스캔들>은 그래서 다소 가볍게 웃고 달달해하며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면서, 그 이면에 깔린 풍자적 요소들까지 공감대로 끌고 갈 수 있는 드라마가 되고 있다. 웰메이드란 이런 데 쓰는 말이다. (사진:tvN)

소지섭, 김윤진, 나나가 ‘자백’을 통해 보여준 것들

자백

시작과 함께 부감으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산세가 마치 앞으로 이 영화가 펼쳐놓을 만만찮은 이야기를 예감케 한다. 서로 겹쳐져 있는 산들은 이야기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해준다. 그 산세들이 그림으로 변하고 그려진 그림 위에 붓칠이 계속 채워지는 오프닝 신도 마찬가지다. <자백>은 그런 영화다. 진실인 것처럼 보이던 사건이 한 꺼풀을 벗겨내면 거짓으로 바뀌고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 그래서 이 시작점에 시선이 포획되면 끝점까지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운 극강의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유민호(소지섭)는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에 돈 가방을 챙겨들고 호텔을 찾아가고, 거기서 엉뚱하게도 불륜 상대인 김세희(나나)를 마주한다. 세희 역시 협박을 받았다 생각한 민호는 함께 호텔에서 그 인물을 기다리다 경찰차들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방을 빠져나오려 한다. 그 때 누군가 민호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고 깨어나 보니 세희는 살해됐다. 문도 창문도 모두 잠겨 있는 호텔방. 그래서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바로 민호가 된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호는 자신이 간간히 찾던 별장에서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와 함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을 고민한다. 

 

변호에 있어서 ‘창의력’과 ‘논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양신애는 민호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고, 민호는 세희와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서 지냈던 날 겪었던 사건을 들려준다. 돌아오는 길에 고라니를 피하다 발생한 사고. 차끼리의 충돌도 없었지만 마주 오던 차량은 피하려다 사고가 나고 운전자는 사망한다. 불륜이 탄로 날까 두려운 나머지 그들은 이를 은폐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민호의 진술일 뿐,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양신애는 민호의 진술에 담긴 허점을 논리적으로 파고들고 또 다른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그 시나리오는 민호가 처한 밀실살인에서 그를 용의선상에서 빼내줄 수 있는 이야기다. 즉 <자백>은 이처럼 벌어진 두 개의 사건(밀실살인과 사고사체유기)을 두고 변호사와 용의자가 진실 공방과 더불어 변론을 위한 시나리오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어떤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시나리오에 의한 진술인가에 따라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새로운 가해자가 용의자로 세워지는 반전의 반전을 보여준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진술과 관점에 따라 사건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전개되는 서사를 보여주는 것. 앞서 시작점에 보여준 산세와 덧칠되는 그림처럼 영화는 이렇게 중첩되고 바뀌어가는 서사의 변화 속으로 관객들을 밀어 넣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 관객은 이 논리와 이야기로 꾸며진 산 속 깊숙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건, 배우들이다. 어떤 논리의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배우들은 그 캐릭터의 성격도 변화한다. 즉 피해자였던 인물이 어떤 진술 속에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계속 전개를 바꿔나가는 영화는 마치 배우들이 얼마나 다양한 결의 연기를 하고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준다. 누명을 쓴 인물로 그려질 때의 소지섭은 그 억울함이 느껴지지만 다른 서사 속에서 가해자로 세워지는 소지섭에게서는 광기가 느껴진다. 유혹적이고 대담해 보였던 나나는 한없이 가녀린 존재로 변화하기도 하고, 김윤진은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하면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는 이중적인 면면을 소화한다. 

 

그래서 진술에 따라 변화하는 그 스토리의 미로 속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그 과정은,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소지섭이나 나나, 김윤진 같은 배우들이 가진 여러 연기의 결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지금껏 봐왔던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연기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런닝타임 10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작품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배우들의 매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사진:영화'자백')

‘안나’, 수지의 천연덕스런 거짓 연기가 좋다

안나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건 다 해요.”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는 유미(수지)의 다소 역설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하다. 이 내레이션이 역설적이라는 건 바로 이어지는 차량 사고(혹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거대한 기둥을 받아버린 차가 위태롭게 연기를 뿜어대고 힘겹게 열린 문에서 유미가 피를 흘린 채 내린다. 유미는 스카프를 풀어 백에 얹고 불을 붙여 차량 안으로 집어던진 채 걸어간다. 그러면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이 첫 시퀀스는 앞으로 <안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를 말해준다. 항상 마음먹은 건 다 한다는 유미의 말은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한다는 의미이고,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건 그걸 하기 위해 유미가 선택한 것이 ‘거짓’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는 어쩌다 거짓 삶을 선택했다. 자신이 아닌 ‘안나’라는 이름의 삶을.

 

리플리 증후군. 미국의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유래된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로 잘 알려져 있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재해석된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안나>는 바로 이 리플리 증후군을 보여주는 유미라는 인물이 왜 그런 거짓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평범한 양복점을 하는 아버지와 농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가난해 할 수 있는 게 없던 유미. 그는 자신의 부모 이야기부터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연애를 하다 들켜 혼자 서울로 오게 되고,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대학 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진다. 하지만 힘들게 고생해서 딸 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버지에게 유미는 거짓말을 한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숙집에조차 그가 대학에 들어갔다고 알려지고, 남몰래 재수 준비를 하던 차에 같은 학교 선배 언니가 유미를 챙겨주면서 그 학교 동아리에 들어가고 유미의 거짓 대학생활도 시작된다. 그나마 자신의 유일한 진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던 부모와도 유미는 점점 멀어진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했고, 농아인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돼서다. 유미의 거짓 삶은 더 과감해진다.

 

남자친구를 속여 같이 미국에 가려 하다 정체가 들통 나 모든 게 무산되고, ‘학력무관’ 하다는 한 갤러리에 취직한 유미는 그 곳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견뎌내며 하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뭐든 원하는 대로 다 누리고 살아가는 현주(정은채)의 삶에 대한 동경과 분노를 느끼던 유미는 결국 그의 돈과 여권, 학력증명서 같은 걸 훔쳐 달아난다. 현주의 여권에 적힌 ‘안나’라는 이름으로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이후 그는 잘 나가는 사업가를 속여 결혼까지 한다. 

 

어떻게 거짓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질까 싶지만, 가짜로 꾸며진 학력이나 예쁘장한 얼굴 같은 외적인 것에 쉽게 휘둘리는 스펙사회는 안나의 거짓된 삶에 날개를 달아준다. <안나>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유미에서 안나가 되는 거짓 삶을 선택하는 그 과정에 그저 범죄라 여겨지지 않고 그럴만하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들. 가진 자들은 뭐 하나 노력하지도 않고 뭐든 다 얻어가는 데, 없는 이들은 하고 싶어도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껴지는 절망감. 

 

갤러리의 대표 이작가(오만석)은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파 하루만 쉴 수 있겠냐고 묻는 유미에게 모멸감이 느껴지는 말을 쏟아낸다. “니들 문제가 뭔지 알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래? 평생!” 하지만 그건 유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려 했고 똑똑했다. 그리고 남들 하는 거 하고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태생이 달라 처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미가 거짓으로라도 안나의 삶을 살고픈 마음은 시청자들에게도 공감을 준다.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어쩌면 그 많은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콘텐츠들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서사지만 <안나>가 흥미진진해지는 건, 차분하게 이 유미라는 인물이 안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그려내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켜서다. 그리고 이것을 200% 공감시키는 건 다름 아닌 이 문제적 인물을 연기하는 수지의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박살내는 색다른 연기 덕분이다. 한때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며 그 틀에 갇혀있던 수지는 이제 그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중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지가 이렇게 발칙한 매력이 있었던가. 마치 이런 유미에서 안나로 넘어가는 페르소나가 자신에게 절실하기라도 했던 듯, 수지는 천역덕스럽게 거짓 삶을 살아가는 연기를 해낸다. 그리고 이런 거짓을 연기하는 연기는 수지라는 배우가 껍질 하나를 벗겨내고 나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꼭꼭 숨겨뒀던 욕망이 결국 터져 나와, 그저 청순하고 순수한 얼굴로만 비춰지던 유미라는 껍질을 깨고 안나라는 인물을 창출해낼 때, 수지는 드디어 자신의 배우라는 정체성을 찾아낸 듯하다. 이제 마음먹는 연기는 다 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수지의 변신이 반갑다.(사진: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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