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로 돌아온 한석규, 그 인간적인 얼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정원(한석규)은 그렇게 조용히 다림(심은하)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어려서 하나 둘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운동장에 앉아 모두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는 걸 묵묵히 받아들이던 정원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담담한 체념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다림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린다. 더 그와 함께 웃고, 떠들고, 살고 싶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림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게 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떠난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관 앞에 전시된 액자 속에서 수줍게 웃는 다림의 사진으로. 눈내린 어느 날 다림은 그 사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다림이 정원과의 기억을 그 액자 속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한석규라는 배우는 이 영화로 여전히 기억된다. 너무나 평범하고 수수하지만 다정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 뒤편에는 죽음 같은 무거운 비극이 숨겨져 있어 보다보면 어딘가 마음이 촉촉해지는 그런 배우가 바로 한석규다. 특히 이런 따뜻한 웃음 속에 담긴 어딘가 쓸쓸한 삶의 비의 같은 것들은, 밝고 뜨겁던 여름을 지나 이제 슬슬 스산해져가는 날씨에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닮았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더욱 그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네 삶이 조금 스산해도 괜찮아. 서로 따뜻하게 웃어주는 우리가 있잖아. 

 

그가 최근 주연을 맡은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 역시 한석규 특유의 비감이 효과를 발휘하는 캐릭터다. 그는 범죄현장을 분석하는 일로 이력이 난 베테랑 프로파일러다. 그런데 그의 딸 하빈(채원빈)이 자꾸만 수상하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는 하빈에 대한 의심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캠핑을 갔다가 함께 산에 들어간 어린 동생이 절벽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됐을 때 하빈은 피투성이였다. 가족이면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아내 윤지수(오연수)와 달리 그는 프로파일러로서 하빈을 의심한다. 혹 어린 동생을 그가 죽인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점점 가족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고, 결국 이혼한 아내가 자살하게 되면서 장태수와 그의 딸 하빈의 관계는 더 냉담해진다. 또다시 벌어진 살인사건 속에서 자꾸만 하빈의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장태수는 더더욱 괴로워한다. 진실을 향해 나가는 길이 그에게는 가시밭길이다. 어쩌면 딸이 살인자라는 걸 자기 손으로 밝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사건만큼 그 안에서 겪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중요한 작품이다. 한석규는 바로 이 장태수라는 인물이 가진 감정들을 고스란히 시청자들이 빠져들게 해주는 연기를 선보인다. 주름진 얼굴이 잔뜩 찡그러진 채 화면 가득 음영을 담아 전해질 때, 시청자들은 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어떻게든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그를 미치게 만드는 의심(그것도 가족에 대한 의심이다)을 끝내주기를 시청자들은 바라게 된다. 부디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원리에 대해 쓴 ‘시학’에서 비극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한석규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딸을 의심하는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의 비의까지를 담아내는 깊이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과연 우리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 그것이다. 장태수가 처한 비극을 한석규는 이 5단계 감정들을 끄집어내 표현한다. 때론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때론 타협하고 결국 절망 끝에 우울에 빠지고 수용하는 그런 감정들이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한석규를 영화계에서는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80년대의 페르소나가 안성기라면 90년대는 바로 그가 우리 영화의 곳곳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던 얼굴이라는 뜻이다. 보편적인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래서 그는 ‘은행나무 침대’ 같은 사극으로, ‘닥터 봉’ 같은 로맨틱 코미디로, ‘초록물고기’나 ‘넘버3’ 같은 사회극적 요소가 강력한 장르물로, 또 ‘쉬리’ 같은 액션에서도 모두 작품에 잘 스며드는 연기를 선보이며 90년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은 최근에는 드라마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뿌리깊은 나무’, ‘비밀의 문’ 같은 사극은 물론이고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작품의 김사부 역할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특히 무려 시즌3까지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나 왓챠에서 방영됐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같은 작품을 통해 특유의 비감을 잘 표현해내는 저력을 선보였다. 어딘지 쓸쓸하지만 그 삶의 비극을 받아들인 자의 밝음이 담긴 비감이 그것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암 투병을 해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아내를 위해 특별한 레시피를 찾고 준비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한석규는 바로 그 남편 역할을 맡았다. 점점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단 한 숟갈이라도 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애쓰는 이 인물에서도 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가 겹쳐진다. 결국은 겨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이를 담담히 맞이하는 자의 쓸쓸함 같은 것이랄까. 하지만 그 쓸쓸함이 지나고 나면 다시 삶이 만발하는 봄이 올거라는 걸 그 다정함과 따뜻함으로 전해주는 배우. 스산한 가을이 오면 그가 떠오르는 이유다.(글:국방일보, 사진:MBC)

‘사랑이라 말해요’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라 밀해요

“세상 외로워 보이고 세상 심심해 보이는 그 등짝이 제일 별로라고. 겉만 멀쩡하면 뭐해? 그런 축축한 등짝을 달고 사는데. 미련해 보여서 싫어.”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이라 말해요>에서 우주(이성경)는 동진(김영광)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애증이 담겨있다. 그건 다름 아닌 ‘불쌍하다’는 이야기지만, 우주는 애써 그게 ‘별로’이고 ‘싫다’고 한다. 

 

이 복합적인 감정은 우주가 동진에게 접근한 이유에서부터 비롯된다. 우주가 동진의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내연녀였던 마희자(남기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희자는 우주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연녀 마희자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는 화를 속으로 삭이다 암에 걸렸다. 겨우 언니와 동생과 함께 버텨가며 살았지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들이 살던 집조차 마희자가 빼앗아버린다. 우주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지경에 이른다.   

 

“매일 매 순간 매 초마다 생각했어. 내 주제에 무슨 복수냐. 관두자. 참는 게 남는 거다. 근데 이거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엄마가 입에 달고 산 말이거든? 나는 여전히 그 때 우리 엄마가 그 아줌마 머리채라도 잡았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럼 적어도 암은 안 걸렸을 거 같아. 그래서 난 뭐라도 해야겠다고. 안 그럼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그런데 그렇게 복수하기 위해 동진의 회사에 들어온 우주는 가까이서 이 남자를 들여다보며 연민을 느낀다. 지독히도 당하고 아프게만 살아가는 사람인데 뭐 하나 아프다고도 말하지 않고 항변조차 않는 남자. 그의 주변에는 배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7년 만났던 애인이 배신했고, 살뜰하게 자신이 가정사까지 일일이 챙겨줬던 거래처 본부장이 배신을 했으며, 직원마저 회사를 망하게 하기 위해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배신을 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 배신의 상처 앞에 이렇다 할 말 한 마디를 토로하지 않는다. 애인이 배신했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고, 배신한 거래처 본부장을 찾아가 “술 적게 드시고 건강 챙기라”고 말한다. 직원의 배신을 알고도 그는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다. 라이벌업체의 신대표(신문성)가 그 배후인 걸 알고 그 사실을 드러내면 또 다른 직원에게 접근할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뭐라 항변도 하지 않고 늘 당하기만 하는 그가 우주는 몹시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혼자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힘겹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눈에 밟히고, 비틀대다 차가 달려와도 마치 그대로 죽고 싶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애써 끌어당겨 구해낸다. 그러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우주는 끝없이 대놓고 동진에게 속에 있는 날이 선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자 참다못한 동진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근데요, 그렇게 매번 속에 있는 말 다 하고 살면 편해요? 심우주씨 눈엔 다른 사람들이 미련해서 참는 거 같은가 본데, 속에 있는 말 다 해버리면 실시간으로 내 말에 상처받는 얼굴들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게 참는 거보다 더 고역이라서 안간힘 쓰는 사람도 있어요.” 동진의 그 말은 우주를 주춤하게 만든다.  

 

<사랑이라 말해요>에서 우주와 동진의 관계는 결코 사랑처럼 시작하지 않는다. 아니 복수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복수의 마음은 우주가 동진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누그러지고 어떤 지점에서는 지독히도 상처받은 이들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만든다. 한없이 저마다의 세상에서 눈물을 삼키며 버텨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지치고 지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솟아오르는 건 그래서다. 그 눈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도 아파? 나도 그래. 

 

우주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고, 정반대로 동진은 뭐라도 하면 누군가 상처를 입는 걸 봐야하는 걸 견디지 못해 아무 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상반되어 보이지만, 이 두 청춘의 공통점은 그래서 그 참혹한 현실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모들 사이의 관계로 들여다보면 결코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두 사람이, 차라리 잘 됐으면, 그 아픔을 서로가 보듬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김영광은 <썸바디>의 그 살벌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한없이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동진을 뒷모습마저 공감하게 만들고, 이성경은 그저 밝기만한 청춘의 이미지를 탈피해 한없이 텅 빈 슬픈 눈빛으로 톡톡 쏘아대는 상반된 모습을 통해 이 복합적인 감정의 인물을 놀라울 정도로 잘 소화해내고 있다. 여기에 밑바닥을 긁는 주인공들의 축축함을 순식간에 말려주는 신스틸러 성준과 김예원, 전석호의 연기가 더해져 <사랑이라 말해요>는 균형 잡힌 드라마가 됐다.   

 

그래서 <사랑이라 말해요>가 말하는 사랑이란 뭘까. 어른들에 의해 꼬이고 꼬인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래서 참 많은 설명과 설득이 필요한 관계지만, 둘 다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봐도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감이 느껴지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떤 것. 그걸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 말하고 있다. (사진:디즈니+)

'좀비탐정', 코미디지만 웃을 때마다 느껴지는 짠내의 정체

 

이렇게 웃기는 좀비가 다 있나. 아마도 KBS 새 월화드라마 <좀비탐정>을 본 시청자라면 그간 좀비 장르들과는 너무나 다른 좀비에 적이 당황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K-좀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네 좀비 장르물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현재, <좀비탐정>의 좀비(최진혁)는 무섭다기보다는 우습다.

 

어떻게 누군가에 의해 죽게 됐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깨어난 좀비는 <부산행>이나 <#살아있다> 그리고 <킹덤> 등에 등장하는 좀비들처럼 활기차지가(?) 않다. 빨리 가려고 해도 느릿느릿 몸이 굼뜨고, 돌을 던지려 해도 힘이 없다. 배가 너무나 고파 결국 혼절하는 상황에 이르러야 눈이 빨개지고 깨어나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죽어있는 동물들을 발견한다.

 

이러니 요즘 좀비라면 달리는 건 기본이요, 떼로 몰려다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런 좀비와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좀비는 자신의 존재와는 어울리지 않게 인간에 대한 식욕(?)을 절제하려 한다. 물론 인간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다시지만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라 여긴다. 능력도 인간 이하인데다 어울리지 않는 윤리관(?)까지 갖고 있으니 좀비는 이 살풍경한 인간세상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좀비가 인간처럼 행동하기 위해 일 년 간 발음교정과 젓가락질 그리고 걷는 연습을 피나게 하는 모습은 '예능 드라마'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빵 터지는 웃음을 준다. 특히 발음교정 훈련을 통해 말하는 게 익숙해진 좀비가 랩을 하는 장면은 최진혁의 망가지기로 작정한 듯한 연기가 더해져 큰 웃음을 준다.

 

우연히 한 탐정의 살해 장면을 목격하고, 마을로 내려가 그의 탐정 사무실에서 생활하게 된 좀비가 만나게 되는 우리네 세상의 풍경들. 버텨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코 묻은 돈까지 벌려 애쓰는 좀비의 모습은 우습지만 짠한 블랙코미디를 보여준다. 인간을 위협하던 좀비가 이제는 인간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된 것. 흔한 좀비 장르 속 좀비와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켜 좀비보다 더 무서운 살풍경한 인간 세상을 그려보겠다는 게 이 블랙코미디가 취한 흥미로운 자세다.

 

최근 들어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새로운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레거시 미디어들이 갖는 위기감은 만만찮다. KBS 드라마가 주말드라마를 빼고는 점점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역시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런 플랫폼들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토종 OTT 웨이브나, 이제 OTT의 등장으로 트렌드가 지나가고 있는 IPTV도 마찬가지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KBS와 더불어 웨이브 그리고 SK브로드밴드가 공동으로 제작에 투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과연 <좀비탐정>은 침체되어 있는 KBS 드라마를 살려낼 수 있을까. 이 드라마 속 좀비의 고군분투가 마치 있기는 하지만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는 KBS 드라마를 닮았다. 물론 예능 드라마라는 틀 위에 좀비 장르와 블랙코미디, 수사물, 어쩌면 멜로까지 퓨전으로 엮어 놓은데다 B급 코드를 담은 작품이라 KBS라는 다소 보수적인 채널에 어울릴까 싶은 면은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시청률은 3%(닐슨 코리아)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적어도 <좀비탐정>의 색다른 시도의 가치만큼은 평가받아 마땅하겠지만.(사진:KBS)

'개훌륭' 강형욱이 연민보다 진짜 사랑을 주라는 건

 

"유기견 출신? 맞아요. 유기견 출신이야. 그럼 뭐 어쩌라고. 어떡하라고. 근데 여기 온 이상 유기견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보호자님이 그렇게 대우를 해주고 대접을 해줘야 되거든요. 근데 얘보다 보호자가 더 유기견에 빠져있어요. 그렇다보니 이 친구는 지긋지긋한 거예요."

 

KBS <개는 훌륭하다>에서 강형욱은 유기됐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랑이가 입양되어 작은 자극에도 끊임없이 짖고, 외부인을 경계하며 보호자까지 피가 날 정도로 무는 공격성을 보이는 이유를 차근차근 짚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보호자가 단호할 때는 단호하게 교육을 했어야 했지만 유기견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너무나 짖는 바람에 쏟아지는 민원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이사를 하기도 했다는 보호자는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전기충격 짖음방지기를 착용시키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법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짖음방지기. 직접 그걸 목에 착용해 봤다는 강형욱은 엄청 아프다며 자칫 풀지 않고 며칠을 놔두면 목에 구멍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이에게 물린 자국은 보기만 해도 심각해 보였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 커서 그걸 빼앗으려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은 물기도 한다는 것. 그런데 강형욱은 자신의 통제에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사랑이를 보며 이런 반응은 맞은 개들에게서 나오는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보호자는 말했다. 사랑이가 보호자의 얼굴을 무는 장면을 보게 된 남편이 너무 분노해 사랑이를 때렸다는 것. 그 후로 남편의 작은 움직임에도 사랑이는 깜짝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사실 푸들이 이런 공격성과 극도의 예민함 그리고 물고 흔들기 까지 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게 아니었다. 보호자는 사랑이가 처음 왔을 때 너무나 겁에 질려 있는 모습에 학대를 당했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 게다. 사랑이에 대해 좀더 엄격하게 교육을 하지 못했던 건.

 

"그만 좀 하라고. 나 이제 유기견 아닌데 왜 자꾸 유기견이라고 하냐고. 아니 뭐 그럼 아직도 유기견이야? 나 이 집에 입양했다며? 유기견이야? 뭐야 그러면 언제 파양되나 나? 파양할 거야 나?" 강형욱은 사랑이의 입장이 되어 그 목소리를 보호자에게 대신 들려주었다. 유기견이라는 생각을 사랑이는 떨쳐 버리고 싶은데 정작 보호자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처럼 대해주고 아닌 건 아니라고도 하고 해야죠. 내가 주고 싶은 거를 지금 안주면 돼요. 만지고 싶은 걸 안 만지면 되고 모질게도 가르치고. 오지 마. 나 혼자 있고 싶어. 나 건들지 마. 너 저기 떨어져 있어. 이런 걸 안 가르쳐주면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마음으로 이걸(짖음 방지기) 쓰면 어떡해요. 이걸 쓰기 전에... 이렇게 모진 행동은 없잖아요." 결국 진짜 사랑이 아닌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였다.

 

강형욱의 이야기는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진짜 사랑인가를 일깨워주었다. 보통은 도에 넘치는 사랑을 주고 그래서 제대로 된 사회화나 교육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보호자와 반려견만 사는 세상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아파트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회화 교육은 함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애정만 주는 건 진짜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사랑이의 경우는 강형욱의 말대로 보호자가 애정을 조절하지 못해 생긴 문제를 사랑이가 대신 감당하는 상황이었다.

 

사랑이를 대변하는 강형욱의 이야기에 보호자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사랑이는 저한테 왔으니까 이제 유기견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아 얘는 내 강아지지 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엄청 많이 부끄러웠어요. 사랑이를 조금 포기하려 했던 마음이 부끄럽더라고요." 유기견이니 더 애틋하고 그래서 사랑만 주면 다 된다? 그게 착각에 불과하다고 강형욱은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사는 법을 알려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랑이의 행동 교정 교육을 마친 후 강형욱은 짖음방지기를 어떻게 할 거냐고 보호자에게 물었다. "쓰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강형욱은 그걸 자신이 사가겠다고 했다. 다시는 이런 좋지 않은 선택들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며.(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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