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사극 속 카리스마 이양이 어려운 이유

‘이산’이 시작한 지 벌써 42회가 지났다. 사실상 연장이 확정된 상태라 앞으로 20여 회 이상이 더 남았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3분의 2를 이산이 양위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그리고 있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정조 즉위 당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데다, 이들이 한 업적 또한 상당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숱한 드라마적인 이야기들이 나올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이산’이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구조는 ‘암살위기-극적모면’이라는 단순구조로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가지고 ‘이병훈 PD식 사극’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할 것이다. ‘이병훈 PD식 사극’이란 ‘허준’과 ‘대장금’을 통해 반복되어 왔듯이, 무한반복되는 미션과 미션해결과정을 통한 성장드라마이다. 여기에 반드시 들어있는 것은 주인공의 선한 세계와 그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라는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을 통한 스테이지 해결방식의 구조는 적어도 50여 회를 끌고 가야 하는 대하사극에 있어 보다 압축된 스토리를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이 게임적인 미션구조는 말 그대로의 게임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이산은 얼마나 성장했나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중독성은 나무랄 것이 못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기꺼이 빠져드는 중독성에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그것은 스토리가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미션이 이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중독적이고 관성적인 시청을 끌기 위해 인위적으로 엮어진 느낌을 받을 때이다. 이 때가 되면 이야기는 성장하지 않고 패턴화되면서 똑같은 상황만을 반복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려 재미를 반감시키게 된다. 이것이 성장드라마를 추구하는 퓨전사극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주인공이 역경을 하나하나 헤쳐 나와 마치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40여 회가 흐르는 동안 이산(이서진)이 얼마만큼 성장했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산은 사실상 자신이 직접 해결한 문제가 별로 없다. 때론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때론 박대수(이종수)가 물불 안 가리는 충성심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산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는(사실상 만드는 이도) 바로 영조(이순재)다. 이제 노론벽파의 거병범궐로 죽게 생긴 이산을 살려주는 것은 사실상 허망하게도 쓰러진 영조가 일어나는 그 사건 하나다. 이산은 늘 그런 상황 속에서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역경을 겪어오면서도 이산은 여전히 이상과 순수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퇴행이다.

다 잡은 노론벽파 세력을 영조의 매병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덮으려는 이산의 모습은 ‘이병훈 PD식 사극’이 가진 선악구도 이분법과 미션해결구조의 덫에 걸려 성장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보여줄 뿐이다. ‘이산’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홍국영(한상진) 캐릭터가 부각된 것은 착하기만 한 이산이 가진 캐릭터로서의 답답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왕으로서의 즉위가 임박한 이산에게 있어서 그 많은 과정을 통해 좀더 현실적인 성장을 그려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성장한 인물은 오히려 영조다
물론 이 부분은 현실이 아닌 환타지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퓨전사극들이 가진 어려움 중의 하나다. 선한 캐릭터들의 성장담을 끌어가기 위해 반드시 그들을 보호해주는 현실적인 강력한 카리스마가 동원되기 마련인데, 결국은 그 카리스마를 물려주는 시점에 와서는 주저하게 된다. 지나친 선악구도 이분법으로 인해, 캐릭터들이 현실에 몸을 담는 것이 마치 선이 악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몽’에서 주몽(송일국)의 후광으로서 해모수(허준호)를 쉽게 죽이지 못하는 이유이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주몽을 담금질하는 금와(전광렬)가 필요한 이유이다. ‘왕과 나’는 초반부 너무 강력한 조치겸(전광렬)의 카리스마로 인해, 정작 주인공인 김처선이 그 카리스마를 이어받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산’에서 성장한 인물은 이산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다. 드라마 전체의 힘을 만들어낸 것도 영조이며 실질적인 사건들도 영조를 통해서 비롯되고 갈무리되었다. 무엇보다도 초반부 자식을 뒤주에 가둘 정도의 강력한 군주에서부터 매병을 앓는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그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제목을 의심케 만들 정도이다.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영조가 사망하고 이산이 즉위한 후의 사건 전개이다. 일단 다 잡아 놓은 노론 벽파들을 다 풀어주고는 다시 비슷한 패턴 속으로 들어간다면 재미는 더더욱 반감될 것이다. 물론 이들의 도발과 그 문제해결이 빠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실적으로 대처해나가는 이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이산’을 진정한 ‘이산’으로 만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이순재,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다

도대체 이순재 연기의 끝은 어디일까. 현재 ‘이산’의 영조 역할 하나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영조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군의 이미지. 하지만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 드러나는 영조의 모습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미를 갖고 역사 속 박제된 인물에서 살아나고 있다. 때론 자애가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고, 때론 인간적인 부족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매병(치매)을 앓는 모습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영조의 면면은 실로 천변만화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바꾸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순재의 연기가 늘 그러했듯이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여지없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다.

연기자 이순재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1991년 김수현표 드라마라는 호칭이 붙었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라는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대발이 아버지는 아무리 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치약을 가까스로 짜내고는 ‘아직도 일주일은 더 쓰겠네’하고 말할 정도로 절약정신(?)이 생활화된 조금은 궁상스러우면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였다. 그 전까지 드라마 상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상이 ‘전원일기’의 김회장(최불암)처럼 인자하고 털털한 모습이었다면, 이순재가 연기한 아버지상은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엄격함이나 고집 이면에 포착되는 궁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조금씩 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고집스런 아버지,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비추어졌던 당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러니까 ‘아껴야 산다’거나 ‘부지런해야 잘 산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생활이 된 경제 개발 시대를 살아온 당대 아버지들의 이 양면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순재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때론 이빨 하나 들어가지 않는 엄격함으로, 때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가며 연기했고 그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열렬한 공감을 얻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계속 변해 아버지들의 고개는 점점 더 숙여졌다. IMF라는 파고를 넘으면서 권위는 추락했고, 구조조정과 조기퇴직이란 칼날 아래 그 어깨는 더 작아졌다. 반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가족 내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는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아버지상을 다시 보여주었다. 가족 내에서 여전히 호통을 치  
   만 그 권위의 힘은 사라진지 오래다. 며느리인 박해미가 늘 ‘OK’를 연발하는 당당함을 보이는 반면, 이순재는 ‘야동순재’ 같은 굴욕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가 되었다.

‘야동순재’라는 조어는 당대 달라지고 있는 사회와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야동’이라는 인터넷 사회를 대변하는 용어와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순재’가 만나자 권위적인 아버지상은 사라져버렸다. 또한 젊은이들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기웃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수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시대의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없이 무너지던 모습을 통해 친근한 아버지상을 만들었던 이순재는 ‘이산’의 영조 역할로 오면서 권위를 되찾았다. 추상같은 말 한 마디로 대소신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그 권위는 카리스마 자체였다. 그 앞에서 이산(이서진)은 물론이고 부인인 정순왕후(김여진)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견미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순재는 영조를 그저 권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만 만들지 않았다.

자애로운 눈길로 이산의 가녀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과오를 한없이 뉘우치기도 한다. 이러한 ‘이산’의 아버지상은 좀더 현대 사회가 희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다. 즉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가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를 현실적으로 포착했다면, ‘이산’의 아버지, 영조는 그 시대를 과거로 돌려 다시 세워지는 아버지에 대한 환타지를 끄집어냈다. 강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으로의 복권을 희구하게 된 것이다.

이순재의 연기인생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고집과 권위를 내세우던 아버지이기도 하고, 한없이 권위가 무너져 내리던 아버지이기도 하며,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라도 발견하고 싶은 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그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 고집이나 굴욕 이면에 숨겨진 아버지들의 속내를 잡아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이순재의 얼굴 표정 하나를 살피는 것으로 이 시대 아버지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모쪼록 이순재의 얼굴이, 아니 이 시대 아버지들의 얼굴이 환하게 웃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근같은 입, 백성을 자식처럼 보는 마음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앞으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간 호시탐탐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과 싸워왔던 이산으로서는 그 갑작스런 전권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절치부심 칼날을 집어든다.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은 시전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다. 

정치란 사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만 무성하고 실제 백성은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만큼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그 속에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영조는 이미 이산이 시도하는 개혁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산은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 해버리자 난항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 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자식도 저마다의 능력은 갖고 있는데 그 나쁜 짓을 나무란다고 능력까지 빼앗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의 시전상인들이 가진 금난전권 혁파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영조의 대사는 작금의 정치가 보여준 개혁이라는 명분과 현실과의 괴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과 염원이 있었지만 실상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으며,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곤궁함을 풀어주었던가. 혹 못 가진 자들을 위한 개혁의 대의명분이 앞서 가진 자들의 숨통만 조였던 것은 아닌가. 대선을 치르는 현재,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경제를 제일 우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 여파가 국민 모두에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연출된 데는 개혁을 하려는 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반대가 있었고, 그것은 ‘이산’에서 보이듯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대결구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정작 있어야할 국민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으로만 점철된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영조는 늘 백성들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정치를 펴나간다.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상전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면 어느 쪽이든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깡패 같은 아들까지 보듬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섣불리 가볍게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얘기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영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정치적 행보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임금이란 참으로 무서운 자리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백성들이 사지로 몰릴 수 있으니.’ 이 말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들을 진정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영조 같은 정치인이 되길 기대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