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이네2’의 육각형 인재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광기 사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민시야. 물은 마셨어?” tvN 예능 ‘서진이네2’에서 정신없이 몰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쉬지 않고 요리를 내놓느라 탈탈 털린 최우식이 함께 일한 고민시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러자 고민시는 놀라운 답변을 내놓는다. “아니요. 전 화장실 갈까 봐도 못 마시겠어요.” 그 말에 최우식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짐짓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처 그거까지는 내가 생각을 못했다”며 무릎을 꿇는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사실 ‘서진이네2’에 새롭게 합류한 고민시지만 그가 영업 첫날부터 이만큼 놀라운 존재감을 드러낼 줄은 예상 밖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윤식당’이나 ‘서진이네’를 하면서 첫 날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아 손님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메인 셰프를 바꿔가며 하자는 새로운 룰을 제안한 이서진도 첫 날 셰프로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 최우식을 세운 거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첫날부터 오픈런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 날의 메인셰프를 맡은 최우식과 인턴 주방 보조인 고민시는 넉다운될 정도로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위기가 그 사람의 진가를 드러낸다고 했던가. 고민시는 다양한 알바 경험들을 했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빠릿하게 모든 상황들을 알아서 보조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그건 고민시라는 육각형 인재의 진가가 이제 겨우 첫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불과했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메인 셰프만 정유미, 박서준으로 바뀌고 모든 날 주방 보조로 일을 하게 된 고민시는 갈수록 진화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재료 준비에서부터 메인 셰프가 바쁠 때는 직접 요리까지 했고, 시간이 걸리는 음식은 손님이 오기도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해놓음으로써 모든 상황들을 물 흐르듯 막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서진이네2’라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어느 순간 적응한 그는 그 날의 메인 셰프에 맞는 다양한 케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어딘가 서툴지만 그래도 해내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최우식과는 빵빵 터지는 남매 케미를 보여줬다면, 안정감 있는 주방을 만들어내는 정유미와는 전혀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든든한 자매 케미를 선사했다. 반면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온 듯한 박서준과는 마치 새롭게 창업한 청춘들의 가게 같은 동료로서의 케미를 그려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서진이네2’는 여러모로 고민시라는 배우가 가진 저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드러낸 면이 있다. 그건 못할 것처럼 보여도 막상 뛰어들어 열심히 해내는 데서 나오는 저력이다. 첫 날 그 고생을 하고도 “내일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가를 줄줄이 이야기하는 고민시에게서는, 배역을 맡았을 때의 그의 모습이 슬쩍 비춰진다. 연기에 있어서 쉬운 역할이 어디 있으랴. 다만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고 나중에는 자연스러워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마침 ‘서진이네2’와 함께 서비스된 두 작품에서의 고민시가 새롭게 보이는 건 그래서다. ‘스위트홈3’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그 두 작품으로 둘다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되었다. ‘스위트홈’은 사실상 처음으로 고민시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극 중 고민시가 연기한 이은유라는 캐릭터는 발목 부상으로 발레의 꿈을 접은 인물이다. 그래서 발레를 하는 짧은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걸 위해 고민시는 7개월 동안 발레를 배웠다고 한다. 작품이 끝난 후에도 계속 발레를 하고 있다는 그는 그래서인지 ‘서진이네2’에서 스트레칭을 할 때 엄청난 유연성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러한 유연한 피지컬은 시즌3까지 이어진 ‘스위트홈’은 물론이고 최근 서비스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액션 연기가 자연스러운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민시는 특유의 강인한 이미지가 매력적인 배우다. 단호한 얼굴로 부릅 뜬 눈은 그래서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결연함 같은 게 느껴지게 만든다. ‘오월의 청춘’은 이 강인함이 김명희라는 생명력 넘치는 간호사 역할로 그려졌다.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백의의 전사’에 가까운 강인한 면모를 가진 간호사여서 희태(이도현)와의 비극적이고 절절한 사랑이 더욱 먹먹하게 느껴지게 하는 그런 연기를 펼쳤다. 마찬가지로 이 강인한 이미지는 ‘스위트홈3’에서 모든 게 무너지고 오빠마저 잃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마도 고민시의 이런 매력적인 이미지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이제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고민시는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신비롭기까지 한 미스테리한 인물 유성아를 실감나게 표현해냈다.  

 

어느 고요한 숲속에 자리한 전영하(김윤석)가 운영하는 펜션에 유성아가 한 아이와 함께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그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실로 고민시로 시작해 고민시로 끝을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지분이 확실한 작품이다. 평화롭던 숲속의 펜션을 순간 긴장감으로 가득 채움으로서 이 스릴러를 연 고민시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폭주를 보여줌으로써 극을 파국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연기를 보여준다. 섬뜩하게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연출된 작품 안에서 고민시는 반쯤 풀린 듯한 눈빛과 순간 노려보는 눈빛으로 허무와 광기를 드러내며 시청자들의 심장을 쥐락펴락한다. 분위기로 만들어내는 공포감은 물론이고 후반부에 벌어지는 육박전은 웬만한 액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감을 담아낸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났겠는가?” 매 회 이러한 화두에 가까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사건 사고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세상을 꼬집는 스릴러다. 분명 큰 사건이 터졌지만 그걸 모른 척 한 것이 어떤 비극으로 돌아오는가를 말해주는 작품. 그런데 이 화두는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고민시의 연기를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요 속의 강렬함이라고 해야할까. 고민시가 가진 그런 이미지가 끝내 쿵 소리를 내며 시청자들의 가슴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뭐든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서도 금세 적응해내고 마치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여겨질 정도로 빠져드는 이 몰입의 힘은 이 배우가 향후 확장해나갈 무한한 가능성을 예상케 하는 면이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 청춘 멜로로 그려낸 5.18 광주

 

청춘 멜로와 5.18 광주.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풋풋한 청춘들이 어떻게 그 시대의 아픔 앞에 고통 받았는가를 멜로의 틀로 그려낸다. 그간 5.18을 담았던 콘텐츠들과 이 드라마는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

오월의 청춘

<오월의 청춘>, 80년 광주라는 시공간이 만든 무게감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부모가 강제로 시키려는 정략결혼 앞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청춘 남녀...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그 액면만 보면 전형적인 청춘 멜로, 아니 다소 상투적으로까지 보이는 옛날 멜로처럼 보인다.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부터가 그렇다. 누구나 선망할만한 서울대 의대 졸업반이지만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있는 황희태(이도현)는 어딘지 반항기가 있어 보이는 현대판 왕자님 같은 캐릭터다. 신군부와 줄을 대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보안부대 대공수사과 과장 황기남(오만석)의 혼외자식인 그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집안의 아들이지만 어딘지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엇나가는 남자 주인공이다. 반면 고등학교 때 절친 이수련(금새록)과 학교 재단의 비리에 맞섰다가 아버지의 알 수 없는 강권으로 자퇴서를 낸 후 홀로 노력해 간호사가 된 김명희(고민시)는 현대판 신데렐라 같다. 그는 그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간호사가 됐고, 이제 유학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알고 보면 황기남과 김명희의 아버지 김현철(김원해)은 과거 악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김현철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황기남이 그를 연좌제로 몰아 지금껏 핍박해온 것. 그러니 원수지간인 아버지들 사이에 선 황희태와 김명희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만찮은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다소 익숙하고 심지어 옛날 멜로처럼 보이는 남녀 관계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오월의 청춘>은 그 시공간을 80년 광주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모든 설정들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아픈 시대적 비극들이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에 어떤 ‘절박한 정서’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너무나 풋풋하게 만나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이들 앞에 닥칠 거대한 비극이 눈에 밟힌다. 황기남은 마치 당시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은 신군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황희태를 김명희로부터 갈라놓고 대신 이수련과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는 모습이나, 이를 통해 사실상 이수련 아버지가 운영해온 사업체를 강탈하려는 이야기는 신군부가 당시 저질렀던 폭력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래서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는 80년 5월 광주라는 시공간을 가져옴으로써 시대적 비극이라는 무게감을 얻게 된다. 굳이 전면적으로 당시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들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 청춘들이 겪는 아픔 속에 시대성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을 멜로로도 다룰 수 있게 된 건

<오월의 청춘>에 대해서 송민엽 PD는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당시 젊은이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그린 드라마”라며 “특정한 사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봐 달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5.18 민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다룬 시대극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남녀의 멜로에 더 집중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5.18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드라마도 아니다. 황희태가 의대생이고 김명희가 간호사라는 설정이나, 황희태의 대학친구로 계엄군이 되어 광주로 투입될 김경수(권영찬) 같은 인물 그리고 김명희의 절친인 이수련 역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이야기가 80년 광주의 아픔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당시 시대상을 청춘남녀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낸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은 이제 우리가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5.18 민주화운동이 지상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건 1995년부터다. 당시 SBS에서 방영되어 ‘귀가시계’로 불리기도 했던 <모래시계>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시 됐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들을 드라마 속에 그대로 담아 전해주었다. 최고시청률 65.7%를 기록했던 이 드라마는 SBS의 창사특집으로 방영되며 이 방송사의 위상을 단번에 높였고, 그 해의 백상예술대상은 TV부문 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극본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모두 <모래시계>에 안겼다. 1995년 <모래시계>가 이런 파격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이 추구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이 법정에 서게 된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모래시계>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다. <오월의 청춘> 같은 드라마가 이제 청춘 멜로라는 장르로 80년 광주를 다룰 정도로 유연해질 수 있게 된 건, 이처럼 시대 변화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이를 투영한 많은 콘텐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이제는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기 시작하다

사실 90년대는 물론이고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치열함은 그 시대적 비극을 엄밀한 시대극의 틀 이외의 다양한 장르가 품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오월의 청춘>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민주화 운동의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tvN <화양연화>는 단적인 사례다. 최루탄에 의해 뿌연 연기가 퍼지고 깨진 돌들이 흩뿌려진 80년대 대학가의 익숙한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딩대 민주화 투쟁을 했던 청춘들이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고 그 때의 순수했던 열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멜로로 그려냈다. 놀라운 건 당대에는 죽고 사는 절박한 문제였던 민주화 운동의 살풍경이, 2020년에 되돌아보는 시점에 의해 아련한 ‘추억’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로 보여 진다는 점이다. 물론 상처의 깊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대적 아픔조차 한참을 지나 돌아보면 아련한 그리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인 기억의 마법이 작용한 탓이다. 복고는 이렇게 민주화 운동까지 하나의 향수 가득한 광경으로 품어낸다. <오월의 청춘>이 80년대라는 아날로그적인 시공간을 복고로 담아내듯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언더커버> 역시 민주화운동을 청춘 멜로와 스릴러 장르로 담아낸다. 이 드라마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을 검거하기 위해 프락치로 접근했다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안기부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여인과 가족을 꾸려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가 공수처장이 되면서 그를 막으려는 국정원의 공작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서 위기에 처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그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언더커버>가 BBC 원작 드라마라는 점이다. 즉 리메이크 과정에서 우리 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선택은 이 작품이 리메이크작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컬 정서를 담아내는데 효과적이었다.

 

<오월의 청춘>은 이처럼 민주화운동이 보다 유연하게 다양한 장르들과 결합하기 시작한 지금의 달라진 시대 정서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청춘 멜로로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앞으로 닥쳐올 5.18의 비극성이 더해진다. 물론 너무 익숙한 청춘멜로의 틀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시대성이 이 흔한 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KBS)

'모래시계'에서 '오월의 청춘까지',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 확장

 

1995년 1월부터 2월까지 밤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밤 9시50분부터 한 시간 동안은 거리가 텅텅 빌 정도였다. 당시 대중들의 시선은 한 TV드라마에 쏠려 있었다. <모래시계> 신드롬이었다. ‘귀가시계’라고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끌었던 <모래시계>는 최고시청률 65.7%를 기록했을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그 해의 백상예술대상은 TV부문 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극본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모두 <모래시계>에 안겼다. 

 

드라마 '모래시계'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간 TV에서는 거의 금기시 되다시피 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들이 드라마 속 장면으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는 점이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당시의 끔찍했던 장면들이 알려지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많은 대중들은 <모래시계> 속에 담긴 광주의 처참한 장면들이 드라마가 아닌 실제 영상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건 1980년 당시 TV뉴스가 했던 보도들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1980년 5월27일 자 KBS 9시 뉴스는 앵커의 이런 멘트로 시작한다. “광주사태는 발생 10일 만에 진압돼서 평정되어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을 돕기 위한 생활필수품 공급을 비롯한 각종 구호작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한 괴뢰는 여전히 광주사태에 대한 선동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그 뉴스는 민주화 운동에 나선 시민들을 폭도로 부르고 이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인 양 날조하면서 계엄군이 마치 이들로부터 위협에 시달리는 평범한 시민들을 구원한 이들로 둔갑시키고 있다. 당시의 국내 언론이 얼마나 독재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일부 언론인들이 정부에 반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해고되거나 좌천되는 일을 겪었다. 이러니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 진실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80년 광주 당시의 생생한 영상들이 남을 수 있었던 건 한 외신기자 덕분이었다. 북부독일방송 도쿄지국 소속 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서울에서 한 택시운전사와 함께 광주로 잠입해 들어가 현장을 취재한 영상이다. 힌츠페터는 5월19일 광주에 잠입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히 카메라에 담았고 그 필름을 과자 통에 숨겨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북부독일방송 뉴스 프로그램에 방송되면서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힌츠페터는 이후에도 또 다시 광주에 잠입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이 영상은 향후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중대한 힘을 발휘했다. 

 

1995년 <모래시계>가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건 1993년 첫 번째 문민정부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달라진 정국과 무관하지 않다. 김영삼 정권은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을 반란죄, 횡령, 살인죄로 체포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1997년 4월17일 사법부는 전두환에게 내란과 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국가가 당시까지만 해도 ‘광주 사태’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지칭되던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 판결문에는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방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광주 민주화운동은 영화의 공공연한 소재로 다뤄질 수 있게 됐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이 <꽃잎>으로 5월 광주의 아픔을 담았고, 이후에도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같은 작품들이 대중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특히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을 알렸던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담은 <택시운전사>는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기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제 5.18 광주는 더 이상 문화콘텐츠 속에서도 금기시될 소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최근에는 드라마들도 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5.18광주를 소재로 담을 정도로 당대의 진실은 익숙한 일이 되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오월의 청춘> 같은 드라마는 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청춘들이 마주하게 된 설렘과 아픔을 담아내고 있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이처럼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5.18민주화운동이 최근 미얀마에서 군부 구데타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비극을 통해 다시금 그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미얀마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 후 인상이 좋아진 나라’로 89%가 한국을 꼽았고, 그 이유로 5.18민주화운동을 들었다고 한 것. 즉 우리가 겪은 5.18민주화운동이 군인들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구속하고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광경에서, 미얀마 시민들은 미얀마 군부가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구속하고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미얀마 시민들은 그래서 <택시운전사>를 보라고 권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 시민들이 5.18민주화운동을 하나의 희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뿌듯한 일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그것은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힌츠페터 같은 외신기자의 노력으로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과연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운동’을 얼마나 제대로 조명하고 알리고 있는가 하는 반성이 앞서기 때문이다. 물론 적지 않은 양의 미얀마 관련 보도가 나오곤 있지만,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분석보도보다 본질을 흐리는 자극적인 장면이나 기사들이 많았다는 게 미디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980년 광주는 지금 2021년 미얀마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80년 광주의 참상이 그 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그 진실이 알려지게 된 그 과정들에서 희망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힌츠페터 같은 외신기자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진 국제적인 연대가 존재했다. 이제 우리도 미얀마 시민들의 힌츠페터가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글:이데일리, 사진:SBS,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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