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왜 하필 지금 사도세자의 이야기일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들은 너무나 많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은 물론이고 <이산>, 최근에는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다뤄졌다. 그러니 역사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사도>는 이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진출처:영화<사도>

물론 이 <사도>라는 영화를 읽는 독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거의 광인으로 기록해놓은 사도세자에 대해 이토록 온정적인 시선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영화로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나, 제 아무리 왕이라도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그 비정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조의 비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 어떤 상징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영화가 사도세자(유아인) 스스로 짠 관 속에서 그가 나와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접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궁궐에 무덤을 세우고 그 안에 관을 짜고 누웠다는 것이 역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사도세자는 그것이 산송장 취급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해줄 뿐 역모의 뜻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 때마다 영조와 노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미 영조가 보위에 오를 때부터 연결되어 있던 노론 세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떤 합의를 해나가며 오히려 사도세자를 압박하는 영조 앞에서 그는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자주 떳떳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앞에서 과녁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는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말한다. 정해진 과녁에 화살을 던지는 일에서 무슨 자유와 자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뭐든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일을 처결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거침없이 펼쳐내는 정사와 삶을.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미 구축된 영조의 시스템 속에서는 노론 세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영조 또한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세자를 강건하면서도 노련하게 세우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는 노련함이 결국은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부러지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에서 이 떳떳함과 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져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의 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데 그 삶이 뒤주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왕재가 궁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구속만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산송장이라 표현했듯 자신이 원하는 뜻을 떳떳하게 펼쳐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있다.

 

거의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영화의 공간은 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궁 안에서 사도세자는 끊임없이 관에 들어가거나 뒤주에 들어가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영조의 어명이지만 사실은 왕과 신하 사이에 만들어진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영조는 스스로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왕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관과 뒤주에 갇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 현재 특히 큰 울림을 만드는 건 그 모습이 현재 우리네 청춘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떳떳하고싶을 청춘들이지만 아버지들의 원죄가 구축해놓은 부조리한 시스템은 그들의 아들들을 저 마다의 뒤주에 가둬놓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저 허공으로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관을 뛰쳐나와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저 사도세자가 처한 상황 그대로가 아닌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사도>라는 영화를 통해 보다가 문득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기서 우리네 청춘들의 좌절을 읽어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들어있다. ‘떳떳한삶을 산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비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관계를 만든 것일까



반칙 외모에 연기까지 겸비한 중년 여배우들

 

SBS 새 월화드라마인 <미세스캅>의 여주인공은 김희애다. 그녀의 나이 48. 50줄을 몇 년 남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반칙(?) 외모의 소유자인데다, 그간 쌓여온 연기 공력은 한 마디로 넘사벽이다. 게다가 김희애 특유의 그 우아함은 심지어 이 드라마의 설정 상 하수구에 빠지기도 해야 하는 상황 임에도 불구하고 가려질 수 없었다고 연출자인 유인식 PD는 밝히기도 했다.

 


'미세스캅(사진출처:SBS)'

그녀는 <밀회>에서는 이제 20대 후반인 한참 나이 어린 유아인과 연인 관계를 연기한 적도 있다. 무려 20년 나이 차를 훌쩍 뛰어넘는 멜로 연기인 셈이다. 하지만 그게 하나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이제 30대라고 해도 믿어지는 외모에, 실제 극중 주인공인 것처럼 완벽하게 빙의되는 그 연기력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이니 이제 <미세스캅>에서 형사 같은 거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신뢰가 갈밖에.

 

김희애라는 배우의 이런 나이를 뛰어넘은 연기는 이제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중견 여배우들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관리하기만 하면 오히려 더 깊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고 또 시청자들에게도 신뢰를 준다는 점에서 이들 중견 여배우들은 선호된다. 게다가 지상파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중년 여성들에게 이 나이를 잊은 듯한 중견 여배우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로망을 주기도 한다.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이 중년인 이유 역시 이 주 시청층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어셈블리>의 여주인공 송윤아의 나이는 42세고 MBC 주말극 <여자를 울려>의 여주인공 김정은은 41세다. SBS 주말극 <너를 사랑한 시간>의 하지원은 37세지만 상대 남자 역인 이진욱은 33세이고 심지어 윤균상은 28세다. KBS 월화드라마 <너를 기억해>의 여주인공 장나라도 35세로 6살 나이가 적은 서인국과의 멜로 라인을 그리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수목드라마인 <용팔이>의 여주인공 김태희도 35세로 상대역인 주원은 27세다.

 

앞에서 말한 대로 드라마 여배우들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납득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다보니 신인 여배우들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과거 김희애도 송윤아도 김정은도 하지원도 장나라도 김태희도 모두 20대 시절 연기를 했었다. 그 때는 물론 미숙한 점도 많았다. 모두가 지금처럼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김태희 같은 경우는 연기력 논란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기도 했다. 최근 <용팔이> 제작발표회에서도 이 연기력 논란이 또 지적됐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게 기자의 당혹스런 질문에 답을 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그녀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얘기다. 여자 연기자에게 있어서 나이가 들었다는 건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삶의 경험치에 따라 연기의 해석력도 깊어진다는 뜻이지만 다른 하나는 여주인공의 자리에서 조금씩 밀려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드라마 제작의 경향을 보면 나이와 여배우의 상관관계는 그리 딱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닌 듯 보인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있는 중견 여배우들로 오히려 신인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게 그 현실이다. 이건 해당 여배우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새로 연기의 세계에 들어서는 신인들에게는 암담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의 드라마들은 어떻게 꾸려진다고 하더라도 향후 10년 이후를 내다본다면 그것은 자칫 여배우 기근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김희애처럼 반칙 외모에 나날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연기까지 갖춘 배우가 있다는 건 축복받을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젊은 배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우리네 드라마 업계의 새로운 숙제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신인 여배우들의 경우는 심각하다. 지속가능한 드라마 한류를 이어가기 위해서 이 문제는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네 취업시장이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를 고스란히 닮아있다. 즉 경험이 풍부한 고령의 경력자들을 계속 끌어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청춘들을 산업현장으로 캐스팅하는 일. 드라마 캐스팅 현장에서도 발견되는 세대 간에 벌어지는 기회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지금 해결해야하는 당면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밀회>,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

 

너는 어쩌다 나한테 와서 할 일을 다 해줬어. 사랑해줬고, 다 뺏기게 해줬고, 내 의지로는 못 했을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냥 떠나도 돼.” 스스로 죗값을 치르러 교도소를 선택한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에게 건네는 이 말은 <밀회>라는 드라마가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이었다.

 

'밀회(사진출처:JTBC)'

자기 자신까지도 욕망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오혜원의 법정 최후진술 속에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욕망의 끝단을 달렸던 자의 참회가 들어 있다. 그녀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마저 접어버렸고 대신 상류층의 삶에 동화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 앞에 이선재가 나타났고 그가 들려준 피아노와 사랑의 속삭임은 그녀를 욕망으로부터 깨어나게 했던 것.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모든 욕망을 털어낸 후 그녀는 비로소 진짜 사랑과 자기 자신의 삶을 얻었다.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 한 귀퉁이에 기대 있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떨어지는 햇살 한 조각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작은 행복이지만 그것은 욕망의 것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밀회>격정멜로라는 수식어로 시작했지만 치정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랑으로 시작해 욕망으로 변질되는 치정극들은 넘쳐나지만, 거꾸로 욕망 속에 있던 인물이 사랑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부조리나 추악한 욕망의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가 동시에 다뤄질 수 있었다. 비리로 점철된 학교 재단의 이야기는 마치 치열한 사회극을 보는 듯 했지만, 그 비리를 부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과 순수의 힘이었다.

 

피아노와 음악은 사랑과 순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비리로 얼룩진 음대에서는 음악도 일종의 거래처럼 이용되었고 전시되었다. 학교로부터 버려진 친구들과 함께 이선재가 5중주를 준비하고 굿바이콘서트를 하는 에피소드는 그래서 리히테르가 말했듯 음악은 허영이 아닌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선재의 표현대로 끝까지 즐겨주는 것그것이 장땡인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해부해내면서, 동시에 스무 살 차이 연인의 미세한 심리적 변화와 떨림을 포착해내고, 또 그 위에 피아노라는 아름다운 예술의 진정한 맛을 드라마 한 편 속에 모두 담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정성주 작가의 놀라운 필력과, 조명의 농담과 피아노 선율만으로도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내는 안판석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그 위에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성적으로 울리거나 이성적으로 깨우는 드라마들은 많지만 이처럼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인 드라마는 흔치 않다. 섣부른 해피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나 충격적인 새드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는 많지만 그 둘 다를 아우른 희비극은 많지 않다. <밀회>는 욕망의 끝장이라는 새드엔딩을 그리면서 동시에 사랑의 시작이라는 해피엔딩을 담아냈다. 욕망을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가게 하는 힘. 그것은 어쩌면 예술의 힘인지도 모른다. <밀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밀회>의 불륜,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까닭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또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상류사회에서 혜원(김희애)이 당하는 갑질을 보고는 분노하는 선재(유아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라고 말한다. 혜원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서영우(김혜은)가 제일 꼭대기냐는 선재의 질문에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도대체 이 마귀란 뭘까.

 

'밀회(사진출처:JTBC)'

중년 여인과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을 소재로 다루지만 <밀회>를 단순한 불륜 치정극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놓치게 된다. 혜원이 조금씩 선재에게 허물어지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혜원은 왜 선재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안온해 보였던 삶에 균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밀회>의 영우는 혜원의 친구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사이지만 이런 짓을 버젓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뭘까. 그건 바로 혜원이 말한 그 마귀. 마귀는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속삭임으로써 그 어떤 친구사이의 패악질조차 서슴없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상류층의 갑질을 하는 영우도 그렇지만, 우아한 노비로 그 갑질을 감당해내는 혜원도 그 마귀의 희생자들이다.

 

선재는 모차르트 역시 마귀의 희생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모차르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난 이제부터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거다. 그러다가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그러다 미치고 병들고.” 혜원은 애써 부정한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녀는 선재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녀가 선재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혜원이 한 사이트에서 막귀형이란 이름으로 선재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혜원에게 되돌려진다.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러더라구요. 스펙따위 필요 없고 그냥 막 즐기면서 살라고.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갖고 그래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 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먹이고 뭐.”

 

어쩌다 여신이라 믿었던 그녀는 실상 노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실로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아트센터라는 우아함 이면에는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들만 넘쳐난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다. 그것은 심지어 당연시된다. 마귀 덕분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선재는 그래서 혜원에게는 자신을 마귀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짱땡이니 짱난다는 식의 우아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져줄 때 혜원은 그것을 순수로 읽어낸다. <밀회>가 가진 진짜 힘은 이 불륜의 과정이 마치 마귀에 의해 잘 굴러가던 선으로부터의 탈출처럼 그려지는데서 나온다. 혜원의 밀회는 그래서 아찔하면서도 슬프다.

 

<밀회>가 이런 불륜의 과정들을 통해 상류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는 피아노 같은 예술적인 장치가 한 몫을 차지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결코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도 역시 마귀가 존재했다는 것을.

 

좁은 계단을 지나 그녀는 남루한 선재의 방을 찾는다. 그 방은 마치 겉으로는 우아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남루해진 자신의 처지 같다. 선재와의 첫 번째 정사가 온전히 이 남루한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장면과 두 사람의 소리로만 채워진 것은 이 장면이 가진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해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자신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제복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잠든 선재를 둔 채 나가면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예 이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다시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신산함. <밀회>의 불륜은 그 어떤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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