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바꾸는 일상, <알쓸신잡2>가 보여준 인문학의 쓸모인문학이 이토록 즐겁고 흥미진진한 것이라는 걸 이만큼 극적으로 보여준 프로그램이 있었을까. 물론 인문학을 소재로 하는 강연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인문학을 주로 강단 위에 세웠던 것과는 달리 tvN <알쓸신잡>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여행지를 정하고 그 곳을 여행하며 느낀 소회들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를 보여줬다.

총정리편으로 미방송분을 편집해 마련한 <알쓸신잡2>의 마지막회는 그간 이 프로그램이 다녔던 곳과 그 곳에서 나눈 지식수다들을 전체적으로 관망하게 해주었다. 그 세세한 내용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즐거움이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을 푹 빠지게 했었고, 그래서 그 시간이 언제 이렇게 훌쩍 지나가버렸는가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몰입했다. 가을에 시작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느새 도달해 돌아보니 새삼 이번 편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가가 새삼스럽게 보인다.

아마도 이번 시즌2에서 가장 다른 색깔을 가져온 인물은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아닐까 싶다. 그는 여행을 하거나 우리가 일상을 겪으며 그냥 지나치곤 했던 건축물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자주 쓰던 ‘시퀀스’라는 말은 이제 일반 시청자들도 ‘공간과 건축물을 경험’하면서 염두에 두게 된 단어가 되었다. 일종의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간 하나하나를 겪는 그 과정들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떤 목적성을 띄고 있다는 것. 그걸 들여다보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일상 속 건축물들을 다른 시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뇌 과학자인 장동선 박사가 조곤조곤 들려주던 뇌 과학에 대한 지식들도 빼놓을 수 없다. 유현준 교수가 건축물이라는 외부 공간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시각을 제시했다면, 장동선 박사는 인간이 하는 어떤 행동들이 갖는 의미들을 새삼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각을 제시해줬다. 하지만 장동선 박사가 이번 시즌2에 부여한 건 그러한 지식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많은 지식들이 주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결국 “살면서 어떤 게 가장 중요한가”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고 그것을 몸소 실천해온 인물로서 그가 주는 온기는 지식의 궁극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도 함께 한 유시민 작가와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특유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들에 갈수록 능숙해지는 방송의 묘를 더해 <알쓸신잡2>가 균형 잡힌 프로그램이 되게 해주는데 일조했다. 유시민 작가는 자신이 모든 걸 이야기하기보다는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을 더 많이 보였고,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역시 음식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 관련 이야기들을 보태 프로그램을 더 풍부하게 해주었다. 사실상 두 사람의 배려와 주고받음이 있어 새롭게 들어온 출연자들과의 조화로운 수다(?)가 가능할 수 있었다.

시즌1도 그렇지만 시즌2도 역시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새로운 시각이 하나씩 열린다는 걸 <알쓸신잡2>는 보여줬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에 즈음해 돌아본 시즌2를 통해 시청자들은 벌써부터 시즌3를 기대하게 되고 거기에는 또 어떤 다른 인물이 들어와 우리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인가를 기대하게 된다. 새해에 새로운 얼굴들을 <알쓸신잡3>로 만날 수 있기를.(사진:tvN)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쓸신잡2’가 보여준 역사의 묘미

사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tvN <알쓸신잡2>가 천안에서 펼친 수다 속에 등장하는 박문수의 이야기는 어쩐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단지 수업을 통해 배우는 역사가 아닌 수다로 들려주는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역사 이야기에서도 현재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이 덧붙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사라는 직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감시’라는 관점에서 장동선 박사가 질문을 하자 유시민이 ‘보고하는 자’가 ‘보고받는 자’를 콘트롤하면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사례를 소비에트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고, 유현준 교수가 ‘권력’의 기제가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훔쳐볼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와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가 그만큼 멀리 있는 것까지 들여다본다는 권력을 얘기하는 대목이 그렇다. 

어사 박문수에 관한 일화들을 들은 적은 있지만 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권력의 구조를 풀어서 이야기하고, 거기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풀어냈던 파놉티콘의 감시구조를 끄집어내 암행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효과가 일종의 파놉티콘 감시구조와 같다는 걸 유추해낸다. 실제로는 어사들이 많이 활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시체계가 기능했다는 것. 여기서 유시민은 당시 어사들이 몇 백 명씩 있었지만 알려진 인물이 박문수 정도인 이유일 수 있다고 추론했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에서 권력과 감시의 기제까지 풀어나가는 <알쓸신잡2>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면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봐야 하고 또 그것이 현재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생각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 불운한 가족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알쓸신잡2>는 여기에 부모 자식 간의 교육적인 관점과 가족이 만들어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영괴대를 다녀온 유현준 교수가 그 짠한 마음을 전하면서 꺼내놓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에서 유시민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훈육했던 방식은 너무 지나쳤다는 걸 지적했다. 하고픈 걸 못하게 하고 과도한 요구를 함으로써 자식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는 것. 결국 파행을 저지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그 상황을 통해 유시민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지금의 부모 자식 간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당대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홍대용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사실 세종대의 장영실 같은 놀라운 과학자의 성취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후대에 거의 사라져버린 사실에서 유시민은 조선이 “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한탄했다. 그것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천대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장영실의 사후에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고, 마지막 기록으로 남았던 가마가 망가져 장 100대를 맞았다는 그 기록의 미스터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만큼 과학자를 천시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이 이야기에서는 실리적인 학문에 대한 천시 같은 시대착오적 생각들이 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울림이 느껴졌다.

<알쓸신잡2>를 보다 보면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저 역사의 기록만을 적시하고 그것을 암기해 시험문제를 푸는 것으로서 역사교육을 가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역사 교육이라면 이처럼 사료로 남은 몇 줄의 글귀 속에서도,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새로운 현재적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흥미진진한 <알쓸신잡2>의 역사이야기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진:tvN)

‘알쓸신잡2’, 잡학이어서 가능한 지식의 융복합

제주도 2편으로 방영된 tvN <알쓸신잡2>에서 정방폭포를 갔다 온 장동선 박사는 그 곳의 지명이 왜 ‘서귀포’라 명명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저 ‘진시황의 불로초 원정대’를 이끌고 온 서복이 이 곳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서귀포’라 불렸다는 설. 그런데 이야기는 불로초가 상기시키는 ‘영생’에 대한 문제로 옮겨간다. 황교익과 유시민이 유한한 삶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영생’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 말한 반면, 장동선 박사와 유현준 교수는 그러한 욕망이 우리를 진보하게 만들어 준다는 다른 의견을 낸다. 

결국은 사멸해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얘기하면서 장동선 박사는 정방폭포의 그 추락과 열역학 제2 법칙 ‘엔트로피’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의 몸이든 자연이든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그 변화를 보이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이다. 결국 영생은 ‘제한과 선택이 없는 삶’으로서 ‘인간적’이지 않고 또 “지루해서 자살자가 많아질 것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유현준 교수는 인간이 영생의 욕망을 꿈꾸기 때문에 집을 지고 건축물을 남기려 한다고 말했고, 장동선 박사는 ‘제한과 선택이 없는 삶’이 주는 지루함을 뇌 과학의 입장에서 도파민의 생성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사실 수다라는 것이 본래 그러하듯이 이야기는 본래 시작했던 곳에서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그래서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알쓸신잡>의 이런 수다가 그리 큰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이런 중구난방의 잡학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를 한 사람의 강연에서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건 어쩌면 하나의 체계가 없다는 식으로 질타를 받거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알 수 없어 지루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쓸신잡>은 다르다. 아예 대놓고 예능의 틀을 가져왔고,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수다로서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는 걸 방법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이야기가 오히려 재밌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도에 가서 보곤 했던 정방폭포의 이야기가 서복 원정대와 진시황, 불로초, 영생, 엔트로피 이야기를 거쳐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들이 흥미진진해진다. 앞과 뒤를 이어보면 정방폭포 이야기에서 인간 존재의 가치 이야기까지 풀어낸 것이니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알쓸신잡>은 애초에 ‘잡학’이라고 프로그램의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잡학은 이런 저런 학문 분야들을 한데 쏟아놓는다는 의미일 게다. 그런데 바로 이런 규정 덕분에 <알쓸신잡>은 알게 모르게 지식의 ‘융복합’과 ‘퓨전’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내는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게 되었다.

이런 일은 여기 출연하는 출연자들의 변화를 통해서도 읽힌다. 유시민 작가는 본래 텍스트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여행지에서 항상 글을 챙겨 읽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추사관을 다녀와 그 건물이 그 유명한 세한도의 풍경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새삼 건물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건축을 말하는 유현준 교수의 영향일 게다. 반면 유현준 교수 역시 다빈치 박물관에 가서는 건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을 설명하는 글들을 읽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 역시 유시민이 말하는 텍스트의 중요함을 그도 알게 됐기 때문일 게다. 

해부학자이자 과학자, 예술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역시 금석학의 대가인 과학자이자 문인이고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는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했던 융복합의 대가들이었다. 그 때는 몇몇 천재들이 홀로 그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겠지만, 지금은 보통의 범인들도 저마다의 분야를 가져와 대화를 통해 그 융복합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알쓸신잡>은 그 예능이 가진 열린 틀거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융복합이 얼마나 놀라운 지식의 확장을 가져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출처:tvN)

‘알쓸신잡2’, 우리가 봐온 제주와 다른 슬픈 제주의 역사

최근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여행을 소재로 잡으면서 가는 곳이 제주다. JTBC <효리네 민박>은 대표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제주도의 숨겨진 비경들과 다양한 즐길거리, 먹을거리들까지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 제주도 하면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건 ‘힐링’이다. 그렇게 잠시 동안이라도 훌쩍 도시를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tvN <알쓸신잡2>가 간 제주의 이야기는 사뭇 달랐다. 유현준 교수가 돌하루방을 보러 박물관에 갔다가 문득 떠올린 모아이 석상 이야기에서 엉뚱한 곳에 욕망을 집중하다 결국 섬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떠올리고, 돌아 나오다 우연히 루시드 폴의 공연을 감상한다. 유현준 교수는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으며 하루의 피로가 녹아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감상을 전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된 저녁, 루시드 폴이 손님으로 찾아왔고 이야기는 제주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4.3 사건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루시드 폴이 감귤농사를 시작하러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접한 4.3사건의 소회를 담은 ‘4월의 춤’에 담긴 가사를 전해준다. ‘우릴 미워했던 사람들도 누군가의 꽃이었을 테니...’라는 가사가 가슴에 콕 박힌다. 

당시 30만 인구였던 제주도에서 무려 3만 명이 죽음을 맞이했던 비극적인 사건. 외부세력에 의한 죽음도 있었지만 바로 같은 동네에서 아는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은 비극도 겹쳐져 있어 도무지 그 감정적 고리들을 풀 수 없었던 사건. 4.3 위령성지를 다녀온 황교익은 그 곳에 세워진 위령비에 적혀진 명단을 보며 무려 2살배기 아기도 있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남로당 조직의 무장공격과 이를 진압하려는 진압군 사이에서 무고한 죽음을 맞이했던 제주도민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6.25로 이어져 이 땅 곳곳에 4.3사건을 재현시키게 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힐링이나 관광지로 떠오른 제주지만, 3,40년 전만 해도 제주는 수탈과 고난의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는 걸 유시민 작가와 황교익은 확인시켜줬다. 거상 김만덕의 위대한 기부 이야기 속에는 태풍과 기근과 가뭄으로 척박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아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유시민은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 “귤은 재앙덩어리”였다고 했다. 귤이니 말총 같은 진상품을 수탈해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귤나무 하나하나가 관리대상이었고 만일 귤 하나라도 사라지면 물어내거나 경을 치르는 일이 일상이었다는 것. 결국 살기 어려워진 도민들이 육지로 떠나기 시작하자 이주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그들을 고립시키기도 했다. 유시민은 제주도를 “유배, 소외, 차단, 억압, 고립”의 지역이었다고 정리했다.

<알쓸신잡2>가 들려준 제주도의 역사는 우리가 주마간산식으로 봐왔던 제주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다. <알쓸신잡2>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말미에 루시드 폴의 ‘4월의 춤’을 배경음악으로 깔아주며 출연자들이 그 날 지나왔던 제주 곳곳의 풍광들을 담담히 영상으로 편집해 보여줬다. 만일 이런 아픈 역사의 이야기를 모르고 봤다면 그저 예쁘게만 보였을 그 풍광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전해졌다. 슬픔과 아픔이 더해져 더 아름다운 그런 느낌. 루시드 폴의 ‘4월의 춤’의 첫 구절이 새삼 달리 들린다. ‘바다는 아무 말 없이 섬의 눈물을 모아 바위에 기대 몸을 흔들며 파도로 흐느낀다지.’(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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