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88’ 덕선에서 ‘빅토리’ 필선으로 돌아온 혜리

빅토리

2015년 ‘응답하라 1988’이 메가히트를 기록했을 때 필자는 몇몇 기자들에게 혜리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불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돌아온 답변은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다소 막연하게 들리는 ‘순수하다’는 표현에 대해 좀더 자세히 물었다. 그러자 그건 마치 ‘아기 같은 백지상태의 순수함’이라고 했다. 그 말에 당시 거의 신드롬에 가깝게 생겨난 혜리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가 단박에 공감이 됐던 적이 있다. 백지상태라는 건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게 가능성이라는 말도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그래서 혜리는 그 백지상태의 가능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어느 순간에 그 존재가 빛을 발하게 됐다. 

 

지금도 혜리를 이야기할 때 회자되고 있는 ‘진짜사나이’의 이른바 ‘앙탈애교’로 불리는 한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한 장면은 순식간에 군대라는 조금은 격식이 요구되는 곳에서 그걸 뚫고 나오는 마음의 한 부분을 드러내줌으로써 보는 이들의 기분을 활짝 피어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유튜브 방송 ‘덱스의 냉터뷰’에 출연한 혜리가 말한 것처럼 그건 애교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간 훈련을 받으며 정이 들었던 터라 퇴소식에서는 좀더 유하게 그 친분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된다고 빡빡하게 대하는 상사의 엄격함에 소심한 짜증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그 누구도 그 상황에서 그런 리액션이 나올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보여준 틈입의 카타르시스는 컸다. 엄격한 군율이 존재하는 곳이긴 하지만 결국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혜리의 그 감정표현이 말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혜리는 그 순수한 백지상태여서 어느 순간 솔직하게 꺼내지는 감정이 특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혜리가 덕선이라는 캐릭터에 캐스팅된 것 역시 ‘진짜사나이’ 덕분이었다. 올해 초 채널 십오야에 출연한 신원호 감독은 ‘진짜사나이’에 나온 혜리를 보고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애초부터 혜리를 덕선으로 점찍어 뒀다고 했다. 이런 선택에는 예능PD 출신이었던 신원호 감독과 또 역시 예능을 함께 해온 이우정 작가가 가진 독특한 드라마 작법과도 연관이 있다. 드라마를 예능 방식으로 제작하는 이들은, 매력적인 인물을 먼저 캐스팅하고 그 인물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창출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그 자체로 순수한 매력을 갖고 있는데다, 배우라는 영역에 있어서 거의 백지상태의 가능성을 가진 혜리는 너무나 좋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혜리를 캐스팅한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덕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그건 예상한대로 엄청난 시너지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로써 걸스데이로 데뷔했지만 ‘진짜사나이’로 예능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또 ‘응답하라 1988’로 배우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 혜리는 멀티 엔터테이너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어언 데뷔 14년 차가 됐지만 최근 영화 ‘빅토리’로 돌아온 혜리는 여전히 해맑은 소녀의 풋풋함과 건강함을 보여줬다. 이번 작품에 그가 맡은 배역의 이름이 ‘필선’이라는 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이번에는 필선으로 돌아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빅토리’ 역시 혜리가 가진 그 순수한 매력이 찰떡같은 캐릭터를 만나 힘을 발휘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맞춰 오락실 DDR 게임기 위해서 춤을 추는 첫 등장부터 관객들의 시선은 이 매력적인 인물에 여지없이 포획된다. 그건 걸그룹을 해온 데서 나오는 춤선의 내공과, 또 여러 작품을 통해 쌓여진 연기의 내공이, 그와 딱 어울리는 캐릭터와 만나면서 생겨나는 시너지다. ‘빅토리’ 역시 혜리라는 인물이 가진 매력들이 가장 잘 보여질 수 있는 작품이라는 걸 영화 시작 몇 분만에 관객들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딱 맞는 캐릭터와 만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건 과연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 혜리 역시 그 필모를 들여다보면 만만찮은 실패와 좌절로 인한 상처를 겪은 바 있다. 예를 들어 ‘하이드 지킬, 나’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딴따라’는 시청률이 저조해 잊혀진 작품이 됐다. 영화 ‘물괴’에서는 작품의 완성도도 떨어져 흥행에 실패하면서 연기력 논란까지 겪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투깝스’의 기자 역할에서는 괜찮은 평가가 나왔고, ‘간 떨어지는 동거’, ‘꽃피면 달 생각하고’, ‘일당백집사’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즉 실패의 경험 속에서도 꿋꿋이 힘을 잃지 않고 달려온 결과 ‘빅토리’의 필선 같은 그의 에너지가 200% 발휘될 수 있는 배역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빅토리’가 1999년 거제상고의 치어리딩 동아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혜리라는 인물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느낌을 준다. 그건 ‘응원’이라는 키워드 때문이다. 이 작품 속 필선이 이끄는 치어리딩 팀은 만년 꼴찌팀인 거제상고 축구부를 응원하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그 응원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필선의 아버지처럼 조선업을 근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거제 사람들 모두에게 그 응원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또한 댄서의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필선이 걸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앞두고 다시 거제로 돌아와 못다한 치어리딩을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습은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이 인물의 건강한 에너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혜리라는 인물과도 잘 어울린다. 그간 제대로 해준 게 없다는 얘기를 꺼내 놓는 아버지에게 “고만 해라-”를 반복하며 결국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에서는 심지어 저 ‘진짜사나이’에서 살짝 짜증을 내면서도 거기에 따뜻한 마음이 얹어지는 혜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혜리라는 인물이 응원과 가능성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영화에서 필선이라는 캐릭터로 혜리가 던지는 그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응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응원하는 것이 자신의 가능성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가능성을 열게 해주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또한 14년의 시간 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응원하며 늘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세웠던 혜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글:국방일보, 사진:영화'빅토리')

‘My name is 가브리엘’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 박보검

My name is 가브리엘

누구나 낯선 세계에 첫 발을 딛던 순간들을 기억할 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느껴지는 두 가지 감정.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순간들을 말이다. 특히 처음 보는 타인들과 마주할 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긴장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마도 JTBC ‘My name is 가브리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박보검이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My name is 가브리엘’은 한 마디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박보검이 살아볼 타인의 삶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루리라는 인물의 삶이다. 나라도 도시도 낯선 그 곳에 뚝 떨어진 박보검은 루리가 사는 집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가고, 루리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나 해야할 일을 적어놓은 체크리스트 같은 걸 통해 그가 누구인가를 유추한다. 그리고 체크리스트에 있던 약속된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루리가 더블린에서 꽤 큰 규모의 합창단 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한 그가 이끄는 합창단으로 며칠 후 길거리에서 벌이는 합창 버스킹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합창단 지휘라는 걸, 말도 낯선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해야 하는 상황, 만일 그런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면 나는 어땠을까. 머리가 하얘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불가능해보이는 미션 앞에 선 박보검을 안심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루리의 친구들이다. 20대에서 40대까지 있는 그 친구들은 하나 같이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춰 박보검을 오랜 친구인 루리처럼 대한다. 친구들 이름조차 몰라,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를 유머로 꺼내놓으며 애써 이름을 묻고 기억하려하는 박보검에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나씩 하고 또 루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가를 알려준다. 낯선 상황의 당혹감에 머리를 쥐어뜯던 박보검은 차츰 편안해지며 그 상황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이들 친구들과 함께 수십 명의 합창단원을 만나러가고 거기서 바로 이뤄진 연습 과정은 박보검으로서는 또다른 멘붕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신이 과거 군 시절에서 군악대를 하며 익혔던 경험들을 꺼내와 단원들의 합창에 대해 나름의 코멘트와 아이디어를 주고, 거기에 단원들이 “너무나 좋은 코멘트”라는 리액션을 해주면서 그 긴장은 풀려나간다. 그리고 박보검이 솔로파트를 부르고 단원들이 백코러스로 화음을 넣어주는 ‘Falling Slowly’를 부르다 결국 울컥해 눈물을 보인다. 박보검은 그 감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고 잘 해낼 수 있다고 저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어요.”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보여준 이 감동적인 장면들은, 먼저 이 배우가 가진 특별한 몇 가지를 끄집어낸다. 그 첫 번째는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그램 콘셉트가 그래서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망치고 싶었을 그 상황에서도 그는 루리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합창단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처음에는 망설이고 어려워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고 해내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설혹 틀린다 하더라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어쩌면 박보검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다양한 역할들 속으로 들어가며 가졌던 자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영화, 드라마에 다양한 조역, 단역을 거친 박보검이 드디어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2015년 방영됐던 ‘응답하라 1988’로 바둑기사 최택 역할을 연기하면서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다,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던 박보검은 그 후 ‘구르미 그린 달빛’, ‘남자친구’를 거쳐 ‘청춘기록’으로 확실한 ‘청춘의 초상’으로 떠올랐다. 웃는 얼굴에도 우수가 가득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는 밝은 청춘들에 깃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표상하는 듯한 연기로 호평받았다. 또한 영화 ‘서복’과 ‘원더랜드’를 통해서는 심지어 로봇이나 AI 역할에서도 특유의 감수성이 빛나는 눈빛으로 한층 깊어진 연기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박보검을 여러 작품에서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감수성’이다. 이 인물은 아주 작고 소박한 일에도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감수성의 폭발을 보여준다. 최근 상영된 ‘원더랜드’에서 오랜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 깨어난 태주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박보검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능했을 희비극이 교차하는 눈빛을 통해 연기해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역할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들이라면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보검이 보여주는 감수성은 특유의 세상에 대한 열린 자세와 적극성까지 더해져 더 깊이있게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루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루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친구와 동료들을 통해 보다 깊이 이해하려 했고, 어느 순간 루리가 합창단을 이끌며 느꼈을 그 감정들을 자신도 공유하게 됐던 거였다. 박보검의 이 사례는 우리가 낯선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건 타인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미루어 알아차리는 특유의 감수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동시에 타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애쓰는 모습에 합창단 단원들이 하나같이 보여주는 ‘환대’하는 모습은 그것이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인지상정이라는 걸 드러낸다. 그러니 낯선 상황을 만났을 때, 미리 두려워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도 느끼고 있을 똑같은 낯섦을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일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뀔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마스크걸’부터 ‘닭강정’까지, 이제 안재홍은 매작품 은퇴한다

닭강정

누구에게나 스스로 쌓아온 이미지는 소중하기 마련이다. 그건 그와 관계된 사람들이 그에게 일관되게 갖는 이미지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 사람의 족쇄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를 그 고정된 이미지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미지를 깨는 색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건 하나의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안재홍이라는 배우는 독보적이다. 매번 ‘은퇴설’이 나올 정도의 파격적인 변신에 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는커녕 더더욱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그런 배우이기 때문이다. 

 

안재홍에게 ‘은퇴하는 거 아니냐’는 대중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작품은 작년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2023)’이다. 웹툰 자체가 워낙 파격적이었다. 특히 그 작품 속 주오남이라는 캐릭터는 외모콤플렉스를 가진데다 컴퓨터에 약 2만 개의 야동을 저장해 놓을 정도로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마스크를 끼고 인터넷 방송을 하는 마스크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통해 안재홍 스스로도 밝혔듯이 “더럽고 음침한” 캐릭터를 완전히 그 인물 자체인 것처럼 연기한다는 건 부담되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가 기존에 해왔던 역할들이 대부분 순수하고 수줍음 많은 청년 캐릭터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그의 인생캐릭터로 불리는 ‘응답하라 1988(2015)’의 정봉이를 떠올려보라. 2대8 가르마를 한 채 덕선(혜리)의 친구 미옥(이민지)과 어색하지만 설레는 연애를 하던 정봉이의 모습을. 또 ‘쌈, 마이웨이(2017)’에서 백설희(송하윤)와 연인 사이로 등장했던 주만이의 모습은 어떤가. 흔들리는 마음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걸 후회한 후 노력 끝에 다시 사랑을 이루는 너무나 현실적인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멜로가 체질(2019)’에서 스타 드라마 감독 손범수로 등장해 드라마 작가 임진주(천우희)와 유쾌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밀고 당기는 케미를 선보였던 건? 

 

‘마스크걸’의 파격변신은 그래서 그간 이 수줍은 청년으로 각인되어 가던 안재홍이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기를 거부하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그는 코로나19로 극장에 걸리지 못하고 결국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사냥의 시간(2020)’에서부터 삭발한 채 탈색한 헤어스타일을 한 반항기 가득한 모습으로 변신을 예고했다. 2023년에는 ‘마스크걸’의 주오남 역할과 더불어, 장항준 감독의 영화 ‘리바운드’로 실존 인물인 강양현 코치 역할을 연기했는데 실제 싱크로율을 맞추기 위해 몸무게를 10킬로 늘리기도 했다. 

 

‘마스크걸’의 은퇴설은 올해 방영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LTNS’에서 또 불거졌다. 이솜과 과감한 19금 연기에 도전한 안재홍은 극중 섹스리스 부부의 남편인 사무엘 역할을 진짜 부부 같은 모습으로 찰떡같이 연기해냈다. 당연히 부부 간의 내밀하고 대담한 대사들은 물론이고 행위들까지 연기해내야 하는 부담이 분명했을 테지만, 그의 리얼한 연기는 “내 얘기 같다”는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물론 솔직한 성담론이 담겨진 작품이지만, ‘LTNS’는 여기에 빈부의 차이와 성 문제와의 상관 관계 같은 사회적 코드들을 녹여낸 블랙코미디로 호평받았고, 거기에는 은퇴설이 또 나올 정도로 변신에 도전한 안재홍의 지분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이제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으로 돌아온다. ‘멜로가 체질’로 인연을 맺은 이병헌 감독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코미디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배달된 의문의 기계에 들어간 민아(김유정)가 닭강정으로 변하게 되고, 그걸 되돌리기 위해 아빠 선만(류승룡)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백중(안재홍)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2019년 네이버 웹툰 ‘지상최대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웹툰 원작을 드라마화한 작품으로 너무 황당한 설정인지라 과연 드라마에도 어울릴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해지는 작품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극한직업’ 같은 독특한 세계를 특유의 코미디로 풀어내는 이병헌 감독이 대본과 메가폰을 잡았기에 오히려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 됐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안재홍과 류승룡 같은 배우가 주는 아우라다. 특히 그간의 필모를 통해 예사롭지 않은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 안재홍에 대한 기대감이 적지 않다. 

 

안재홍은 여러 역할들을 통해 여러 이미지와 얼굴들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꿰어지는 하나의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바로 ‘덕후 기질’ 같은 모습이다.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도 모든 것에 마니아틱한 열정을 드러내는 인물로 심지어 전화번호부를 정독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고, ‘멜로가 체질’에서는 드라마 연출에 푹 빠져사는 스타감독을, ‘마스크걸’에서는 그런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들과는 상반되게 비정상적인 성에 빠져사는 샐러리맨을 보여줬으며, ‘LTNS’에서도 섹스리스 부부가 갖는 허탈함 속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이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닭강정’에서 백중은 짝사랑해온 민아를 본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닭강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인물이다. 

 

코미디는 그 웃음의 코드에 일단 어느 정도 적응하고 공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닭강정’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항간에는 벌써부터 잘 되면 명작이지만 안 되면 ‘괴작’이 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하나의 이미지에 멈춰서기보다는 심지어 은퇴설이 나오더라도 계속 새로운 도전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안재홍의 행보는 박수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계속 열어보고 싶다면, 늘 은퇴하는 마음으로 기존의 편안했던 삶의 틀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재홍은 연기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오토라는 남자', 톰 행크스를 살게 한 작지만 큰 이유들

오토라는 남자

미국 영화 맞아? 톰 행크스 주연의 <오토라는 남자>는 마치 한국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자그마한 타운하우스에 중간 도로를 마당처럼 나눠 쓰는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응답하라1988>의 골목과 이웃들이 보여줬던 그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소소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 감정의 진폭이 커져 끝내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영화. 

 

오토(톰 행크스)는 사랑하는 아내 소냐를 잃고 곧 그 뒤를 따라가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웃들과 선을 긋고 자신만의 삶에 머물며 전기도 끊는 등 끝을 준비한다. 그러니 이웃들에게 살가울 이유가 없다. 계속 함께 살아갈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대하고 이웃들도 그를 대놓고 ‘꼰대’ 취급 한다. 하지만 오토가 갖가지 방법으로 죽으려 할 때마다 그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 바로 그 귀찮기만 한 이웃들 때문이다. 

 

새롭게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은 어딘가 집안일에는 젬병인 남편 대신 오토를 찾는다. 공구와 사다리를 빌려달라고 하고 사다리에 올라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다 떨어져 다친 남편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자 차로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운전연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봐 달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이 ‘꼰대 할아버지’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리솔만이 아니다. 길가에 꽁꽁 얼어붙은 길고양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아내의 제자에게 잠잘 곳을 마련해준다. 본인이 죽으려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이를 구하기도 하고, 평생 지기였지만 차에 대한 취향이 달라 갈라졌던 이웃 친구가 마주한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주기도 한다. 

 

죽고 싶은 오토를 살게 하는 건 그를 귀찮게 만드는 이웃들이다. 그리고 오토가 그들을 귀찮아하면서도 외면하지 않고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는 마음을 쓴 것처럼, 이웃 마리솔은 죽으려만 하며 오토가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그 길로 들어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울어준다. 그건 어둠 속에 자신만의 집과 루틴 안에만 머물던 오토를 다시 살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죽음으로만 가던 길을 소소한 일상으로 되돌리는 것. “이게 사는 거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일상에 있었다는 걸 마리솔은 깨닫게 해준다. 

 

베스트셀러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미국 영화지만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건 미국 영화에 대한 일종의 편견 때문일 게다. 사는 곳은 달라도 ‘인간의 온기’를 원하는 건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라는 걸 이 작품의 흥행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원작도 세계적이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영화도 미국내 박스오피스 톱5에 오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통해 코미디 안에 잔잔한 감동과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담아내곤 했던 톰 행크스의 명불허전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마리솔 연기를 한 마리아나 트레비노다. 그가 톰 행크스와 호흡을 맞춰 보여준 연기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가슴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의 여운을 준다. 

 

<오토라는 남자>는 다른 한 편으로 우리의 이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던 <응답하라1988> 같은 작품 속 훈훈했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현실에서 사라져버린 이웃들에 대한 결핍이 불러온 복고이자 추억이 아니었던가. <이웃사람> 같은 영화처럼 언젠가부터 우리네 영화에서 이웃이 따뜻하기보다는 심지어 공포를 주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토라는 남자>가 주는 훈훈한 판타지의 여운이 우리네 관객들에게도 결코 작지 않은 것은. (사진:영화'오토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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