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자’, 동서와 이념의 대결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비극인가!

동조자

역시 박찬욱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쿠팡플레이가 국내 독점 공개하는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The Sympathizer)’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유머가 느껴지는 영상 미학은 물론이고 ‘동조자’라는 제목에 걸맞게 양측에 걸쳐 있어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장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놓아 보는 이들을 쿡쿡 웃게 만드는 박찬욱표 농담의 맛까지 가득하다. 시리즈지만 단 한 편을 봐도 웃음에서부터 깊이까지 다양한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랄까.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타인 응우옌이 써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와, 우리에게도 영화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패스트 라이브즈‘나 시리즈 ’성난 사람들‘로 이민자 정서를 담은 일련의 작품들을 만든 제작사로 잘 알려진 미국의 A24가 제작했고, 한국의 박찬욱 감독이 극본을 쓰고 감독을 했다. 그 제작 자체에 ’동조자‘가 갖고 있는 ’반반‘ 정서가 풀풀 풍겨난다. 

 

주인공인 대위는 70년대 베트남이 치열한 남과 북의 전쟁을 치른 후, 남베트남이 패망하게 되자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 청년.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남베트남에서 비밀경찰이자 장군의 부하로 활동하지만 CIA와 남베트남의 정보를 북베트남으로 빼돌리는 스파이다. 이처럼 국가나 언어, 심지어 이념의 중간에 걸쳐 스스로 ‘반반’이라고 말하는 그 지점에 선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당대의 풍경은 웃음이 터질 정도로 기괴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다’고 할 정도로 비극적 정조를 담고 있다. 

 

그 희비극은 시리즈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박찬욱 감독의 유머 가득한 연출로 빛을 발한다. 찰슨 브론슨 주연의 ‘데스 위시(죽음의 갈망)’ 간판이 걸린 극장에서 펼쳐지는 고문 장면이 그것이다. 영화 대신 무대에서는 한 여성이 의자에 앉혀져 고문당하고 심문을 받는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그걸 CIA요원 클로드와 대위 그리고 장군이 마치 실존주의 연극 혹은 영화라도 보듯이 관람(?)한다. 

 

“그래 관객이 오셨다고. 네 공연을 보러. 똑바로 앉아! 네 대사를 궁금해하신다.” 심문을 주도하는 만두라 불리는 인물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마치 자신도 관객이나 된 듯이 콜라를 따서 마신다. 이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비극적이다. 그 여성은 대위가 장군의 책상에서 확보한 비밀경찰 명부를 가져가려다 체포되었다. 그러니 대위가 스파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말 그대로 죽음을 갈망하듯이 자신을 고문하는 자들 앞에 침과 독설을 뱉는다. 그 광경을 속내를 숨긴 채 바라보는 대위는 끝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광경은 우스꽝스러운 농담과 풍자로 가득하다. 이념 대결로 동족끼리 죽고 죽이고 속고 속는 그 광경이 마치 한편의 실존주의 연극 같다는 은유다. 이들은 이념으로 편을 나누어 연기를 하는 중이고, 다만 누군가는 당하고 누군가는 그걸 영화를 보듯 콜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관람하는 중이다. 어느 ‘뒷구녕’에서 빼낸 정보냐고 묻는 대사는 실제로 이 여성이 정보를 숨기기 위해 그 필름을 꿀꺽 삼키자 용변을 보게 해 꺼낸 정보라는 점에서 웃음을 주고, 심문 중 만두가 두리안을 먹는 걸 두고 똥내가 극장 가득 찼다고 소리치는 장군의 모습에서는 이 광경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대한 풍자로 다가온다. 

 

이건 ‘동조자’가 앞으로 그려나갈 빵빵 터지면서도 눈물나고 씁쓸한 희비극의 전조를 보여준다. 이념과 국가, 동서 같은 걸로 구분지어진 세계에서 그 중간에 걸쳐진 삶을 살아가는 대위의 시선은 모든 걸 낯설게 만든다. 북베트남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장군 옆에 붙어 끝까지 스파이 일을 하게 된 대위가 미국으로 와 겪게되는 일들 또한 마찬가지다. 2회에 등장하는 교수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진 인물로서 동서양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 식의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교수는 동서양이 반반씩 겹쳐진 대위에게 자신이 가진 동양적인 면과 서양적인 면을 나누어 알려달라는 과제를 내주는데, 대위가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서양적인 면은 모순을 극복대상으로 삼지만 동양적인 면은 함께 갈 대상으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동양적인 면은 모순을 받아들이는 걸 겁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자 교수는 말을 끊어 버린다. 자신이 보는 대로의 오리엔탈리즘적 식견에서 벗어나는 답변이라 그렇다. 교수의 그런 모습을 대위는 겉은 하얗고 속은 노란 삶은 계란 같다며 농담한다.  

 

이처럼 ‘동조자’는 베트남 혼혈 대위가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넘어가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중간에 걸쳐져 있는 경계인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이지만 우스꽝스런 현실들을 꺼내놓는다. 제목인 ‘동조자’란 ‘어떤 의견에 대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일 수 있지만, 이 시리즈에서 중간에 걸쳐진 동조자인 대위는 양측이 벌이는 치열한 이념이나 동서 갈등 속에서 스파이로 취급되어 고통받는 인물이 된다. 

 

70년대 베트남과 미국을 배경으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것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건 우리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고 지금도 그 형태의 정쟁들이 우리네 현실 깊숙이 상흔처럼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지역으로 나뉘고 이념으로 진영을 갈라 내편과 적이 되어 어떤 각각의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의견들조차 스파이처럼 매도되는 현실이 아닌가. ‘동조자’를 보며 때론 낄낄 웃다가 때론 씁쓸해지는 감정들을 의외로 깊게 ‘동조’하게 되는 건 그래서일게다. (사진:쿠팡플레이)

‘더 커뮤니티’, 첨예한 이념의 차이를 이들은 넘어설 수 있을까

더 커뮤니티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던 그들은 커뮤니티 센터 안내방송이 나오자 일순 얼어붙었다. 이 커뮤니티에 들어온 그들에게 사전에 그런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놀랍게도 12명 중 두 사람이 ‘그렇다’고 답했다는 것.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성향을 숨긴 채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던 사람들 중에 그런 답변을 한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겨난 변화다. 

 

이 장면은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앞으로 무얼 보여주려 하는가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서바이벌 예능은 ‘정치’를 소재로 했다. 저마다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진 12명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고, 합숙을 하며 주어진 미션들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며 더 많은 돈을 분배받는 게 목표다. 매일 리더를 뽑고 당연히 리더는 그만한 메리트와 더불어 더 많은 돈을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권력을 쥐기 위한 치열한 정치 대결이 펼쳐지게 되는 이유다. 

 

프로그램은 이들을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각각 좌파와 우파,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서민과 부유 그리고 개방과 전통으로 어느 쪽에 어느 만큼의 성향을 갖고 있는가로 나눠 놓았다. 하지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중도적 입장의 가면을 쓰지만, 밤에 각자 방에서 채팅창으로 펼쳐지는 익명의 토론에서는 저마다의 다른 성향들을 드러낸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같은 젠더 주제에 대한 다소 과격한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가 2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들이 놀라고 침묵하게 되는 이유다. 겉보기와는 다른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는 어떤 순간에 야기되는 갈등들이 예고되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건 이 프로그램이 마치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하나의 작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첫 날의 리더를 뽑고 돈을 나누며 그 날 저녁 식사 비용으로 각자 받은 돈에서 몇 프로씩 나누어 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은 그래서 마치 하나의 정부가 만들어지고 세금을 몇 프로로 거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또 이튿날 미션으로 야외 노동을 하러 가기 위해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 역시 노동을 분배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더 커뮤니티>는 이처럼 서로 다른 성향과 이념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사회를 만들어 살아갈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사회 실험’ 같은 흥미로움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과 ‘리얼리티쇼’라는 예능적 성격도 놓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의 성향을 정확히 맞추면 그 사람을 탈락시키고 돈을 벌 수 있는 룰이 주어졌고, 협동을 방해하기 위한 ‘불순분자’로 불리는 스파이도 심어 놓았다. 또 앞서 젠더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자신들의 성향을 드러내는 토론 시간(익명으로 펼쳐지지만 시청자들은 알 수 있다)이나, 그들이 그 안에서 연합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모습이 가감없이 잡히는 리얼리티쇼의 자극점들도 빠지지 않는다. 

 

그간 서바이벌이나 리얼리티쇼라고 하면 소재적으로 음악오디션이나 연애 리얼리티, 게임, 피지컬 같은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 장르에 ‘정치’ 같은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던 영역을 넓혀 놓았다는 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특히 이념이나 사상처럼 한국사회에서 너무나 예민해 친구들끼리도 만나 속으로만 생각할 뿐 밖으로 내놓지 않았던 그 성향을 가감없이 꺼내놓고 부딪쳐 본다는 점은 의미있는 시도라 여겨진다. 

 

다만 우려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으로 나눠 놓은 성향에 있어서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지만, 눈에 먼저 띠게 되는 남녀라는 성별이 혹여나 성대결 구도로 첨예화되지는 않을까 싶은 점이다. 물론 성별에 따른 성향이 모두 같다고 볼 순 없지만 이를 하나의 구별점으로 삼아 연합을 하거나 대결갈등을 만들려는 흐름들이 보이기도 해서다. 또 아무래도 이슈를 끌기 위해 가장 먼저 젠더 관련 질문들로 그 성향을 끄집어내 자극적인 화제성을 만들려는 것도 다소 우려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건, <더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가져온 이 서바이벌 실험이 과연 어떤 결론으로 끝을 맺을까 하는 점이다. 프로그램은 최종 미션으로 출연자들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 ‘신뢰게임’을 한다고 정해놨다. 그것이 말해주는 건 이 과정을 통해 성향이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르긴 해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면서, 실제 이념과 생각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어떤 가능성이나 희망이 존재하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몹시 궁금해지는 이유다. (사진:웨이브)

<인천상륙작전>의 무엇이 불편함을 만드나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도대체 왜 만들어진 걸까. 이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보면 이 영화의 정체가 명확해진다. 일단 영화 외적으로 자꾸만 제기되는 이념성은 떼어놓고 보자. 물론 이 영화의 제작사 대표인 정태원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정신 무장을 하고 안보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며 이념을 앞세웠지만 그렇게 보면 영화는 그저 쉽게 선전물로 치부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념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인천상륙작전>의 의도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21세기에 여전히 공산당은 악마 혹은 적이라는 단순구도가 과연 먹힐 것인가. 70년대 반공시대도 아니고.

 

사진출처:영화<인천상륙작전>

그러니 일단 의심해봐야 하는 건 이념을 앞세우는 것에도 또 다른 의도가 들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건 다름 아닌 상업적 의도다. 이제는 이념도 장사가 된다. 이미 <디워> 논쟁이나 <국제시장> 논쟁을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보수냐 진보냐의 진영 대결구도는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영화를 보게 만드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이 관점을 보면 <인천상륙작전>은 누가 봐도 상업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오락영화다.

 

혹자는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이 영화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 같은 걸 담고 있지 않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물론 <인천상륙작전>은 이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전투가 맥아더 장군이라는 영웅만이 아니라 이를 위해 음지에서 기꺼이 목숨을 던진 켈로부대원들이 있었다는 걸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스토리상의 설정일 뿐 영화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이런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상반된다.

 

맥아더 장군(리암 니슨)은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그는 마치 우리를 위해 잃었던 딸을 되찾아주기 위해 집채만 한 파도가 쳐도 결코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가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일상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명언들만 던지는 그런 인물이다. 음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한 장학수(이정재)가 맥아더 장군과 만나는 장면을 보면 마치 신적인 존재가 인간을 가엽게 여기는 듯한 그런 모습이 연출된다.

 

반면 우리네 장학수를 비롯한 부대원들의 모습은 어떤가. 주인공인 장학수나 역시 감초 같은 역할에 눈물까지 만들어내는 남기성(박철민) 같은 인물을 빼놓고 보면 작전에 투입되어 무수히 죽어나간 이들의 이름이나 얼굴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다지 기억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마치 그 이름도 없이 작전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지만 사실 그들 개개인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영화를 갖고 역사를 보는 관점 같은 걸 얘기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건 하나의 제스처일 뿐이니까.

 

그래서 결국 남는 건 이 영화가 철저한 오락영화이고 상업영화라는 점이다. 그걸 확증하듯 보여주는 건 이름 없이 희생된 우리네 대원들보다 더 자세하고 잔학하게 묘사되어 있는 림계진(이범수)이라는 악역이다.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며 이념이 다르다면 가족에게도 총을 쏘는 걸 영웅적 행위로 말하는 이 인물은 철저히 악마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상업영화로서의 동력을 만들어낸다. 그런 극단적 악역은 인간적인 고민도 필요 없이 그가 죽는 걸 바라보고픈 욕망을 자극한다. 그래서 영화는 시종일관 그를 적으로 내세워 싸우는 대원들의 액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념도 아니고 오로지 상업적인 선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어떤 불편함을 만든다. 상업영화지만 그래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우리네 역사의 이야기다. 거기에는 실제로 이름 없이 기꺼이 작전을 위해 몸을 던진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진정성이나 진면목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영화는 오로지 그걸 상업적으로만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 불편해질밖에.

 

그런 점에서 보면 <인천상륙작전>은 이념을 담은 선전영화로서도 또 오락영화로서도 실패한 작품이다. 물론 5백만 관객이 이미 봤으니 오락영화로 성공한 게 아니냐고 말할 수는 있을 게다. 하지만 이념 대립이 때로는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우리네 영화 시장에서 단순히 관객 수가 성공한 오락영화라는 걸 확증해주지는 않는다. <디워>가 굉장한 관객을 동원했지만 우리가 그걸 성공한 오락영화라 부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디워>에 이어 <국제시장> 그리고 <인천상륙작전>까지 온전한 오락영화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이른바 보수 진보의 이념 대결을 불쏘시개로 활용해 성공을 거두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건 우리네 영화계로서는 기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예술의 영역에서조차 상업성을 위해서는 이념도 역사도 모두 장사로 활용되는 걸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세원의 빨갱이발언, 그렇게 영화에 자신이 없나

 

빨갱이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안 지키면 자녀들이 큰일 난다.”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70년대도 아니고 2014년도에 빨갱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다니. 영화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시나리오 심포지엄에 이 영화의 제작 총감독을 맡은 서세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역시 믿지 못할 얘기다. 한 때는 그래도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개그맨이 아니었던가.

 

사진출처:채널A

서세원의 이 말은 이 날 행사에 참여한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과 애국총연합회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이 영화 <변호인>을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되살리려 한다며 비판한 것에 대해 덧붙여 나온 발언이라고 한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그 발언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심포지움이라는 행사가 얼마나 비상식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세원은 이런 얘기도 했다고 한다. “똥 같은 상업영화 때문에 한 국가와 시대, 민족이 잘못된 집단최면 상태에 빠지고 있다.” 또 이 영화의 후원자인 서울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뜻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는 대중들의 선택에 대한 상식 이하의 폄하가 깔려 있다.

 

대중들이 선택한 상업영화들을 같다 표현한 것이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변호인>을 본 천만 관객은 졸지에 나라가 망하는 지표가 되어버렸다. 이를 빨갱이발언과 연관해 생각해보면 이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들은 어쩌면 <변호인>을 본 천만 관객을 빨갱이에 물든 대중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설마.

 

물론 서세원은 자신의 발언의 과격함을 의식했는지 이번 기회에 하나가 되고 이념 싸움을 하지 말자.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이 부끄럽다.” 이승만 나쁜 놈, <변호인> 나쁜 놈 하지 말자는 발언을 덧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변호인> 운운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엿보인다. 사실은 빨갱이운운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념적인 잣대를 내세워 일종의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

 

사실 <건국 대통령 이승만><변호인>은 비교자체가 될 수 없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비롯되듯이 <변호인>은 굳이 노무현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아도 작품 자체로 충분히 대중들을 끌만큼 자족적인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말 그대로 대놓고 이승만 대통령의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영화는 제작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념적인 잣대부터 내놓는 것일 게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걸까. 대중들의 자유의지로 선택 받기는 애초에 글렀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니 상업영화를 똥 같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런 영화를 선택한 대중들을 망국의 징조로까지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영화가 30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이 잃어버린 건국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놀라운 발언이 아닌가. 영화를 얘기하면서 잃어버린 건국정신 회복을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여기에 3천만 관객 동원이라는 상업적인 수치를 덧붙이는 것은 말 그대로 블랙 코미디다.

 

영화가 영화로서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애국주의와 연결되며 허상을 만들었던 경험을 우리는 이미 심형래의 <디 워>논쟁에서 겪은 바 있다. 이번 빨갱이발언으로 논란에 불을 지핀 서세원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영화 제작 심포지엄에서 <디 워>의 망령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종교행사 같은 분위기에 국가를 운운하며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심포지엄. 제 아무리 이념도 장사가 된다지만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걸까. 설마 종교적인 믿음이나 애국주의까지 들먹여야 겨우 볼 수 있는 영화라 스스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영화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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