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의 독특한 정조는 문학적 코드에서 나온다

김은숙은 문학적 코드들을 작품 속에 담는 걸 즐기는 작가다.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하지원)에게 사랑을 느끼는 김주원(현빈)이 읽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대표적이다. 김주원은 독백을 통해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며 자꾸만 끌리는 길라임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 문학적 코드를 활용해 드라마에 담아낸 바 있다. 

또 그 작품에서는 길라임을 향한 김주원의 마음이 그의 서재를 채운 시집의 제목을 통해 다뤄지기도 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김성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황인숙),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황동규), 가슴 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홍영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진동규)’의 문구가 그것이다. 문학작품이 가진 그 특유의 진지함이 드라마의 상황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정조를 그려냈다.

이러한 문학적 코드의 인용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시집을 읽는 김신(공유)이 문득 “아저씨”를 외치며 달려오는 지은탁(김고은)을 보며 읊조리는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 그것이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업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꿈꾸는 문학적 상징들은 이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분위기 있는 개화기 ‘하오체’와 엮어지면서 독특한 정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에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다 그리 살던데”라며 유진 초이(이병헌)가 애신(김태리)이 선택한 의병으로서의 삶을 안타까워하자 애신이 하는 답변이 그렇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요.”

또 유진 초이가 애신에게 자신이 노비임을 밝히는 장면 역시 문학적 코드들이 대사와 연출을 통해 들어가면서 아련한 느낌을 만들었다. 도요지를 찾아가던 길에서 처음 같은 배에 동승했던 그들이 한 겨울 꽁꽁 언 그 얼음 위를 함께 걸어가는 장면 자체가 그렇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신분의 벽이 가져올 관계의 위태로움을 살얼음판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유진 초이가 던지는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라는 대사는 그 상징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절절함이 더해졌다. 

이 드라마에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는 행위는 그들의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같은 대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유진 초이가 편지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하는 마음은 그래서 그 시적인 ‘동행’의 의미가 더해져 독특한 시대적 정조를 그려낸다.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 나에겐 다시 없을 순간이라 지금이.”라는 애신의 말에 유진 초이는 편지에 ‘하마터면 잡을 뻔 했습니다. 걷자고, 저기 멀리까지만, 나란히. 조선에서 전 저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저기로, 저기 어디 멀리로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라고 적는다.

애신이 스스로 ‘불꽃’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을 때도 유진 초이는 편지에 적는다.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함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새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어색할 수 있을 이런 다소 문학적인 대사들이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마주하며 그 시대가 겪은 처연한 정조까지를 담아낸다. 김은숙 작가의 세계가 훨씬 깊은 감정적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사진:tvN)

‘미스터 션샤인’, 눈물 났던 당대 의병들의 숭고한 선택들

“작금의 조선에 조선의 것이 없다.” 구동매(유연석)에게 붙잡힌 이름 모를 아무개, 의병은 칼날이 자신의 목줄기에 닿아 있는 와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구동매는 그 의연함이 궁금하다. 자신을 돈이 되는 일에 목숨을 걸지만,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걸까. 그래서 묻는다. 그 이유를. 

그러자 이 아무개가 조선의 사정들을 줄줄이 읊어 놓는다. 열강들이 수탈해간 조선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는 것”이란다. “이런 나라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른 이를 발고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해놓은 구동매는 적이 당황한다. 그 아무개는 “내게 단 한 명의 이름도 듣지 못할 것”이라며 스스로 칼날을 목으로 당긴다. 가까스로 자결하는 걸 막은 구동매가 “미쳤냐”고 묻자, 아무개가 말한다. “들키면 튀고 잡히면 죽는다.” 그리고 백 번을 잡아도 자신의 동지들 누구든 그렇게 할 거라고 일갈한다. 칼자루는 구동매가 쥐었지만 그는 아무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처참하게 베인다. 자신의 삶이 새삼 보잘 것 없어지는 그런 느낌.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이 짧은 장면은 구동매에게 앞으로 일어날 심경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그렇게 아무개로 남을 그들의 숭고한 선택에 대한 뭉클함이 들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진정 하려는 이야기일 게다. 그 중에는 지체 높은 애기씨도 있지만 이름 모를 촌부들도 있고, 노비에 백정 출신도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는지 알 수 없는 아낙네도 있다. 

주인공들은 그 많은 아무개로 남은 의병들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서 있다. 머슴이었지만 부모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인의 신분으로 돌아온 조선인, 백정의 아들로 일본에서 칼잡이가 되어 돌아온 일본인 조선인, 그리고 악덕 지주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삶으로 자신을 저주하듯 살아가는 룸펜 조선인,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일본인에게 팔려가듯 결혼해 남편이 죽자 돌아와 호텔사업을 하는 일본인 조선인 여인, 미군들과의 전투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포수로 위장해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인 등등. 

그 중 유진 초이(이병헌)와 구동매 그리고 김희성(변요한)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있지만 묘한 관계로 얽힌다. 어느 주점에서 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 주인이 ‘동무’냐고 묻자 그들은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김희성이 자신들을 “미국인인 조선인, 일본인인 조선인, 잘생긴 조선인”이라고 농담처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걸 자꾸만 일깨우는 한 인물이 존재한다. 바로 고애신(김태리)이다. 고애신이 선택한 쓸쓸하지만 숭고한 그 선택 앞에 세 남자는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까” 고민 중이다. 

유진이 애신에게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 사대부 연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라고 묻자 애신이 하는 말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껜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개화기 혼돈의 시대이기는 하나 그 나라를 위해 초개같은 자신의 삶을 던졌던 청춘들 역시 어찌 사랑이 없었을까. 애신의 유진을 바라보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과 그러면서도 의병의 삶을 향해 불꽃처럼 달려갈 거라는 그 말의 교차는 그래서 더더욱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거기에서는 의연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선택은 그래서 나비효과를 만들어내며 주변 사람들을 움직인다. 어느 아무개 의병의 말 몇 마디에 구동매가 칼날보다 더 아픈 상처를 입었듯이, 애신의 불꽃 같은 몇 마디 담담한 이야기는 유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함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새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유진의 이 읊조림은 그가 이 여인의 삶 깊숙이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애신이 말했듯 출신도 성차도 뛰어넘는 숭고한 대의다. ‘얼굴을 가리면’ 그들에게는 조선이 그토록 신분과 계급으로 짓눌렀던 억압을 뛰어넘어 ‘다 같은 아무개’가 된다. 추운 겨울 꽁꽁 언 얼음길을 애신과 유진이 함께 걸으며 유진이 자신을 노비신분이라 털어놓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살 얼음길 같은 그 ‘함께 가는 길’에 유진은 그 신분차이가 큰 장벽이라 여기지만 과연 애신도 그럴까. 죽음을 향해 기꺼이 달려가는 불꽃같은 삶에 그건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하지 않을까. <미스터 션샤인>은 이름 없이 등장했다 사라져간 의병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되고 어떻게 불꽃처럼 살다 스러져 갔는지를 애신과 유진 같은 인물들을 통해 아프게도 그려내고 있다.(사진:tvN)

‘미스터 션샤인’의 멜로는 어떻게 대의와 어우러졌나

역사왜곡 논란으로 시끄럽지만 역시 김은숙 작가의 멜로는 절묘한데가 있다.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총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멜로가 그렇다. 유진초이(이병헌)와 고애신(김태리)의 첫 만남은 일본과 야합하는 미국인을 저격하는 현장에서다. 그들은 복면을 한 채 같은 표적을 향해 총을 겨눴고, 저격이 끝난 후 도주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건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살피려는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이 두 사람이 첫 만남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 사건을 조사하게 된 유진은 애신을 불러 면담을 하게 되고, 이미 서로의 정체를 들킨 그들은 손바닥으로 서로의 하관을 가린 채 그 눈빛을 교환한다. 그건 애신이 동지인 줄 알았던 유진이 미국인이라는 그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면서 좀 더 가까이 서로의 눈빛을 나누는 순간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사라진 총기’가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다. 미군이 총기를 찾기 위해 애신의 몸수색을 하려 할 때 유진이 등장하게 된 것. 그건 애신과 유진이 미국과 조선이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유진은 애신에게 번번이 사건을 수사하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사건을 덮으려 한다는 걸 귀띔한다. 저격사건은 본인이 한 것이니 그럴 수 있다 여겨지지만, 총기가 사라진 사건을 덮으려는 유진의 행동은 다소 의아한 선택이다. 애신의 스승인 장포수(최무성)가 총기를 훔쳐갔다는 심증을 가진 유진은 총포 연습을 하는 애신을 찾아와 곧 이곳에 미군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내 스승의 뒤를 캐는 거요? 아님 내 뒤를 캐는 건가?” 애신의 도발적인 질문에 유진은 드디어 속내를 드러낸다. 애초 조선에 들어올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는 그가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 “조선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본 저 여인이 이상한 것인지. 잡아넣지 않는 걸로 방관했고 총을 찾지 않는 걸로 편들었소, 지금 그걸 수습중이고.” 이 절묘한 대사는 그간 그가 미국인 저격 사건을 수사하고 또 사라진 총기를 수사하면서 했던 행동들이 애신에 대한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걸 드러낸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방관’했고 ‘수습’하고 있다는 건 그의 마음이 애신에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애신은 저격 사건이 있던 날 밤거리에서 유진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똑같이 유진에게 말한다. “어느 쪽으로 가시오. 그쪽으로 걸을까 하여.” 그 말은 서로가 가는 방향이 같을 것이라는 ‘동지적 발언’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함께 숲길을 걸으며 유진이 애신에게 문득 묻는다. “그건 왜 하는 거요? 조선을 구하는 거.” 그러자 애신은 대의를 이야기한다. “꼴은 이래도 오백년을 이어져온 나라요. 그 오백년 동안 호란 왜란 많이도 겪었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지 않았겠소. 그런 조선이 평화롭게 찢어 발겨지고 있소. 처음엔 청이, 다음엔 아라사가, 지금은 일본이, 이제 미국 군대까지 들어왔소. 나라꼴이 이런데 누군가는 싸워야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런 대의보다 유진은 애신이 더 궁금하다. “그게 왜 당신이요?”라고 묻는 것. 그러자 애신은 “왜 나면 안되는 거요?”라고 되묻고 “혹시 나를 걱정하는 거면”이라 덧붙인다. 조선을 구한다는 대의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걸 앞장서서 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진은 “내 걱정을 하는 거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그건 자신의 마음이 애신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걸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인으로서 돌아온 자신과 조선인인 애신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인가. 대의를 향해 같은 방향으로 총을 겨누거나 총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동시에 설렘이 느껴지는 구한말 격변기를 배경으로한 김은숙 작가의 색다른 멜로구도가 절묘하게 다가온다.(사진:tvN)

‘미스터 션샤인’, 인물들의 사적 복수는 공적 투쟁으로 이어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어쩌면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이 내레이션 속에 들어 있지 않았을까. 의병들의 항일투쟁사를 다루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많은 인물들이 어떻게 그 뜨겁고 의롭지만 외로운 의병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노비의 아들이었고, 누군가는 노비보다 못한 백정의 아들이었으며, 누군가는 차별받던 아녀자의 몸이었고, 누군가는 아비에게 일본인에게 팔려갔던 여인이었다. 어찌 보면 조선이라면 이를 갈만큼 원한이 깊은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어떻게 의병의 길을 걷게 되는 걸까. 반면 양반으로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던 고관대작들은 어째서 조선을 팔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걸까. 

<미스터 션샤인>은 그 제목만 두고 보면 이 많은 인물들 중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유진 초이(이병헌)라는 걸 알 수 있다. 노비의 아들로 그의 아비는 맞아죽었고 어미는 우물에 몸을 던졌다. 부모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했던 이 인물은 도공 황은산(김갑수)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로 밀항한다. 미국인이 되기 위해 군인이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부모를 죽인 이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지만 유진은 선뜻 그들을 찾아가려 하지 않는다. 찾아가게 되면 반드시 죽일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수심을 누르며 자신과 부모를 그렇게 만든 조선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라 치부하며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저잣거리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김판서(김응수)의 아들 김안평(김동균)을 보고는 냉정을 잃게 된다. 그는 결국 그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자신의 죽은 부모들을 묻어주기나 했냐고 질책하며.

<미스터 션샤인>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런 아픈 사연들을 갖고 있다. 일본 낭인이 되어 돌아온 구동매(유연석)는 부모가 백정이라는 이유로 갖은 핍박을 받았고 결국 부모가 그를 버렸다. 백정의 자식으로 키우는 것조차 힘겨웠기 때문이다. 쿠도 히나(김민정)는 팔 수 있는 거라면 나라도 팔아치우는 친일파 아버지에 의해 일본인에 팔려 결혼을 했다. 늙은 남편이 죽고 호텔 글로리를 유산 받았다. 구동매도 쿠도 히나도 조선에 아무런 애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고애신(김태리)은 달랐다. 그는 부모가 모두 의병 활동을 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조부 고사홍(이호재)에게 맡겨져 자랐지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에 “차라리 죽겠다”고 맞섰다. 결국 애신의 신념을 본 조부는 포수인 장승구(최무성)를 불러 고애신에게 총포술을 가르치라고 부탁한다. 애신은 그래서 사대부가 ‘아기씨’로 불리며 존경받지만, 밤이면 조선을 농락하는 이들에게 총알을 먹이는 저격수가 된다. 

유진과 구동매 그리고 쿠도 히나 같은 조선에 대해 애착은커녕 한만 가득한 이들이 가진 복수심은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뜨거울 수 있지만, 그들이 하려는 건 그저 사적 복수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런데 이들에게 애신은 의병이라는 새로운 길을 가게 해주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사적인 원한들이 존재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비뚤어진 조선의 부조리들과 그런 조선을 침탈하려는 열강들을 향해 그 총과 칼을 들게 되는 그 길에 애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에 서 있는 것. 그 사적 복수를 공적 투쟁의 장으로 이끌고 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중심은 애신에 맞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태리가 유독 돋보이는 건 그래서다. 이제 몇 작품을 했을 뿐인 신인급 여배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김태리는 이 무거울 수 있는 캐릭터를 든든하게 감당해내고 있다. 이병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가진 배우의 존재감 앞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 그가 연기하는 애신이 향후 이 사적 복수에 불타는 인물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가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지점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대의를 향한 의병들의 항일투쟁사와 함께 이들이 서로 얽히며 대의와 사적 관계 사이에 만들어질 긴장감도 이 드라마의 중요한 포인트다. 이건 주로 멜로에 집중되었던 김은숙 작가가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실히 확장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 멜로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사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대의와 부딪치거나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모든 중심에 애신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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