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오래도록 연기자 김혜자를 기억하게 할 드라마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 가야 될 텐데 눈이 오면 미끄러워서.” 혜자(김혜자)는 눈을 쓸고 있었다. 혹여나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미끄러져 넘어질까봐. 아마도 그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일 게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그 사실을 아들(안내상)은 평생 모르고 있었다. 그것 역시 세상 모든 자식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이 어머니는 괜찮다고 했다.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알츠하이머를 가진 어머니 혜자. 어릴 적 사고를 당해 다리 한 쪽을 의족에 의지하며 살아온 아들. 뭐 하나 빛날 것 없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지고 살아온 두 인생이 서로 포개진다. 아들은 그토록 자신을 엄하게 내몰았던 엄마의 진심을 그제야 알아채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제 그만 쓰셔도 되요.” “아니에요. 눈이 계속 오잖아요.” 아들은 평생 눈을 쓸어 오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진다. “아드님 한 번도 안 넘어졌대요. 눈 오는 날 내내 한 번도 넘어진 적 없대요.” 그러자 어머니의 환하게 펴진 주름진 얼굴에 기쁨이 번져간다. “정말이에요? 다행이네요.” 아들은 뒤늦은 깨달음에 눈물을 참지 못한다. “엄마였어.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 게 엄마였어.”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종영했다. 12부작의 짧은 드라마로 순식간에 끝나버렸지만, 우리는 이 드라마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짧은 순간처럼 지나간 드라마 한 편이 마치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들여다본 것 같은 먹먹함을 안겨주기 때문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네 삶을 압축해 보여줬기 때문이며,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보통의 평범한 삶이라도 얼마나 그 삶이 눈이 부신가를 이 드라마가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혜자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라는 장치를 알츠하이머의 기억 속에서 고안해낸 건,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건 사랑했고 결혼해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했지만 폭력적인 시대를 맞아 한 줌의 재로 돌아왔던 남편 준하(남주혁)를 되살려 다시금 청춘의 나날에 만나 사랑하고픈 그 마음이 담겨있었다.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웠던 사람. 하지만 혜자를 만나 아들을 낳고 그 평생의 어둠을 비로소 떨쳐낼 수 있었던 사람. 그는 시대의 아픔 속에 사라졌지만, 혜자의 기억 속에는 눈이 부신 날의 아름다운 청춘으로 평생 남아 있었다.

혜자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또 한 이유는 바로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아들이었다. 알츠하이머의 기억 속에서 그 아들은 혜자의 아빠가 되었다. 사고를 당한 아빠를 되살리기 위해 시계를 돌리고 또 돌렸던 혜자. 아마도 그건 사고로 장애를 가진 아들을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안고 살아온 혜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간절함이었을 게다. 그래서 한 순간에 늙어버렸다는 설정은 그래서 보기만 해도 아픈 아들 앞의 눈을 평생 쓸어온 어머니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눈이 부시게>의 혜자나 준하의 삶이나, 혜자의 아들과 그 며느리(이정은)의 삶 어느 것 하나 대단한 삶은 없었다. 아니 그들의 삶은 고단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의족을 떼어놓고 잠시 쉬는 아들과, 독한 염색약에 손이 다 갈라져버린 며느리. 눈이 부시기보다는 빛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살아온 것만 같았다. 과연 이런 고단한 삶에도 행복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어머님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평생 아들 앞의 눈을 쓸어 오신 어머니에게 아들이 묻는다. “대단한 날은 아니구.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 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 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 때가.”

아주 평범한 어느 하루가 평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말은 그만큼 삶이 고단했다는 걸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고단한 삶에도 남다른 행복의 기억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담아낸다. 알츠하이머라는 기억의 조작은 그래서 불행이면서도 동시에 행복이 된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십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쩌면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간 속에 살고 계신 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담은 그 어떤 드라마가 이런 통찰을 보여줬던가.

<눈이 부시게>가 한 사람의 인생을, 그 한 평생의 기억을 온전히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다면, 그 한 사람의 인생을 주름 하나까지 감동하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연기자 김혜자다. 한지민이 이 드라마는 “김혜자 선생님을 위한 헌사”라고 한 이야기는 결코 과언이 아니다. 안내상이나 이정은의 깊이 있는 연기와, 한지민, 남주혁은 물론이고 손호준, 김가은, 송상은 같은 젊은 배우들의 호연, 여기에 김희원이나 우현 그리고 요양원 어르신 역할을 했던 모든 중견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실 수 있었던 건 그 중심에 김혜자가 있어서다. 아마도 오래도록 우리는 연기자 김혜자를 이 드라마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마지막에 깔린 내레이션은 그래서 드라마 속 인물인 혜자이자 인생 선배인 김혜자가 동시에 이 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위로가 되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사진:JTBC)

놀라운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약자들을 바라보는 시각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알츠하이머 설정은 놀라운 반전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가진 의미도 새롭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라는 타임리프 설정이 혜자(김혜자)라는 한 어르신의 알츠하이머라는 반전은 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어떻게 현실로 이어지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기억의 조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알츠하이머라는 질환은 그렇게 어르신들이 가진 ‘시간을 되돌리고픈 욕망’을 투영시켜 혜자로 하여금 타임리프할 수 있는 시계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그건 환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신기루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알츠하이머를 가진 어르신에게 그 기억의 조작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시청자들이 본 것은 그래서 그 현실로서 다가오는 환상을 경험하는 어르신의 모험담일 수 있었다. 지금껏 그 어떤 드라마가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환상 경험을 하는 어르신의 속내를 들여다 본 적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효도원이라는 공간도 또 더 나이 든 몸이 되어 아빠(안내상)와 엄마(이정은)를 대하던 혜자가 이해가 된다. 나이 들면 아이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는 알츠하이머를 가진 혜자로 하여금 자식을 부모로 인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효도원은 그렇다면 요양원 같은 공간일 것이고 준하라는 인물은 그 곳에서 자신을 잘 대해준 의사였을 게다. 

이 드라마가 놀라운 건 알츠하이머를 가진 혜자가 겪는 환상체험을 코미디와 활극 같은 경쾌함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효도원에 감금된 준하(남주혁)를 구해내기 위해 혜자가 리더가 되어 모인 이른바 ‘할벤져스’는 이 드라마가 약자가 되어 소외된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유쾌한 시각을 잘 드러낸다. 

효도원에서 음식이든 뭐든 옷 속에 집어넣고 또 뭔가 필요할 때면 그 속에서 뭐든 꺼내줘 이른바 ‘도라에몽 할머니’라 불리는 어르신은 준하 구출작전에서 필요한 연장을 뭐든 꺼내주는 역할을 맡는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어르신은 어둠 속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치기만 하면 어느 방에 누가 있는가를 찾아내는 능력자가 되고, 쌍둥이 어르신은 길을 거울로 착각하게 만들어 다른 어르신들이 그 길로 탈출하게 해준다. 할벤져스에서 가장 빵 터지는 대목은 몸이 불편해 보조기를 끌고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어르신이 좁은 길을 막고 천천히 걷는 통에 뒤쫓아 오던 조폭들이 길을 뚫지 못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엑스맨>에 퀵실버가 등장할 때 흐르던 짐 크로스의 ‘Time in a Bottle’을 깔아놓은 대목에서 빵 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다소 과장된 할벤져스의 코믹한 구출작전에 깔려 있는 건 이 소외되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여기던 어르신들이 사실은 저마다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 바라보는 시각이다. 몸이 늙어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오히려 능력으로 바꿔 보여주는 그 과장된 코미디의 웃음 끝에 어떤 감동이 담겨지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시각이 주는 따뜻함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장된 활극이 한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르신의 상상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반전은 그 놀라움과 더불어 요양원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과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고픈 젊은 마인드의 공존은 어쩌면 우리의 기억을 왜곡시켜서라도 그 힘겨운 삶을 버텨내게 하는 게 아닐까.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혜자의 읊조림 속에서 이 코믹했던 한 바탕 소란의 이야기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바탕 꿈같은 웃음과 눈물과 반전일 수 있다는 걸 알츠하이머를 앓는 한 어르신의 내면 깊숙이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본 이 드라마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사진:JTBC)

‘눈이 부시게’가 담는 소외된 노년과 청춘의 자화상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한지민)는 아나운서를 꿈꿨지만 현실은 에로영화 더빙 아르바이트였다. 그는 그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엄마 이정은(이정은)에게 집수리하는 비용에 보태라고 줬지만 아나운서의 꿈은 접어버린다. 그는 문득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일이었던가 하고 되묻는다. 사실 좋아하는 선배가 방송반에 있어 찾아간 것이 아나운서를 꿈꾸게 된 이유는 아니었나 싶은 것. 그 선배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 외국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게 꿈을 포기해버린 김혜자는 문득 하루 종일 손에 염색약 마를 날 없이 미용실에서 일하는 엄마가 눈에 밟힌다.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래서 미용실 일이라도 돕고 싶지만 이번엔 엄마가 반대한다. 적어도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이 고생스런 일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부모 마음이다. 

그러던 김혜자는 문득 같은 동네에 사는 청년 준하(남주혁)을 만나고, 선술집에서 술 한 잔을 하며 ‘불행 배틀’을 하다 가까워진다. 없는 게 차라리 낫다 여겨지는 아빠 때문에 죽어라 고생만 하신 할머니가 너무나 안타까운 준하는 시간을 되돌려 다시 돌아간다면 할머니에게 오지 않을 거라고 혜자에게 말한다. 준하 역시 기자가 꿈이지만 현실은 멀기만 하다. 때때로 집을 찾아와 돈을 뜯어가는 아빠는 여전하고, 그래도 든든히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그는 멍해진다. 

아버지의 사고를 막기 위해 시간을 계속 되돌리다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되어버린 김혜자(김혜자)는 번듯한 양복을 챙겨 입고 출퇴근 하는 준하가 결국 꿈꾸던 기자가 된 거라 착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셔가 이벤트를 하는 이른바 노치원이라 불리는 홍보관을 따라갔던 혜자는 거기서 쇼를 하는 준하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눈이 부시게>에는 이처럼 가난한 이들의 출구 없는 삶들이 교차된다. 한창 왕성히 일하고 사랑하며 눈부시게 빛나야할 청춘들은 일자리가 없어 부모 눈치를 보며 살아가기 일쑤다. 혜자의 오빠 영수(손호준)는 대표적인 백수다. 고기 먹는 게 마치 자신의 유일한 꿈이라도 되는 양 “삼겹살”을 외치고 심지어 개밥을 먹고는 너무 맛있다 눈물 흘리는 이 인물은 엉뚱하게도 유튜버로 성공하려 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혜자의 친구 현주(김가은)는 중국집 외동딸로 배달일을 하며 살아가고, 상은(송상은)은 7년째 아이돌지망생으로 지내며 뜨기는커녕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인물이다. 

노년의 라이프를 보여주는 혜자의 아빠 상운(안내상)은 택시운전을 하다 다쳐 이제 그만두고 경비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일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한 끼 점심값을 아끼려 애쓰는 아빠를 위해 혜자는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지만 늘 먹으라는 멸치를 남겨온다. 그걸 먹게 하기 위해 아빠의 일터를 찾은 혜자는 알게 된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의 모멸까지 받아가며 일하는 아빠의 모습. 뭘 먹기는커녕 먹을 시간조차 없어 보이는 팍팍한 일의 현실을.

<눈이 부시게>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건 여기 우리 시대의 청춘과 노년의 쓸쓸한 자화상이 시리도록 공감가게 담겨져 있어서다. 청춘들은 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갑갑해하고, 노년들은 세상 바깥으로 밀려나 소외받는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굳이 70대 노인이 된 김혜자와 청춘의 마음을 가진 김혜자를 판타지를 통해 겹쳐놓은 이유를 알게 된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조차 힘겨운 청춘들이 저 노인의 삶을 들여다볼 겨를이 있을까. 이제 소외되어 사회에서 점점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게 되는 노년의 삶이 청춘의 어려움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지만 김혜자라는 한 인물에 깃든 청춘과 노년의 삶은 이 양자를 만나게 하는 일종의 가교역할을 해준다. 노년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엄마 아빠의 삶과, 비로소 알게 된 청춘의 뭐 하나 쥔 것 없어도 눈부실 수 있는 시간들. 나이든 김혜자가 젊은 김혜자와 화해하고, 나아가 그 달라진 시선으로 주변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껴안는 이야기. 그 연대에 우리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사진:JTBC)


‘알함브라’, 비서 역할 새 장 연 민진웅 이대로 하차는 아쉽다

이제 드라마에서 주인공만큼 주목받는 역할이 바로 그 옆 자리를 지키는 비서 역할이 됐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김비서 역할로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대세 배우로 주목받게 된 조우진이 그렇고, <미스터 션샤인>의 거의 부모 같지만 비서 역할이나 다름없는 행랑아범과 함안댁 역할을 한 신정근과 이정은이 그렇다. 아예 비서와 대표 간의 로맨스를 다뤘던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김미소(박민영)은 물론이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남자친구>의 차수현(송혜교)을 보좌하면서 친구 역할도 보여주는 장미진(곽선영)도 빼놓을 수 없는 주목받는 비서다. 

시청자들이 지지하고 몰입하게 되는 주인공을 돕는 인물인데다, 또 드라마에서는 살짝 긴장을 풀어주며 웃음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며 때로는 주인공의 멜로를 이어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멜로의 주인공이 되는 존재이니 비서 역할의 비중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tvN 주말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서정훈(민진웅)은 비서 역할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죽어서도 주인공을 돕는 비서라니.

이런 독특한 비서 역할이 가능해진 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가진 남다른 모험담 덕분이다. 게임 속 경험이 현실과 중첩되는 이 마법 같은 판타지 드라마는 주인공 유진우(현빈)가 게임 속 대결에서 죽인 차형석(박훈)이 실제로도 죽음을 맞이하고, 마치 사이버 좀비처럼 계속 부활해 그를 죽이러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임이 현실이 되는 이 세계 속에서 유진우는 그래서 이 게임을 만들고 사라진 마스터 정세주(찬열)를 찾아가는 모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 비서 역할인 서정훈 역시 자연스럽게 기사가 된 유진우를 보좌하는 또 다른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 유진우와 게임 속 동맹을 맺으면서 그가 겪는 현실과 중첩된 게임 세계를 똑같이 겪게 되는 서정훈은 마치 돈키호테 옆의 산초 같은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미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세계 깊숙이 들어가게 되는 것. 하지만 정세주를 구하기 위해 그라나다로 들어가던 중 서정훈은 갑자기 등장한 나사르 왕국의 전사들의 공격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서정훈이 가진 비중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진 않지만, 이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세계관은 이를 허용하게 만든다. 정세주를 구하기 위해 나사르의 지하감옥 던전 속으로 들어간 유진우가 계속 등장하는 좀비들에 의해 지쳐갈 때 동맹이었던 서정훈이 사이버 좀비로 나타나 그를 돕는 장면이 그렇다. ‘위기 때마다 다시 나타나’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설정은 앞으로도 어떤 특정 상황에서 다시 그가 등장할 거라는 걸 예고한다. 

이것은 유진우와 대결구도를 만들던 차형석이 드라마 초반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해 드라마에 긴장감을 부여했던 것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에 인물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등장해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적으로 죽었던 차형석이 적이 되어 계속 등장하듯, 동맹이었던 서정훈은 앞으로도 동맹으로 계속 등장하지 않을까.

물론 웃음보다는 비장하고 슬픈 정조를 가진 사이버 좀비 비서가 되겠지만, 서정훈이라는 캐릭터는 그 어떤 비서 캐릭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독보적인 인물로 남을 것 같다. 그 죽음이 주는 아쉬움과 그래도 계속 부활해 나타날 기대감. 게다가 슬픈 정조를 부여하는 비서 캐릭터라니. 이 역할을 연기하는 민진웅이라는 배우에게도 인상적인 존재감을 부여할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분명하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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