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이준기는 문채원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에서 백희성(이준기)은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강력계 형사인 차지원(문채원)과 결혼해 딸 은하(정서연)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 인물이지만, 그의 이런 단란함은 많은 거짓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도현수였고, 그는 18년 전 연주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도민석(최병모)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차지원이 시부모로 알고 있는 공미자(남기애)와 백만우(손종학)은 그의 친부모가 아니었다. 그가 신분세탁을 한 진짜 그들의 아들 백희성(김지훈)은 무슨 일인지 산소호흡기를 매단 채 그들 집 비밀스러운 공간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드라마는 백희성이 그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아 그 실체를 알아보는 김무진(서현우)을 공방 지하실에 감금하는 이야기를 앞부분에 보여준다. 이러니 백희성이라는 인물이 사실은 연쇄살인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시청자들이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에게 신분을 완벽하게 숨긴 채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인물 아닌가.

 

하지만 이야기가 진척되면서 어딘지 이 인물이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진짜 살인범인 아버지 도민석 때문에 평생을 낙인찍힌 채 자신조차 같은 살인범으로 치부되며 살아왔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도민석에게 살해당한 아내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유사한 살인을 저지른 택시기사 박경춘(윤병희)과 백희성이 만나 나누는 말들 속에 그런 단서들이 담겨져 있다.

 

백희성을 납치해 칼로 찌르고 위협하며 아내의 시신이 있는 위치를 묻는 박경춘에게 백희성이 보이는 반응은 살인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고통받아왔던 삶이 묻어난다. 백희성의 항변에 의하면 "지 아버지와 똑같대", "마귀에 씌였대" 같은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들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아버지와 같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 그대로라면 그것은 백희성이 어째서 차지원에게 모든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신분세탁을 하려 했으며, 현재에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이고, 그렇게 애써 벗어나 차지원과 꾸린 단란한 가정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백희성이 악의적인 의도로 차지원을 속인 게 아니라는 사실은 현장에서 자신을 추격하는 차지원과 격투까지 벌일 때 그가 보인 행동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차지원이 연장들에 맞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으로 그걸 대신 막아낸다. 또 박경춘이 자신과 차지원이 함께 있는 사진을 꺼내놓자 애써 그걸 빼앗아 찢은 후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어떻게든 아내와 딸을 지키려 하는 행동들이다.

 

젊은 날 차지원의 적극적인 구애에 백희성이 계속 그를 밀어냈던 것도 그가 가해자라기보다는 피해자였을 심증을 갖게 해준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자신이 결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여기며 차지원이 그 삶 속에 들어오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차지원의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 아버지의 망령이 사라지는 걸 봤던 백희성이었다.

 

백희성이 차오르는 물속에서 이제 죽을 위기에 처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뛰어든 차지원이 키스를 통해 산소를 입으로 넣어주는 장면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이야기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차지원은 그 곳에서 수면 아래 숨겨진 백희성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고, 그가 겪어온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숨을 나눠줌으로써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가해자가 아니었을까 불안감을 주던 백희성은 그래서 차지원에게 구원을 희구하는 피해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과연 차지원은 백희성의 진실을 목도하고 그 고통스런 수면 밑에서 그를 꺼내줄 것인가. 달콤한 멜로와 살벌한 스릴러가 절묘하게 엮어진 이 멜로스릴러의 다음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이유다.(사진:tvN)

악의 꽃', 이준기 아니었다면 이런 멜로 스릴러 가능했을까

 

이준기라는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멜로와 스릴러를 순식간에 오가는 게 가능했을까.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은 독특한 멜로이자 스릴러다. 그런데 어찌 보면 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장르의 결합이 한 작품 속에서 이준기의 표정연기 하나로 바뀔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는 마치 '변검'을 하듯 순식간에 얼굴 표정을 바꿔 드라마를 멜로에서 스릴러로, 스릴러에서 멜로로 바꿔낼 줄 아는 배우다.

 

<악의 꽃>에서 이런 두 가지 이질적인 장르를 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된 건 차지원(문채원)과 사실은 도현수인 백희성(이준기)이라는 특이한 조합의 부부가 작품의 중심에 서 있어서다. 연쇄살인범이라 의심받고 추적당하는 도현수는 자신의 신분을 세탁해 백희성이라는 인물로 살아가고, 그와 결혼한 차지원은 바로 그 도현수를 수사하는 형사다. 그러니 도현수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를 추적하는 차지원과 추격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어린 시절 친구로 도현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김무진(서현우)을 공방 지하실에 감금하고 그를 추궁하는 도현수는 살벌한 연쇄살인마의 느낌을 풀풀 풍기지만, 지하실에서 나와 귀가한 차지원과 딸 백은하(정서연)와 윗층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도현수는 달달하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드라마는 도현수가 연쇄살인마일 거라는 정황이나 추측을 하게 만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진짜 연쇄살인마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바로 이 지점은 시청자들이 도현수라는 인물에 대해 갖게 되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연쇄살인마라는 추측에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도 차지원의 추격에 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 그것은 도현수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도현수와 그를 백희성으로 알며 부부로 살아온 차지원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맞닥뜨릴 파국 때문이다.

 

그래서 김무진의 집에서 도현수가 베란다 바깥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 집을 수사하는 차지원으로부터 숨어 있는 장면이나, 도현수의 옛 사진을 갖고 있다고 제보한 이의 집에서 그 사진을 훔쳐 달아나다 벌이게 되는 두 사람의 추격전은 훨씬 더 쫄깃해진다. 또한 정체를 밝히려는 차지원과 이를 숨기려는 도현수 사이의 육탄전이 벌어질 때도 필사적으로 막던 도현수가 차지원이 다칠 수 있는 상황에 자신이 몸을 던져 그걸 막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도현수와 차지원의 정체를 두고 벌이는 진실게임 때문에 <악의 꽃>의 멜로나 스릴러 두 장르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던 이야기 그 이상의 재미요소들이 채워진다. 함께 육탄전을 벌이면서 떨어뜨린 도현수의 시계를 차지원이 알아보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과연 차지원은 도현수에 대한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진실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이 커지지만 거기에 다가가는 일은 자신과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결정을 할 지가 궁금해지는 것.

 

그러면서 과연 도현수는 과거 연주시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도민석(최병모)과의 공범일지 아니면 피해자일지가 궁금해진다. 도현수가 과거 중국집에서 함께 일했던 남순길(이규복)을 살해한 건 도현수가 아니라 과거 도민석의 연쇄살인을 당했지만 사체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던 택시기사(윤병희)였다. 즉 드라마는 마치 도현수가 연쇄살인마가 아닐까 하는 떡밥을 던지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흐름이라면 도현수는 연쇄살인범 아버지 때문에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가 신분을 세탁한 진짜 백희성(김지훈)과 그의 부모인 양 행동하는 공미자(남기애)와 백만우(손종학)라는 인물과 어떻게 얽혀있는가는 궁금한 지점이다. 이들은 과연 무슨 이유로 이런 거짓 가족을 연기하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건 이 모든 멜로의 달달한 지점들과 스릴러의 살벌한 요소들이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며 달달함을 절절함으로 증폭시키고, 살벌함을 비극적인 두려움으로 확장시키는 그 중심에 도현수라는 문제적 인물이 서 있다는 점이다. 결국 도현수의 이런 두 얼굴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설 기반이 사라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준기라는 배우의 진가가 새삼 확인된다. 멜로도 스릴러도 다 되는 이준기가 그걸 하나로 묶어서 변검하듯 표정 하나로 장르를 오가는 그 과정 속에서 드라마의 몰입감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많은 좋은 작품들과 연기들을 선보여온 이준기지만 <악의 꽃>은 그의 연기 스펙트럼에 또 하나의 굵직한 선을 그어줄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사진:tvN)

'악의 꽃', 지하에 숨겨진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믿기 힘든 진실 앞에 우리는 과연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 tvN 새 수목드라마 <악의 꽃>의 시작은 양 손이 묶인 채 물 속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백희성(이준기)에게 차지원(문채원)이 다가와 그를 깨우고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짧은 장면이지만 은유적으로 표현된 이 오프닝은 앞으로 <악의 꽃>이 어떤 이야기를 그려나갈 것인가를 암시한다. 수면 아래 감춰진 백희성의 진실 앞에 서게 되는 차지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 앞에서는 그토록 자상한 꿀미소를 뚝뚝 떨어뜨리던 백희성이 뒤돌아서자 얼굴빛이 살벌하게 굳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섬뜩함을 안긴다. 그건 이 문제적 인물의 앞면과 뒷면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그의 생일에 초대된 그의 부모 백만우(손종학)와 공미자(남기애)를 통해 금세 드러난다.

 

백희성의 딸 백은하(정서연)가 조부모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실제로 손주 앞에서도 시종일관 굳은 표정만 짓고 있는 백만우와 공미자는 상식적인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며느리 차지원에게 대놓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꺼내고,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 백희성이 이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한다. 그러자 백희성은 차지원이 "쉬운 여자"라며 그는 보는 것만 믿고, 자신은 그래서 그에게 보이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건 차지원이 강력계 형사라는 사실이다. 그는 한 아이가 아빠가 계단 위에서 밀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진술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남다른 섬세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는 걸 드러낸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아이가 다친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다는 걸 식당 슬리퍼를 끌고 온 것과 그의 한쪽 양말만 더럽혀진 것을 통해 추리해낸다.

 

차지원과 같은 팀의 베테랑 형사 최재섭(최영준)은 그 아빠를 의심하고 추적한 결과 불륜 정황을 찾아냄으로써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만, 마침 이웃 아이가 자신의 반려견 때문에 사고가 생겼다고 증언함으로써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아이의 자작극이었다. 아빠의 불륜을 목격하고 무언가 약을 건네는 걸 본 아이는 그걸 엄마가 먹지 못하게 하려고 약통에 벌레를 넣고, 그렇게 쏟은 약이 비타민이 아니라는 걸 차지원은 알아내고는 아이의 아빠를 체포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건은 차지원이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일들에 대한 암시를 던진다. 즉 아이 엄마는 이미 남편이 비타민이 아닌 다른 약을 준 것을 알면서도 그냥 먹었을 거라는 것이다. 진실 앞에서 그걸 드러내면 모든 게 무너질 걸 두려워하는 인간은 이를 유예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한다는 것. 차지원은 그 엄마의 입장을 공감함으로서 앞으로 자신의 남편 백희성의 진실 앞에서 겪을 갈등을 예고한다.

 

백희성이 분명 과거 연쇄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김무진(서현우) 기자가 그의 공방을 찾아오면서 밝혀진다. 그는 신분을 바꾸기 전 백희성의 과거를 아는 인물이다. 과거 고향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 이후 사라진 그에 대한 의심을 하는 김무진을 백희성은 기절시켜 자신의 집이자 공방 지하실에 감금해 놓는다.

 

이번 작품에서도 공간에 대한 은유를 연출해내는 김철규 PD는 백희성이 사는 집을 이 드라마가 하려는 진실과 비밀의 공간으로 형상화해낸다. 1층에 공방이 있고 2층으로 백희성이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있으며 공방 바닥에 숨겨진 문을 통해 내려가면 음침한 지하실이 있다. 지상에서는 멀쩡한 금속공예가이자 한 아이의 아빠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아가지만 지하에는 갇혀있는 김무진 같은 어두운 진실이 숨겨져 있다.

 

과연 백희성은 진짜 살인범일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 때문인지 과거를 은폐하기 위해 신분을 바꿔 살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살인범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 예를 들면 부모들 같은 인물들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과연 차지원은 사랑하는 백희성에 대한 의심 앞에서 진실을 향해 나아갈까. 그것이 파국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얼마나 갈등하게 될까.

 

<악의 꽃>은 그래서 이 진실을 찾아가는 스릴러 장르의 짜릿하고 섬뜩한 이야기 속에 진실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숭고함 같은 걸 다루려 하고 있다. 그저 누군가를 죽고 죽이고 범인을 찾는 단순한 스릴러 장르들과는 다른 어떤 걸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사진:tvN)

‘미스 함무라비’의 고구마와 ‘무법변호사’의 사이다

대중들은 <무법변호사>를 꿈꾸지만 현실은 <미스 함무라비>다? 두 드라마 모두 법 정의를 다루고 있지만 다루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JTBC <미스 함무라비>가 그리는 세계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답답하고 암담할 정도다. 반면 tvN <무법변호사>는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판타지에 가깝지만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은 바로 그 법 현실의 절망감을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정의를 꿈꾸며 판사가 되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법원 내에서 부정한 청탁을 받은 부장을 지적한 문제는 그를 ‘내부고발자’로 찍히게 만들어 사실상 왕따를 당하게 만든다. 판사라면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심판하는 게 당연할 줄 알았지만 법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적용되기도 한다. 회사 내 성추행 사건으로 부당해고 당한 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회사 측의 잘못이 명백히 보여도 법의 차원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박차오름은 분노와 자괴감에 눈물을 흘린다.

물론 <미스 함무라비> 역시 이렇게 답답한 법 현실을 뒤집고픈 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미스 함무라비>인 이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함무라비 법전의 정의 구현 방식을 꿈꾸는 것. 박차오름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놓은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 역시 이 갑갑한 현실을 마주하고는 절망한다. 정의를 꿈꾸었지만 법은 결국 가진 자들에 의해 이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복수가 나을 것 같은 심정을 갖게 된다. 

‘미스 함무라비’로서의 박차오름이라는 판타지 캐릭터를 세우면서도 드라마가 현실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건 작가가 현직 판사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너무나 깊게 법 현실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타지를 담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를 이 드라마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스 함무라비>는 어떤 시원한 결말을 보여주기보다는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할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본드를 하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가를 파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식이다. 

반면 <무법변호사>는 <미스 함무라비>와는 완전히 다른 판타지를 그린다. 공간 자체도 기성시라는 가상도시이고, 그 곳에서 법을 쥐고 흔드는 차문숙(이혜영)이라는 적폐 권력을 하나씩 무너뜨려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야기는 <무법변호사>가 아니라 <무협변호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전형적인 복수극에 액션 장르로 그려진다. 현실성을 찾기가 쉽지 않고, 이야기도 촘촘하지 않아 개연성이 흔들리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시원함을 안겨주는 단순한 재미는 분명히 존재한다. 워낙 악당들이 제대로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너뜨릴 봉상필(이준기)의 활약이 기대되고, 실제로 그 기대는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법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며 문제제기를 하는 <미스 함무라비>와 비현실을 통해서라도 시원한 판타지를 담아내려 하는 <무법변호사>. 시청자들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을까. 시청률로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미스 함무라비>가 3%(닐슨 코리아)대 시청률로 떨어진 반면, <무법변호사>가 7%를 돌파하게 된 건 두 드라마가 법 현실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영향이 있다고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판타지에 더 이끌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시청률의 차원일 뿐이다. 완성도로 보면 <미스 함무라비>만큼 현실을 실감나게 담아낸 드라마가 있을까.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이다보다는, 두고두고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고구마가 때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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