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自然)은 한자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자연이 벌이는 일들은 그래서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살고 죽는 일은 그냥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자연처럼 '그냥 그러하다'고 살고 죽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은 그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내는 비극을 그리면서

예술이 그 비극을 어떻게 승화해 그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는가를 그린 작품으로 다가온다.

햄넷

'햄넷'은 11살의 나이에 사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이다.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이자 동명의 소설을 쓴 매기 오파렐은

11살에 사망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햄릿'이라는 걸작의 탄생 사이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매기 오파렐이 영감을 얻은 스티븐 그린블랫의 에세이 '햄넷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햄넷의 죽음이 햄릿을 탄생시키는 그 과정을 담는다.

햄넷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마치 자연이 잉태한 듯한)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 라틴어 교사 윌리엄(폴 매스칼)의 구애를 받는다.

이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아이를 갖게 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된다.

하지만 결혼 후 극작에 대한 갈망을 풀지 못하는 윌리엄이 자신을 잃어가자

아녜스는 그를 런던으로 떠나 보낸다. 

떨어져 지내지만 쌍둥이 남매까지 낳아 세 아이를 키우는 아녜스와

런던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생기를 찾고 고향을 오가는 윌리엄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햄넷

하지만 이들의 행복에 자연이 드리운 그림자는 비극을 몰고 온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쌍둥이 남매 중 몸이 약하던 딸이 감염되지만

햄넷은 '용감하게' 사신의 시선을 속여 자신의 삶을 동생에게 주고 대신 죽는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벌어진' 자연의 일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의 고통(특히 부모의)은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넌 꼭 살거야"라고 애써 말해줬지만 끝내 죽은 아들 앞에 아녜스는 절망하고

그 아들의 임종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윌리엄은 죄책감에 빠진다. 

절망 속에서도 윌리엄은 연극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 

그것은 아녜스를 분노하게까지 만든다.

햄넷

윌리엄이 연극으로 성공해 세운 작품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고

그 비극의 제목이 아들의 이름을 딴 '햄릿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아녜스는

런던으로 와 그 연극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함부로 쓴 그 연극에 분노하지만

어린 햄넷을 닮은(자랐으면 아마도 그렇게 컸을),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아녜스는 연극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햄릿의 죽은 아버지 역할로 윌리엄이 분칠을 한 채 연극에 등장하자

비로소 아녜스는 윌리엄이 얼마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했고

그 마음을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담아내려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차라리 죽고 아들을 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햄넷

거대한 숲처럼 꾸며진 연극무대에 난 작은 문은

아녜스가 잉태되어 있었고, 첫번째 아이를 낳았던 숲의 동굴 같은 구멍을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곳(자연)으로부터 삶이 시작됐지만

그 구멍은  그 삶이 다시 되돌아갈 죽음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죽은 매를 그 곳에 묻어준 것처럼.

하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부부는 아들을 그 자연(구멍)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윌리엄은 연극 무대에 그려진 작은 문을 통해

아들을 비로소 자연으로 되돌려 준다. 

예술이 불가항력적인 자연 앞에 놓여진 인간의 비극을

애도하고 승화함으로써 이를 수용하게 해주는(자연으로 되돌리게) 장면이다. 

햄넷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들만의 애도와 공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의 애도와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스스로 그러한) 일이고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겪는 것이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우리를 울면서도 웃게 만든다. 

햄넷

무심하지만 무자비한 자연과

그 앞에서 너무나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비통해하는 인간

그리고 이를 애도하고 공감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예술.

'햄넷'은 이 거대한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비의를 담아낸 명작이다.

(사진:영화'햄넷')

2026.3.6.

‘폭싹 속았수다’, 고되지만 위대한 모든 삶에 전하는 위로

폭싹 속았수다

“무쇠도 닳네. 닳아.” 손 꼭잡고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가며 애순(문소리)은 절뚝거리는 관식(박해준)에게 말한다. 애순의 말처럼 어려서는 무쇠 소리 듣던 관식이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 몸이 세월에 장사 있을까. 게다가 열 살부터 지게를 지며 살았던 관식의 삶이라면 무쇠라도 당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특히 애순을 위해서라면 어려서부터 따라다니며 몸이 부서져라 일해왔던 관식이었다. 그럼에도 관식은 걱정말라며 애순보다 더 오래 살거라 말한다. 두고가는 것보다 잘 보내고 따라가는 게 마음이 편해서란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무쇠 같던 관식의 몸처럼 한 때는 힘이 넘치는 봄날이었던 청춘이 모진 세월을 겪으며 닳고 닳아 이제 삐거덕 거리며 걸어가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다. 물론 제주에서 나고 자라 그 고단함이 훨씬 더 컸던 애순과 관식이지만, 이런 삶은 누구나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일 게다. 왜 나이 들면 몸이 아프겠나. 그저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재게도 움직였던 삶이 아픈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쓸쓸하고 힘들며, 때론 억울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옆에 손 꼭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풍진 삶도 살아진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려 한다. 

 

우리네 삶 전체를 이야기하려 했기 때문일까. <폭삭 속았수다>는 봄여름가을겨울로 흘러가는 사계의 흐름에 빗대 삶을 풀어내려 한다. 넷플릭스답지 않게 4주에 걸쳐 4회씩 공개되는 방식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테다. 하지만 이렇게 나눠 놓은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한 번에 16회를 다 꺼내놓기 아까운 작품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한 주에 4회도 너무 많게 느껴진다. 기다리기 싫고 몰아서 다 보고픈 마음이 큰 시청자들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엉뚱하다 싶겠지만, 적어도 <폭삭 속았수다>는 한 회 한 회 천천히 오래도록 음미하면서 보고싶은 작품이다. 그저 꿀떡 삼키기보다는 씹을수록 우러나는 맛이 느껴지고,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거워지는 작품이다. 

 

1회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염혜란과 아역배우 김태연이 말그대로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 이 첫 회는 토속적인 제주 방언을 기막히게 살려낸 대사 속에 제주 해녀들의 고된 삶이, 애순(김태연)과 애순 엄마 광례(염혜란)의 절절한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자식들만큼은 이 험한 물질 안시키기 위해 허구헌날 점복 잡으러 무리하는 광례의 삶은 소설 한 권을 써도 될 정도로 신산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게꾼 팔자란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는 빚잔치에 무너졌고, 첫 서방은 병수발을 하다 먼저 보냈으며, 새 서방은 하는 일 없는 한량이다. 모두가 그 지게에 올라타려고만 한다. 

 

그런데 허구헌날 점복 잡으러 물질 하는 엄마에게 툴툴대며 “이럴라면 점복을 낳지 나를 왜 낳았대”라고 말하면서도 엄마 걱정이 한 가득인 딸 애순만은 다르다. “전부 다 내 지게 위에만 올라타는데 이 콩만한 게 자꾸 내 지게에서 내려와. 자꾸 지가 내 등짐을 같이 들겠대.” 광례의 말처럼 애순은 엄마가 좋고 엄마가 힘들게 물질하는게 눈에 밟혀 ‘점복 팔아 버는 백환’을 대신 자기가 주고 엄마의 하루를 사고 싶다는 시를 쓴다. 먹고 살기 힘들데 무슨 놈의 시냐던 엄마는 그 시를 읽고는 그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왜 아닐까. 자기 힘든 걸 알아주는 자식이니 말이다.

 

애순과 광례의 끈끈한 모녀관계가 보여주는 건 숨막히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서로 기대고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어 그 모진 삶도 살아진다는 것이다. 그건 애순과 어려서부터 그녀를 따라다녔던 관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죽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던 애순이 아픔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건 엄마의 말처럼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 살아야할 삶이 밀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옆에 소처럼 묵묵히 애순을 지지해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바로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복어처럼 독하게 숨이 턱턱 막혀올 때까지 물질을 하고 쇠도끼처럼 밭을 갈아 생계를 꾸려오다 겨우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버린 광례지만 “넌 요런 딸내미 있어?”라고 자랑하던 봄날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어려서 아빠를 여의고 엄마마저 잃은 채 작은아버지 집과 엄마 집을 오가며 ‘식모살이’를 하면서 문학의 꿈도 저버릴 수밖에 없던 애순(아이유)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관식(박보검)과 결혼해 가진 아기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여겼던 봄날이 있었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그 의미처럼 이 드라마는 세상의 모든 닮아버린 고단한 삶에 대해 수고하셨다고 보내는 헌사다. 때론 누군가를 먼저 보내야 하는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가 있어 우리의 삶을 살아질 수 있었다. 그 저마다의 위대함 앞에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호로록 지나버리는 봄날을 거쳐 꽈랑꽈랑(햇볕이 쨍쨍)한 여름과 그 후의 가을, 겨울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기다리는 게 즐거울 정도로. (사진:넷플릭스)

‘무빙’, 재생 능력자 류승룡의 피, 땀, 눈물에 빠져드는 건

무빙

등짝에 칼이 수십 개씩씩 박혀도, 총알이 팔뚝을 뚫고 심지어 얼굴을 관통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재생 능력자 장주원(류승룡). 하지만 이 초능력자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는 오열하며 무너져 내린다. 모든 걸 재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졌지만, 한 사람 앞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이 초능력자는 그것으로 자신이 결국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한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초능력자가 가진 인간적 상처와 고뇌. 물론 이건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슈퍼맨도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인간적 고뇌는 모두 갖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빙>이 다루는 초능력자들의 인간적 고뇌는 그 서사의 깊이도 다르고, 보다 현실감이 부여되어 있다. 

 

<무빙>의 초능력자들이 저 할리우드 초능력자들과 달리 슈트를 입지 않는 건 그런 현실성을 더 반영한다.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비행기를 향해 날아가는 공중부양 능력자 김두식(조인성)이나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북한 능력자가 포함된)를 막기 위해 작전에 투입된 장주원 역시 특별한 슈트를 입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점퍼 하나를 걸치고 총칼이 난무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물이면서, 그 서사에 실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을 굳이 연결해 놓은 것도 이런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무빙>은 안기부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던 시절부터 권한이 축소되고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힘이 커지는 그 변화의 과정을 북한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지어 풀어낸다. 칼기 폭파사건, 김일성 사망, 남북정상회담, 강릉 앞바다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등등이 그것이다. 남북 간의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미국의 간섭도 포함해), 국가 간 힘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초능력자들의 서사로 풀어낸 것이다. 

 

이러한 현실감 위에 초능력자들을 세워 놓은 건, <무빙>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세상을 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비정한 현실을 그리기 위함이고, 그래서 이들의 대결상대는 북한이나 미국의 초능력자라기보다는 저들과 맞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인간이 아닌 괴물처럼 마음대로 이용하는 안기부 특별부서의 민용준(문성근) 차장 같은 인물이다. 

 

재생 회복 능력을 가진 장주원의 서사가 더 절절한 현실감을 주는 이유는 이 초능력자의 능력이 그저 깔끔하게 상대를 처리하는 그런 방식으로 발휘되는 게 아니어서다. 이 캐릭터는 한 마디로 ‘가진 건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자’가 살벌한 현실에서 생존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다. 지극히 서민적이고,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있다. 그래서 그가 작전에 투입되어 발휘하는 능력의 과정은 멋있다기보다는 짠한 느낌을 준다. 뭐든 온 몸으로 받아내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제 살갗을 찢는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회복 능력을 가졌다는 건, 단번에 이 고통이 끝나지 않고 연거푸 계속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천형’의 의미가 담겨있다. 조직에 배신당하고, 안기부에서 이용당하면서도 그가 원한 건 단 하나, 아내와 함께 하는 행복이었다. 안기부 특별부서가 해체되고 하루하루를 생활고를 걱정하며 살게 된 이 평범해진 샐러리맨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꼭 안아주던 아내 때문이었다. “행복하다, 이러면 되는 거다. 이렇게 살자.”고 그는 생각한다. 

 

류승룡은 장주원이라는 재생 회복 능력을 가진 이가 겪는 피, 땀, 눈물을 공감시키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어딘지 계산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캐릭터는 류승룡을 만나 액션과 멜로에서 일관성을 느끼게 해준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계속 직진하는 액션과 멜로라니. 초능력자라도 이토록 인간적인 냄새가 느껴지게 된 건, 이 캐릭터의 독특한 현실은유와 더불어 이를 구현하고 표현해낸 류승룡의 공이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 캐릭터는 <무빙>이 그리려 하는 세계, 즉 초능력자라는 판타지를 가져와 그들이 마주한 비정한 현실을 그리려는 그 세계를 납득시키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장주원에 설득되면 <무빙>이 가진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는 초능력자들이 날아다니고 총에 맞아도 재생되는 그런 장면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 깊은 이들의 내면에 공감했으니 말이다. 류승룡의 미친 연기는 바로 이런 점에서 <무빙>의 든든한 반석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사진:디즈니+)

'오! 주인님', 조진국 작가가 보는 인간·공간·시간의 따뜻함

 

'작가님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MBC 수목드라마 <오! 주인님>의 4회 부제는 극중 인물인 오주인(나나)이 한비수 작가(이민기)에게 하는 대사를 가져온 것이다. 어딘지 결벽증에, 자존감 과잉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나르시스트처럼 보였던 한비수 작가가 알고 보니 점점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오주인이 느끼게 됐다는 것.

 

물론 이 구도는 멜로에서 늘 등장하는 코드 중 하나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가게 되는 그런 관계의 발전. 하지만 뻔한 코드라고 해도 이걸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건 시청자들에게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 <오! 주인님>을 쓴 조진국 작가는 한비수 작가가 치매를 앓는 오주인의 엄마 윤정화(김호정)를 대하는 그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그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낸다.

 

한비수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는 오주인이 집 냉장고에 가득 붙여 놓았던 엄마를 위한 메모들을 문구점에서 일일이 코팅을 해 반듯하게 붙여 놓는 장면을 통해 어떤 예감을 준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그의 결벽증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문구점 아저씨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코팅해간 걸 보고 치매환자가 집에 있느냐며 외면하고도 싶고 골치 아프기도 하지 않냐고 말하는 아저씨에게 한비수 작가는 오주인이 들으라는 듯, "가족이 아프면 더 신경 써야지 골치 아프면 어쩌자는 거예요?"하고 따뜻한(?) 비수를 날린다.

 

한비수 작가는 어쩌다 윤정화가 자신을 죽은 남편이라 착각하게 되자,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함께 식물원에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렇게 데이트도 해주고 도와준 것에 대해 오주인이 감사함을 표하자, 한비수 작가는 도와줄 생각 같은 거 없었다며 엄마는 환자가 아니라는 의외의 말을 한다. "엄마한텐 보통 사람한텐 없는 능력이 하나 있는 거야. 과거를 지금의 시간으로 불러들이고 그걸 진짜로 만드는 능력. 운 좋게도 그런 능력 있는 엄마를 내가 하루 빌린 거고." 그날의 말과 행동들은 어딘가 퉁명스럽게만 보이던 한비수 작가가 사실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건 <오! 주인님>을 쓴 조진국 작가의 면면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을 조진국 작가는 인간, 시간, 공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찾아낸다. 한비수 작가는 퉁명스럽게 말하긴 하지만, 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놓지 않는다. 신경 쓰이고 걸리적거린다는 게 그의 표현이지만, 사실은 무관심하지 않게 그 입장을 들여다보려는 따뜻함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치매라는 병증을 '과거를 지금의 시간으로 불러들이고 그걸 진짜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조진국 작가는 '시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또한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는 지나간 과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관점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오주인이 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집에 깃들어 있는 과거나, 오래된 LP판을 파는 가게, 그 가게를 운영하며 그 LP판처럼 사람 좋은 아저씨로 나이든 김창규(김창완), 그를 오랜만에 찾아와 '오빠'라 부르며 순식간에 과거 청춘의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 한비수의 어머니 강해진(이휘향), 그 강해진이 오주인의 엄마 윤정화와 다시 만나 이어가는 우정의 이야기까지, 기억과 추억으로 덧칠해진 따뜻한 시간들이 묻어난다.

 

게다가 어려서는 오주인이 한비수가 살던 집을 그의 어머니에게 사서 들어감으로서 두 사람이 얽혀지는 관계는 다름 아닌 그 한옥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에 강박적으로 문을 닫으려는 한비수와,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열 듯 문을 열어두는 오주인이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해하는 과정도 다름 아닌 공간으로 은유된다. 누군가 살고 있는 공간이 그 살았던 사람의 마음처럼 은유되고, 그 공간을 통해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그래서 닫혔던 그 문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이야기로 표현된다.

 

<오! 주인님>은 전형적인 멜로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꾸만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드라마가 같은 상황을 그려도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투영되어서다. 그래서 <오! 주인님>을 보다 보면 나나가 한비수를 보듯, 작품을 쓴 작가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들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갖게 될 정도로.(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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