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티’, 김남주의 독한 연기가 남다른 느낌을 주는 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드는 걸까. JTBC 새 금토드라마 <미스티>는 성공한 앵커 고혜란(김남주)이 처한 만만찮은 상황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치열하게 싸워 여성 앵커로서 성공한 인물이지만, 점점 나이 들어가고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앵커라면 실력과 경륜이 가장 중요할 수 있지만, 방송사가 고려하는 건 오로지 시청률이다. 그래서 당장 시선을 끄는 젊은 기자 한지원(진기주)을 그를 밀어내고 앵커 자리에 앉히려 한다.

고혜란은 앵커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방송사가 어떻게든 인터뷰를 잡으려 하는 케빈 리(고준) 프로골퍼 섭외를 앵커 자리보전을 위한 조건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케빈 리를 섭외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려는 그 순간에 오랜 병원생활을 해왔던 엄마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결국 병원이 아닌 공항을 선택한다. 엄마 또한 늘 그에게 말했었다. 넌 성공해야 한다고. 그러니 그가 간다고 살아날 수 없는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보다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 

성공을 위해 달려왔고 그렇게 거머쥔 최고의 위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비정한 고혜란을 남편 강태욱(지진희)은 납득할 수가 없다. 유명한 아내를 위한 마지막 배려로서 자신을 놓아줄 때까지 그냥 묵묵히 각자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그는 그래서 고혜란과는 쇼윈도 부부의 삶을 살아간다. 고혜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생활에서는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이들과 싸워야 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자신이 기댈 곳은 전혀 없다. 스스로 아이를 지워버릴 정도로 그의 삶은 성공에만 맞춰져 있으니 그런 삶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선택한 삶이 점점 추락해가고 있는 걸 느낄 때, 그의 앞에 과거의 연인이었지만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그가 버렸던 케빈 리가 성공한 프로골퍼로서 나타난다. 그것도 보잘 것 없이 살아왔던 그의 여고시절 단짝 서은주(전혜진)의 남편으로. 독하게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고혜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서은주의 존재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과거 자신이 버렸던 케빈 리 역시 은근히 자신을 도발하는 상황은 또 어떻고.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케빈 리를 섭외하고 자꾸만 그와 얽혀들게 되지만.

하지만 고혜란은 결코 선한 인물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지원에게 앵커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그가 유혹의 시선을 던지는 케빈 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은 사진으로 한지원을 밀어낸다. 그에게 그 사진을 찍어준 기자 윤송이(김수진)는 그를 “독한 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좋다고. 

이건 마치 여성 앵커 버전의 <하얀거탑>을 보는 것만 같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 병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갖가지 술수들을 다 동원하는 것처럼, 고혜란도 방송국 앵커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자행한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 또한 저버리는 단계에 이른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절박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방송국 앵커 자리는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유리천정이라고 불린다. 남성 앵커는 나이가 들수록 경륜으로 받아들이지만, 여성 앵커는 나이가 들면 교체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이 앵커만큼 여성들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유리천장을 실감하게 하는 직종이 있을까. 그러니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한 년”이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여성이라는 성차에 대한 편견까지 공공연한 곳이 바로 거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미스티>의 고혜란에게는 그 독한 행보들이 결코 바람직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면서도 동조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독하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강한 공감이 깔려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보면 10년 전 <하얀거탑>이 성공을 위한 질주와 그로 인한 파국을 통해 개발시대의 가장들의 자화상을 장준혁이라는 캐릭터로 담아냈던 것처럼, <미스티>는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는 차별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독하게 버텨낼 수밖에 없는 커리어우먼들의 자화상을 고혜란이라는 캐릭터로 담아내고 있다. 

오랜만에 드라마로 돌아온 김남주는 그래서 고혜란 역할을 연기하는 모습 속에 여성 연기자로서 갖는 정서적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 연기자들 역시 나이 들어갈수록 그 위치를 계속 버텨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현실이다. 젊은 연기자들이 치고 올라오고 방송은 더더욱 시청률에만 집중하는 현실이니. 김남주의 연기가 <미스티>에서 남다른 느낌을 주는 건 이러한 캐릭터와 배우 사이에도 존재하는 공감대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다.(사진:JTBC)

<개과천선>의 김명민,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

 

역시 김명민이다. 그가 연기하는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변호사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첫 회부터 일제에 강제 징용당한 어르신들의 반대편에서 서서 일본기업을 변호하는 김석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로펌 변호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 재벌 2세의 강간치상을 변호하면서 피해자 여자 연예인의 치부를 드러내 자살시도까지 하게하고 결국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지독한 악마지만 그에게서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건.

 

'개과천선(사진출처:MBC)'

<개과천선>의 로펌 변호사는 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의 변호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것은 인권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고용 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다. <개과천선>에서 김석주가 다니는 차영우펌은 돈 되는 재벌 그룹들을 주 의뢰인으로 상대하는 로펌이다. 차영우펌의 직원이랄 수 있는 김석주는 따라서 이들 재벌 그룹들의 갖가지 귀찮고 더러운 일들을 처리해주며 살아가야 한다.

 

재벌들이 이러한 로펌에 변호사들을 자신들의 일에 대리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일은 때로는 무고한 샐러리맨들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벌2세들의 여자 문제 같은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치졸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일들은 양심에 불편함을 준다. 따라서 로펌 변호사들이 그 불편함을 대리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김석주라는 변호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결국은 차영우펌이라는 조직에 고용된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욕망이 존재하겠지만 그도 그런 일들을 겪으며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오면 죄책감이 없을 수 없다. 바로 그 죄책감이야말로 그가 돈을 버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의 연기가 주목되는 지점은 김석주라는 인물에서 악마 같은 직업인의 모습과 언뜻 언뜻 숨겨진 인간적인 고충이 적절히 드러난다는 점일 게다. 김석주는 악명 높은 변호사로 극화되어 있지만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네 샐러리맨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직의 생리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직업과 생계라는 이름으로 죄책감이 상쇄된다. 김석주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과거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이라는 끝없는 욕망을 가진 천재외과의사가 과오를 저지르고도 대중들이 그에게 연민을 보낸 까닭 역시 그 인물에게서 샐러리맨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오르기 위해 뭐든 저지르지만 결국은 제 몸 하나 망가뜨리는 결과에 처하는 안타까운 삶.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는 그래서 그 장준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흥미로운 건 이 김석주가 사고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말 그대로 개과천선을 한다는 설정이다. 이건 어쩌면 혹여나 조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가 아닐까. ‘모든 걸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건 그 불편한 삶의 끝단에 서면 누구나 떠올리는 소망일 게다. 이 변신과정에서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저력은 여지없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피도 눈물도 없는 데드마스크가 심지어 바보처럼 실실 웃는 얼굴로 바뀌는 그 과정이 주는 통쾌함이란.

 

<개과천선>은 그래서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의 판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젊은 날의 마음이 생계를 위한 밥벌이와 무한 경쟁 속에서 서서히 희석되어 어느 새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돌아갈래하고 외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 우리는 삶에 희석되어 없는 것처럼 치부하던 일상인들의 불안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야왕>, 수애는 왜 그저 악녀로 전락했을까

 

<야왕>의 주다해(수애)는 왜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나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되지 못했을까. 이들 캐릭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욕망은 비뚤어진 것이어서 이들은 모두 악역을 자처하지만 그렇다고 그 악역이 모두 비난받는 건 아니다. 미실은 악역이면서도 자신만의 현실적인 통치 철학을 보여줌으로써, 또 장준혁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 역시 사회라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의 희생자라는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에 이르러 시청자들을 고개 끄덕이게 한 인물들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지만 <야왕>의 주다해는 다르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동정적인 시선이 사라져버린 전형적인 악녀에 머물러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첫 등장에서 죽은 어머니 사체 옆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모습은 이 가정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여인이 앞으로 달려갈 욕망의 질주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후 주다해의 모습은 줄곧 시청자들의 이해를 받기보다는 안쓰러울 정도로 성공에 집착하는 악녀로 일관되었다.

 

의붓아버지를 죽이고는 하류(권상우)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그녀에게 헌신하는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그를 배신하고 심지어 감방에 들어가게 한데다 딸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재벌그룹 아들 백도훈(정윤호)의 약점(사실은 그가 누나 백도경(김성령)의 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와 결혼하고, 하류(대신 쌍둥이형인 차재웅이 죽게 되지만)의 살인을 사주한다. 이것도 모자라 백도훈마저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전형적인 악녀, 그녀가 바로 주다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스토리에 세계관이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악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차원으로 되돌리는 간편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주다해는 아무런 이해도 받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했다. 결국 이것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잘못은 주다해가 나쁘기 때문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도 단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남녀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 때문이다. 즉 <야왕>이라는 작품에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이 들어가 있다. 물론 선악구도로 나누어 놓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성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그 자체로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 남성은 당연히 성공을 꿈꾸어야 하지만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듯한 관점. 이것은 주다해의 성공 욕구에 대한 근거를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한 시선이다.

 

이렇게 주다해라는 악녀가 시스템이 탄생시킨 괴물이 아니라 그 나쁜 심성 때문에 생긴 인물이 됨으로써 <야왕>은 그저 온전한 복수의 게임으로 전락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때로는 마치 성공하기 위해 발악하는 여성과 그것이 무조건 잘못 됐다는 성차별적인 전제 하에 그녀를 막으려는 남성의 대결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만일 주다해를 좀 더 이해될 수 있는 악녀로 그렸다면 이 드라마는 훨씬 풍부한 관점을 가지면서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주다해를 수애라는 어딘지 도도하고 믿음이 가며 그 자체로 동정심마저 유발하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수애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주다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해보라. 어쩌면 <야왕>은 그저 극악스럽기만 한 막장으로 굴러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엉성한 얼개의 스토리는 막장에 가깝지만 그래도 연기자들이 그것을 연기로서 커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연기자들이 갖고 있는 힘은 세계관이 부재한 허술한 <야왕>의 대본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보게 만드는 힘이다. 권상우의 연기가 그렇고 김성령의 연기가 그렇다. 물론 정윤호는 연기력 부족에다가 그저 바보가 되어버린 백도훈이라는 캐릭터의 한계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긴 하지만.

 

<야왕>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게임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시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지 않고 그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태도가 그렇고,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여성 차별적 시선도 그렇다. <야왕>의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이 바로 주다해다. 그 어떤 사회의 문제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온전히 태생적인 악녀가 되어버린 인물. 볼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브레인', 이강훈이라는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

'브레인'(사진출처:KBS)

신하균은 '브레인'에 등장하며 '하균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가 가진 발군의 연기력이 한 몫을 한 것이지만, 더 큰 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강훈이라는 캐릭터의 힘이다. 별로 착해보이지도 않고 성격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이 인물.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간다. 그의 끝없는 추락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마음 한 구석을 허물어뜨린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캐릭터의 무엇이 이토록 대중들을 들끓게 만들까.

사실 이강훈에서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다. 불나방처럼 기꺼이 욕망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인물. 그래서 성공을 위한 동아줄이라면 서슴없이 잡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보면 어딘지 연민이 생기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토록 성공에 집착하게 만드는 '더러운' 사회의 부조리를 통찰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 이강훈에게선 분명 장준혁의 냄새가 난다.

장준혁처럼 이강훈이 태어난 곳은 개천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개천이다. 가난한 집안, 일찍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뇌질환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다시 돌아왔지만 끊임없이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가난을 환기시키는 어머니. 게다가 그 어머니는 자신의 라이벌 서준석(조동혁)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여동생은 자신의 병원 커피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 이 태생적으로 결정된 비운의 가난한 삶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트라우마가 성공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그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뿐. 그래서 누구보다 더 철저히 실력을 갖추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어디 세상이 실력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곳인가.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강훈도 고재학(이성민)의 밑으로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정치로 맺어진 관계란 영원할 수 없다. 고재학은 결국 이강훈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먹고는 팽해버린다.

여기까지는 장준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브레인'이 흥미로운 건, 김상철(정진영)이라는 우리가 흔히 의술이 아니라 인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행하는,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다시 되살아난 듯한 인물에서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이강훈에게 '욕망'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의술을 펼치라고 말하고, 바로 그렇게 이강훈을 '인간이 되지 못한' 심지어 '파렴치한' 자로 몰아붙인다. 더 이상 비전이 없는 이강훈은 다른 병원을 알아보려 하지만, 그것마저 김상철 교수가 내린 평판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김상철 교수는 천사 같고 이강훈은 욕망에 걸신들린 악마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진짜 그리는 것이 이런 권선징악일까. 과연 이강훈은 개과천선할 것인가. 그런 결론을 향해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는 도식이다. 그것보다는 김상철 교수와 이강훈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이 뒤집어지는 반전이 훨씬 재미있고, 또 그 반전이 주는 의미도 더 깊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복선은 이강훈 아버지의 죽음이 김상철 교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암시를 통해 이미 깔려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이강훈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이강훈 같은 괴물(?)의 탄생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강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이다. 이강훈이 그렇게 고통스런 괴물이 된 것은 태생에 의해 비롯된 트라우마(이를테면 아버지의 죽음 같은) 때문이란 점이다. 사실 김상철 교수는 이강훈의 그 괴물 같은 심성을 질책하기만 했지, 왜 그런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됐는지 이해해보려 한 적이 없다. 수많은 환자들 앞에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김상철 교수는 정작 자신의 제자인 이강훈이 가진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레인'이 가진 진가가 드러난다. '브레인'은 뇌 질환을 수술하는 외과의사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겉면에 불과하다. 실제는 이 의사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이강훈이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뇌리에 남긴 트라우마이고, 어쩌면 김상철 교수의 끝없는 환자에 대한 희생과 봉사 역시 젊은 시절 한 때 잘못했던 일이 남긴(이를테면 이강훈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깊은 트라우마의 결과일 수 있다. 결국 '브레인'에서 환자는 뇌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만이 아니다. 의사들 역시 똑같은 '기억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강훈이라는 캐릭터가 악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우리네 마음 속의 깊은 공감과 연민을 끌어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네 서민들도 이 낮은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아마도 이강훈 같은 트라우마를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처럼 선량해지기보다는 어딘지 악착같이 살아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브레인'은 바로 이강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끄집어내는 드라마다. 신하균이 하균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토록 우리네 대중정서를 건드리는 이강훈이란 캐릭터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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