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 어른거리는 루저와 남자

언제부턴가 남자와 '루저'라는 단어가 만나면 폭발적인 반향이 일어나는 사회가 되었다.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건드린 이 '루저'라는 뇌관은 그잖아도 힘겨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김혜수와 유해진의 연애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이 단어는 다시 등장했다. 외모와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의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의 열기를 띄었다. 그 기저에는 루저와 위너라는 남성들의 마음 한 구석에 담겨진 불씨가 들어 있었다.

실제 사회 속에서 우리네 남자들의 상황은 그다지 썩 좋지 않다. 남자들은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여성성의 사회 속에서 조금씩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청년실업이니 조기퇴직 같은 사회 분위기는 물론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힘겨운 현실로 어깨를 짓누르지만 문화적인 콘텐츠들은 상대적으로 여성 편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방송에 있어서 여성 편향은 두드러져 왔다. 그것은 TV의 주시청층이 중년여성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현실에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와 막 TV를 켰을 때, 거기 존재하는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현실로 돌아갔을 때도 어떤 힘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현실에 부재한 것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작년 '아이리스'가 방영된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것이 가진 남성적인 코드 때문에 성공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성공했다. 이병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액션과 멜로 양면을 잘 섞어내는 연기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남성적인 코드는 물론이고 여성적인 코드도 잘 맞춘다는 이야기다.

'아이리스'에 이어 방영된 '추노', 이 두 드라마는 장르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묘하게도 비슷한 점들이 있다. 먼저 '추노' 역시 마초적인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의 멋진 몸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어떤 이야기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것은 '아이리스'의 이병헌이 연기한 김현준이라는 캐릭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드라마로서는 보기 힘든 영화적 연출 장면들을 선보였다. 즉 영화적으로 연출된 장면 속에서 강한 남성들이 아름다울 정도로 멋지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추노'는 그 캐릭터들의 면면을 통해 이 현실의 남성들의 억눌린 감성을 건드린다. '추노'는 양반가의 외아들이었다가 멸문하고 도망친 노비를 쫓는 추노꾼이 된 대길, 조선 최고의 무장이었으나 도망노비가 되어버린 태하, 그리고 그 사이에 서서 쫓는 자의 첫사랑이자 쫓기는 자의 마지막 사랑이 된 언년이(이다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대길은 아마도 현재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루저'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겉으로 보면 인간 말종의 '루저'처럼 보이는 대길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고 보면 작년 한 해,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이 그토록 약진을 했던 데는 이런 루저와 위너라는 두 단어를 가슴 한 구석에 불씨처럼 품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최고 히트 예능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해피선데이'의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은 모두 남성들을 캐릭터로 세우고 있고, 그 캐릭터들은 저 '무한도전'이 일찍이 세워두고 성공시킨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고 있다. 그 평균 이하가 열심히 하는 모습 속에서 공감과 감동과 웃음을 주었던 것이다.

'추노'의 남자들이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평균 이하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짐으로써 현실에 치여 답답한 남성들의 가슴 한 구석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마초적으로 보이는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드라마 속 남자들이 돈과 배경 같은 권력을 통해 매력을 보이려 했다면, 이 남자들은 오로지 노동으로 단련된 멋진 몸뚱아리 하나로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여성성으로만 포장된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 가요계에 '짐승남' 같은 마초적인 아이돌들이 등장하고, 드라마에서 '버럭남'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추노'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으면서, 이른바 루저와 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눌린 감정을 터트리는 남성 캐릭터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추노'의 성공은 어쩌면 여성 편향적으로만 되어왔던 드라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지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퓨전사극, 트렌디 드라마의 변용으로서의 로맨틱 코미디, 미국 드라마와 우리 드라마 사이에서 접합점을 찾아가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의 부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모두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이런 시도는 구태의연한 설정의 트렌디나 불륜, 불치 같은 자극적인 설정의 과거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된 바가 크다.

그 과거 드라마들의 소재 중 현재 그나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륜드라마뿐이다. 시절이 독하다 보니 ‘독한 불륜(불륜드라마)’이나 ‘중독성이 강한(전문직 드라마, 사극)’ 혹은 독한 시절 잊고 웃고 싶은(로맨틱 코미디) 쿨한 드라마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한 인간애 같은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를 찾아보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가치를 발하는 것은 모두가 외면한 따뜻함을 드라마 속으로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작중 캐릭터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시골 처자, 그것도 에이즈에 걸린 아이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영신(공효진)과 잘 나가는 의사 민기서(장혁), 그리고 석현(신성록)이 만들어내는 삼각구도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구조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혀 트렌디가 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민기서와 석현은 영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소유하려 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인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단지 영신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가는 사람들, 할아버지(신구)와 이봄(서신애)을 같이 끌어안는다.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떨어지는 눈물은 독한 관계 등으로 억지스럽게 짜내지는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눈물, 감동이다. 그것은 짐이 될 수도 있는 할아버지와 딸을 늘 밝게 끌어안는 영신의 모습에서, 그런 영신의 어려움을 알고 집을 뛰쳐나가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 나이에도 현실을 밝게 받아들이는 조숙해져버린 봄이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엮어 가는 가족애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기에 구질구질한 눈물이 아닌 웃으면서도 나오는 그런 눈물이다.

감동을 증폭시키는 것은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자들의 명연기이다. 울음을 참고 밝게 웃는 공효진과 천연덕스런 아이 서신애 게다가 ‘치매연기의 달인’으로까지 불리는 신구의 연기가 그렇고, 군 제대 후 더욱 깊어진 연기를 보이는 장 혁이 그렇다. 특히 장 혁은 본래부터 투덜이의 아이콘을 가진 배우였지만, 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가볍지만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아픔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이런 명 연기자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틀을 빠져나와 민기서와 석현의 따뜻한 시선을 끼워 넣는다. 그러자 가족의 범주는 더 넓어진다.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 그래서 거기에 가족 같은 관심과 사랑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은 공감과 감동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자 드라마는 가족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자들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영신과 그 가족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들이 된다. 미혼모라는 굴레의 여자와 에이즈에 걸린 아이, 거기에 치매를 앓는 노인은 어찌 보면 이 한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내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작가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이것이 독한 세상에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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