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고선웅 연출 돋보인 ‘퉁소소리’의 묵직한 희비극

퉁소소리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매일 새벽 아픈 어깨를 이끌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내게 묻곤한다. 미력하나마 무언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하다못해 작은 날갯짓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미세한 떨림이나마 전해져 죽지 않았다는 걸 드러낸다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믿고 보는 고선웅이 각색하고 연출한 연극 ‘퉁소소리’는 바로 그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끝내 버텨낸 이들의 대서사시를 통해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려낸 희비극이다. 

 

아마도 현재의 청년들은 수능시험에 지문으로 등장하곤 했던 ‘최척전’을 기억할 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의 전쟁 통에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는 최척과 옥영 그리고 그 가족들의 대서사시다. 조선에서부터 명나라, 일본, 안남(베트남)까지를 넘나드는 이 소설은 1621년 조위한이 당대 벌어졌던 전쟁의 참상 속에서 민초들이 겪은 고통을 최척과 옥영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으로 그린 작품이다. 극작가이자 연출자인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은 그 최척전을 원작으로 가져와 특유의 유머와 풍자를 섞은 기발한 연극무대로 내놨다.

 

엄청난 스케일을 가진 원작이 가진 감동은 이 작품이 ‘기우록(奇遇錄)’이라 불리는 것처럼 기막힌 이별과 만남의 과정에서 나온다. 물론 그건 우연적 요소가 짙지만,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운명들이 전하는 연민의 정서와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헤어진 자들은 그렇게 다시 만나고, 만났던 이들은 또다시 헤어지며 끝끝내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만나게 된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즐거운 일이 있다”는 일관된 메시지는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작품이 현재에도 울림을 주는 이유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과, 그곳에서 죽어가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지만 그저 글 한 줄, 뉴스 한 대목으로 치부되는 세태에 이 작품은 거기 소중한 삶들이 있다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이건 딱히 전쟁이 아니라도, 저마다의 치열한 각자도생의 전쟁을 각자의 삶에서 치르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든 생존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살아남아라. 그러면 끝내 즐거운 일 있을 것이니. 

 

‘퉁소소리’가 놀라운 건 이 아시아를 넘나드는 엄청난 스케일의 서사를 작은 무대 하나 위에서 생생하고 또 속도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고선웅 연출은 자칫 비감으로만 흐를 수 있는 서사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더한 연출로 발랄함을 더했고, 그 발랄함은 어느 순간에는 희극과 비극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사태의 다른 면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묵직한 울림으로 변모한다. 

 

속도감을 만들어낸 건 막과 장의 구분을 만드는 연극의 암전을 지워내고, 무대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보조자들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위 소품들을 옮겨줌으로써 극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는 연출방식 덕분이다. 이것은 고선웅 연출자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연출(완벽함이 가진 인위성을 덜어내고 성기지만 자연스러운)철학이 투영된 것으로, 이 검은 옷의 보조자들이 가진 이미지는 삶 저편의 어떤 힘(운명이나 죽음 같은)을 상징하는 듯한 뉘앙스까지 담긴다. 그래서 후반부에 가면 최척이 그 검은 옷으로 상징되는 자들을 뚫고 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소름돋는 감동이 생겨나기도 한다. 

 

사실 이처럼 전쟁으로 멀리 떠났던 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담은 조선시대판 오딧세이는 최근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2’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여정 속에서 헤어졌던 부부가 만나고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운명적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엄청난 스펙터클로 막대한 물량의 자본을 통해 연출된 영화 ‘글래디에이터2’가 끝내 보고나면 뻔한 복수극의 허무함으로 남는대신, 그저 소박한 무대 하나지만 그 광대한 서사들을 물 흐르듯이 들려주는 ‘퉁소소리’는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그 이유는 ‘살아있다’는 그 의미에 대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깊이 있는 시선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살아있다는 건 숨쉰다는 뜻이고, 퉁소소리는 바로 그 숨을 불어 넣음으로써 만들어내는 음악이다. 누군가 숨을 불어넣어야 그건 살아있는 게 되는데 그건 또한 예술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척이 그 멀고도 먼 외딴 나라에서 퉁소를 불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드러내고, 그 소리를 듣고 아내 옥영이 기적처럼 나타나는 장면은 그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의 비의처럼 다가온다. 소리내어라. 그래서 살아있다는 걸 드러내는 일은 기적 같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고 ‘퉁소소리’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퉁소소리’는 또한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또한 던져 놓는다. 그건 삶을 담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 무대를 통해 증언하는 것이다. 매일 아픈 어깨를 이끌고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아주 미력하고 소소한 세상 어느 누군가의 작은 소리와 몸짓 하나도 그래서 예술 아닌 게 없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연극'퉁소소리')

K콘텐츠 파워, 실감케 한 러시아 한류 그 현장에 가다

문화는 막힌 길도 에둘러 뚫고 나간다고 하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필자가 느낀 건 전쟁으로 인해 막힌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국면들 속에서도 한류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청년들이 보여주는 한류 열풍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참여한 대학생들

러시아인이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를 하는 진풍경

“여기서 뒤주는 사도사제가 가둬져 죽은 뒤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Agust D)가 낸 ‘대취타’ 중 ‘과건 뒤주에 가두고’라는 가사를 설명하는 한 러시아 대학생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말하는 러시아인들도 놀랍지만, 그들이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사도세자’ 같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놀랍다. 지난 4-5일 양일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의 풍경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둘쨋날 마지막 테스트로 치러진 ‘주제발표를 통한 말하기 시험’. 다뤄지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의 명절 같은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재 가부장제를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젠더의식, 퓨전화되고 있는 국악, 한복 등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소재로 주제를 발표하는 대목에 빠지지 않는 건 한류 콘텐츠들이다.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 건 ‘대취타’의 가사를 설명하면서고, 한국의 젠더의식 변화를 이야기하며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한다. 퓨전 국악으로서 이날치가 소개되고 한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가 소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현재 러시아의 한류가 K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K컬처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러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러시아에서는 비우호국이 됐다. 하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청년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12월에 내놓은 ‘러시아 특화보고서-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한류 영향’을 보면 2022년 말까지 러시아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790만 명의 한류 팬을 보유해 한류 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 한국어는 2023년 가장 인기 있는 언어 중 하나로 한국어 교재 및 자습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32%가 증가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한 식당에서 참가한 대학생들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한국어 교수님들(러시아인들)과 함께 이어진 뒷풀이 자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식을 연구한 러시아인 셰프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는 김치전에 잡채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익숙하게 한국어로 환담을 나누며 한식을 즐겼다. 그 풍경은 모스크바가 아닌 종로 어디라고 해도 될법한 한국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막혀 있어 더 뜨거워진 러시아 한류

러시아의 K팝에 대한 인기는 전쟁 이후 유럽 투어에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했다. 러시아 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K팝 투어가 등장했다) 혹은 인접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찾아가는 일도 생겼다. K팝 커버댄스 콘테스트가 올해만 해도 3월, 6월, 7월에 열렸고, 지난 7월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러시아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MTS가 주최하고 러시아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K팝 콘서트에 걸그룹 라잇썸과 송원섭이 무대에 올라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원섭은 빅토르 최 노래를 커버하며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K팝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K콘텐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내 스트리밍 서비스는 대부분 제한되고 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보기가 어렵지만 러시아의 스트리밍업체들이 등장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다른 루트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이들 스트리밍업체들을 통한 K콘텐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MTS 같은 현지 스트리밍 플랫폼의 K팝 관련 조회수는 20% 가량 늘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전쟁 이후 제한된 유럽과 미국 콘텐츠의 자리를 한국 콘텐츠가 채워나가는 형국이다. 공식적인 러시아의 OTT들을 통한 정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SNS를 통한 비공식적인 K콘텐츠의 확산도 적지 않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미드 열풍 때 팬들이 자막을 붙여 올렸던 것처럼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식채널을 통해 ‘기황후’, ‘구미호뎐’, ‘마우스’, ‘도깨비’ 같은 예전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면 비공식채널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최근작들(이를 테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같은)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최근작들까지 극장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 수익을 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러시아에서는 ‘영화제 영화’로 한국영화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이에는 러시아 영화관들이 한국영화를 많이 소개해 보다 대중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행’이나 ‘비상선언’, ‘범죄도시3’ 같은 작품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려울수록 문화 교류는 지속되어야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어나 한식, 패션 등의 K컬처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모스크바에 문을 연 한국 길거리 음식 체인점 치코(CHICKO)다. 떡볶이, 라면, 김밥, 핫도그 같은 한국 분식을 제공하는 이 음식점은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한국의 양념치킨 맛에 반해 창업을 한 곳으로 현재 모스크바 안에만 9개점, 러시아 전역에 4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박 프랜차이즈다. 한식을 팔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화를 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일 줄이 이어진 매장에는 한국드라마와 K팝 관련 사진들과 벽면 가득 한국어들로 채워져있다. 그만큼 러시아 안에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체인점은 한국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뉴를 도입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한 후 메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식의 홍보 마케팅도 한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의 한식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실제로 김이나 커피, 음료, 라면, 소스 등 한국 농식품의 러시아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이도훈 주 러시아연방 대사는 “어려운 시국일수록 특히 학술, 문화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필자에게 그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의가 결국은 “한러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사뭇 소원해졌지만, 이 현재의 상황이 바뀔 거라 낙관하는 건 바로 미래를 이끌 러시아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관련 우리네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의 양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딘가 전운이 감도는 모스크바를 상상하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건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러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도 더더욱 열기를 띠고 있는 한류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오히려 실감케 한다. 한러 교류의 민간외교로서 한류가 그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는 한, 향후 상황이 바뀌었을 때 한러 관계의 변화는 한류를 타고 봇물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글:시사저널, 사진:한국국제교류재단)

‘연인’, 남궁민과 안은진의 파란만장한 사랑에 빠져드는 이유

연인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터지면서 드라마가 탄력을 받았다. 5%(닐슨 코리아)대에 머물던 시청률이 병자호란을 두고 펼쳐지는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의 긴장감 넘치면서도 절절한 서사를 기점으로 급상승했고 7회에는 드디어 10%대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처럼 <연인>이 탄력을 받은 건 전쟁 상황이 각성하게 만든 이장현과 유길채의 진면목이 매력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떨어져 있게 된 두 사람 사이에 조금씩 애틋한 마음들이 생겨나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임금을 구하겠다 나서는 이들 가운데서, 임금보다는 사랑하는 이들과 백성을 구하려 애쓰는 이장현의 선택이 현재의 시청자들을 설득시켰고, 그 전쟁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지켜낸 유길채의 납득되는 성장이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했다. 

 

이래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서사가 계속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고 피난 가던 이들은 다시 고향을 찾았다. 헤어졌던 이장현과 유길채도 다시 만났고, 유길채가 짝사랑했던 남연준(이학주)도 전장에서 살아 돌아와 경은애(이다인)와 혼례를 치렀다. 청보리밭에서 이장현과 유길채가 전쟁 전처럼 아옹다옹하다 함께 쓰러져 입맞춤을 하는 장면은 이제 또다시 전쟁 전의 달달한 사랑의 밀당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병자호란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여파가 남긴 상흔은 여전했고, 그 속에서 이장현과 유길채의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이장현이라는 인물의 본격적인 서사는 사실상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끌려가게 된 소현세자(김무준)를 따라 심양에 역관으로 따라가게 되면서 이장현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지고, 이렇게 또 다시 이역만리 떨어지게 된 이장현과 유길채의 운명적인 사랑도 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최영우)의 신임을 받는 청나라 여관 정명수(강길우)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고변을 한 이들이 오히려 대거 숙청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장현 또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의 전쟁은 계속 이어진다. 이장현이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지가 궁금하고, 이 사건으로 그가 죽은 줄 알고 절망하는 유길채가 다시 그를 만나게 됐을 때 어떤 변화를 보여줄 지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장현이 이 사건을 계기로 시시각각 위기에 내몰리게 되는 소현세자를 어떻게 보필하고 성장시킬 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역사는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된 소현세자가 점점 성장해 그 곳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쌓았고 또 이 곳에 끌려 온 조선인들을 위한 농장도 만들면서 자신의 세력과 영향력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과정에 이장현이라는 인물의 역할을 드라마는 그려낼 모양이다. 

 

물론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결국 생존하게 된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3달도 못되어 사망한다. 그건 드라마 속 인물인 이장현의 삶에도 또 그와 점점 애틋해질 유길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긴 삶의 여정을 통해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는가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 뭉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천진하고 때론 장난치길 좋아하는 이장현과 유길채가 보여준 드라마 초반의 모습은 그래서, 이들이 긴 세월을 거쳐 완전히 달라질 모습과 마주하게 될 때 소회가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건 이들의 삶이 병자호란만이 아니라 평생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놓이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비장함이다.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의 이야기가 갈수록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다.(사진:MBC)

 

'안시성', 호불호 갈리는 압도적 볼거리와 약한 스토리 사이

영화 <안시성>은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달리는 말과 창과 칼을 들고 맞붙는 당 태종의 군대와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장. 살점이 잘려져 나가고 피가 튀는 그 현장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상황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연된다. 

그 영화의 도입 부분을 채운 전투 장면은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걸 보여줄 건가를 말해준다.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을 모를 우리네 관객은 없을 소재. 20만 당나라 최강의 대군을 맞아 고작 5천의 병사들로 이를 물리친 양만춘 성주가 이끈 안시성 전투가 그것이다. 

KBS 대하사극 <대조영>에서도 다뤄졌고,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제작비 400억 중 상당한 액수를 소진시켜 결국 전체 드라마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초반 안시성 전투 스펙터클이었다. 그 정도로 안시성 전투라는 소재를 재연해내려는 역사 콘텐츠들의 야심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니 영화 <안시성>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네 관객들이 대부분 아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재연해낼 것인가가 이 영화가 가진 관건이었다.

<안시성>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다.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성주 양만춘(조인성), 그와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연개소문(유오성), 양만춘을 따르는 무사들로 부관인 추수지(배성우), 도끼를 쓰는 부월수장인 활보(오대환), 그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는 환도수장 풍(박병은)이 있고, 양만춘의 여동생인 백하부대장 백하(설현)와 그의 연인인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가 등장한다. 캐릭터 설명만으로도 그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나갈 것인가가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그런 인물들을 <안시성>은 배치해놓는다. 

이렇게 쉽게 전형적인 인물을 사용하고, 안시성 전투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소재를 가져왔다는 건, 이 영화가 주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이라는 걸 명백히 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볼거리의 재미가 훨씬 더 관객을 몰입시킨다. 특히 우리네 사극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공성전’을 다룬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밀고 당기는 전투의 스펙터클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성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당 태종과 이를 막아내면서 반격을 가하는 양만춘의 치열한 두뇌싸움은 흥미롭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공격 속에서 이를 뒤집는 전략들은 ‘전쟁 스펙터클’이 보여줄 수 있는 극점들을 보여준다. 특히 공간감을 잘 인지하게 만든 연출은 관객이 안시성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여러 국면들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이렇게 스펙터클이 강렬하게 전편에 채워지다 보니 가끔씩 전투의 소강상태에서 이어지는 드라마들이 너무 소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물을 다소 전형적으로 그려 놓은데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인물을 파기보다는 전쟁의 양상에 더 집중하겠다는 영화의 전략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안시성>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볼거리를 찾는 관객이라면 <안시성>의 시종일관 이어지는 전쟁 스펙터클이 압도적인 재미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섬세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인물에 대한 평이한 이야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안시성>은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시각과 청각이 아우러진 그 시스템 속에서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사진:영화'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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