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성찰을 택한 까닭

 

영화 <대호>는 그 제목이나 포스터만으로도 압도적이다. 포스터 한 가득 얼굴을 채운 최민식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영화 속 대호와 그 이미지가 절묘하게 겹쳐진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문구는 그 압도감에 비장미까지 흐르게 만든다. <대호>라는 영화에서 어떤 강력한 액션과 스펙터클 그리고 포스와 맹수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을 기대하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 게다.

 


사진출처:영화<대호>

하지만 생각만큼 <대호>는 관객들에게 쉽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군들이 마치 전쟁을 치르듯 대호 한 마리를 잡겠다고 산으로 진군하고 그들을 성난 호랑이가 궤멸시키는 장면은 잠깐의 카타르시스가 제공하지만 이야기의 서사는 그 시각적인 쾌감이나 액션의 장쾌함에 맞춰져 있지 않다. 대신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 공존이라는 진중한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지리산 깊숙이 살고 있는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대호를 최고의 전리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열을 올리고 지리산은 삽시간에 일본군들의 군화발로 짓밟힌다. 도포수 구경(정만식)은 그 대호를 잡는 데 앞장서지만 조선 최고의 명포수인 천만덕(최민식)은 자신의 오발로 아내가 죽게 된 후 사냥에 나서지 않고 약초를 캐며 근근이 살아간다. 이야기는 결국 이 천만덕이 대호 사냥이라는 사건 속에 어떻게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즉 영화 속 지리산이라는 공간은 일제 치하의 우리 땅을 표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자본과 인간에 의해 짓밟히는 자연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하면 올무라도 놓아 무조건 잡으려는 구경이라는 사냥꾼과, 사냥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 천만덕이라는 사냥꾼의 대결구도 역시 자본화된 세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의식의 문제를 담아낸다.

 

대호와 천만덕은 그래서 동일시된다. 이 두 서로 다른 존재는 똑같이 사냥을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 입장을 공감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법칙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밀어버리고 들어오는 이들이 구경과 일본군들이다. 그들은 생존과 상관없이 욕망에 의해 상대를 포획하고 죽이려 한다. 조선을 침범하고 있는 일본군들처럼.

 

이러한 명쾌한 대결구도와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대호>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는다. 즉 일본군을 물리치는 조선 마지막 호랑이 같은 단순한 그림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화는 통쾌함보다는 진지함이 더 많이 묻어나고 그 스러지는 생명들에 대한 처연함 감정들이 피어난다.

 

아마도 이 부분을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대호>는 꽤 먹먹함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막연한 카타르시스만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적잖은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성찰적인 시선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대중적인 면들을 부각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 마지막 호랑이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마지막 포수가 주는 공감은 충분하다고 여겨지지만.



<육룡>, 국가의 자격 위정자의 자격

 

배신은 장군이 하셨소. 자식새끼 살리겠다고 가짜 왜구질까지 한 이 놈을 살리시면서 장군께서 뭐라 하셨소. 내 자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자식들 식구들 모두 살리며 속죄하라고 가별초에 남기셨소. 근데 이게 뭡니까. 여기 5만 명의 남의 집 자식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겐 10만 명의 어머니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전쟁 계속 하면 10만 부모에게서 5만 명의 자식을 빼앗고 그 피눈물을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요동정벌이라는 무리한 전쟁에 차출되었으나 불어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병사들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성계(천호진)에게 과거 배신의 경험을 가졌던 충길은 그렇게 말한다. 새로운 국가의 창업보다는 명을 따르는 장수의 길을 택했던 이성계다. 태산처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던 그는 결국 병사의 목소리 앞에 마음을 돌린다. “나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드디어 조선 창업의 첫걸음이 되는 이성계(천호진)의 위화도 회군의 이야기가 다뤄졌다. 이미 역사를 통해 누구나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 책에 단 몇 줄로 남아있을 이야기. 하지만 <육룡이 나르샤>는 이 몇 줄에 국가란 무엇이고 또 위정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담아낸다.

 

최영(전국환) 장군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요동정벌이라는 전쟁을 이성계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한다. 이 무리한 전쟁으로 결국 나라가 절단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전쟁에 차출될 장정 5만 명이면 그 나라의 농사는 어찌할 것이며, 만일 전쟁 중 왜국들이 뒤통수라도 치는 날이면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심도 없지만 백성도 없는최영은 대업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당에서 논의도 없이 독단으로 밀어붙인 전쟁은 위정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에 차출된 백성들은 전쟁도 치르기 전에 죽어나간다. 불어난 압록강에 무리하게 말뚝을 박다가 죽고, 역병에 죽는다.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겠다던 무휼(윤균상)은 전쟁의 실상을 보고는 이딴 게 무슨 전쟁이야라고 말하지만, 조영규(민성욱)이딴 게 바로 전쟁이라고 말한다. 요동정벌이라는 그럴 듯한 대업을 얘기하지만 전쟁은 참혹하다.

 

역사에서 위화도 회군은 역사적 기록 속에 조선이 어떻게 세워졌는가를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지만 <육룡이 나르샤>는 그 회군에 대한 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극화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현재적인 관점 또한 들어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참 많은 대중문화의 콘텐츠들이 현실을 지목하며 던진 질문이 여기서도 등장한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가.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국가(國家)’의 한자를 풀이하며 그 의미를 설파한다. “장군 나라 국자는 창으로 땅과 백성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이게 나라입니다. 이 나라 국에 이 글 자(집 가)를 더하면 땅과 백성을 창으로 지켜내어 가족을 이룬다. 이것이 국가입니다.” 너무나 명쾌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명쾌한 국가의 정의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한 현재에도 그만큼의 무게를 가진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 아니 그 국가의 자격은 무엇일까. 나아가 위정자들의 자격은 무엇일까.



<징비록>, 선조에 실망할수록 광해를 희망하게 되는 까닭

 

세상에 이런 통치자가 있을까. KBS <징비록>의 선조(김태우)는 임진왜란의 전란 통에 도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또 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심지어는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명나라로의 망명을 시도하려는 선조는 명나라 황제가 관전보(여진족과의 국경지대)의 빈 관아를 빌려주겠다는 굴욕적인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자기 안위만을 위해 도망치며 절치부심운운 변명만 늘어놓는 선조에게 가까운 신하들조차 등을 돌렸다. 명나라 망명에 극렬하게 신하들이 반대하자 선조는 급기야 광해군(노영학)에게 조정을 맡기고 떠나는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단행한다. 이런 선조에게 류성룡(김상중)필부처럼 행동 한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선조의 행동은 백성들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명나라 황제가 위로조로 보내온 은자를 신하들에게 포상으로 내리자 오히려 신하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 포상은 왕과 함께 도주하고 있는 자신들이 아니라 왜군과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가야 하는 것이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구휼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걸 선조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 관아를 털어 군량미를 탈취하자 그들을 회유해 그 죄를 사해주는 대신 군량미를 회수한 류성룡의 처사에 선조는 발끈하는 모습이었다. 관아를 턴 백성들이 왜 그랬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처벌하지 않은 류성룡의 처사와 이를 허한 광해군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왕으로서의 존중을 받으려는 통치자. 도대체 그 누가 이런 통치자에게 지지를 표할 것이며, 존경을 표할 것인가. 게다가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이 점점 광해군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며 분조를 거두고 자신이 국사를 맡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동은 이미 광해군을 중심으로 민심이 모여 국난 극복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터에 찬물을 뿌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조를 보면 왜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게 됐는가 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제 안위만을 살피는 통치자가 위에서 군림하는 한 그 국가가 온전할 리가 만무다. 심지어 평시에 그를 따르던 신하들조차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은 전시에 그 통치자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조의 무능을 넘어선 무개념은 새롭게 등장한 광해군의 행보를 하나의 희망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도망치기 보다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진을 혼란시키고 관군을 독려하는 길을 선택하려 한다.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류성룡의 마음은 아마도 당대의 백성들의 마음이자 지금 현재 이 사극을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것이다.

 

MBC 사극 <화정>은 바로 그 선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죽어가는 선조 앞에서 광해는 절규한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선조에 대한 깊은 원망을 광해는 드러낸다. 역사는 광해를 이라는 호칭을 붙여 폭군으로 기록하지만 <징비록>을 통해 선조의 행위를 보다 보면 광해의 깊은 고통이 이해가 된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는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 위기에 맞섰던 광해를 내치려 한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징비록><화정>이 기묘하게도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에 지금의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들이 이 두 사극을 통해 많은 것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선조에 대해 실망할수록 광해에 대한 지지의 마음이 커져가는 건 그래서 당대의 백성이나 지금의 시청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그건 알아라. 양반이 내지도 않는 조세, 우리처럼 피죽도 못 먹는 사람들이 내고 평생 군역에 시달린다. 특산품까지 공납하라고 목을 죄니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란 말인가. 이런 나라에 살 바에야 왜놈이든 되놈이든 중요치 않다.”

 

'징비록(사진출처:KBS)'

KBS 주말사극 <징비록>에서 조선의 매국노 사화동은 류성룡(김상중)에게 그렇게 일갈했다. 반역자지만 왜구들의 첩보활동을 폭로하면서 목숨을 구걸한 사화동을 류성룡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던진 한 마디다.

 

실록에 등장하는 사화동은 진도 출신으로 일본에 잡혀가 온갖 충성을 다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죽음에 즈음해 던지는 일갈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현재에까지 와 닿는 듯하다. 왜구들의 출몰로 피폐해진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심지어 나라를 버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왕과 대신들이다. 사화동은 말한다.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네들 양반과 왕이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나라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양반과 왕은 붕당 정치라는 틀 안에서 권력 게임을 계속 하고 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동인을 서인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있지만 동인의 거두였던 최연경이 삼봉을 자처했다며 무고로 끌려와 옥사하면서 조정은 다시 윤두수와 정철을 앞세운 서인들이 장악한다. 왕은 이 동인과 서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의 균형을 통해 정치를 이끌어가려고 한다.

 

이 붕당정치는 정치 역학으로서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붕당정치 속에서 정작 민초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화동의 입에서 나온 비격진천뢰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미 조선의 군사기밀들이 첩자들에 의해 왜에 넘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선조와 대신들은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양반과 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쟁투가 국가에 드리워진 위기를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낙향해 쓴 <징비록>은 바로 그 피로 물든 산하를 뒤늦게 되돌아보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적어나간 책이다. 수차례 정치를 권하는 조정의 요구를 마다하고 <징비록> 집필에 말년을 쏟아 부은 이유는 다시는 그런 위기상황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 현재 왜 <징비록>이 다시 꺼내져 사극이라는 형태로 보여지고 있는가 하는 근거이자 의도일 것이다. 지금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돌아보라. 잘 사는 이들이야 더 잘 살게 된 시스템이지만 못 사는 이들은 거의 절망의 끝에 놓여진 상황이다. 물론 <징비록>이 그 위기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지만, 이 시대가 처한 위기는 그것보다는 경제적인 위기가 더 크다. 지금은 전쟁보다 무서운 게 경제위기다. 전쟁조차 경제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나라의 살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그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서민들의 조세부담을 더 얘기하는 상황은 저 사화동의 일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와중에 정치는 서민을 서로 호명하지만 사실 관심은 권력에 집중된 느낌이다. 모두가 서민을 얘기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다.

 

<징비록>이 그토록 긴 세월을 넘어 이 시대에 다시 재해석되면서도 어떤 공감대를 주는 이유는 거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지금의 서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아픈 인식에서 비롯한다. 앞으로 펼쳐질 임진왜란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삶이 도륙될 것인가. 그리고 이 위기의 국가를 구원하는 건 과연 누구인가. <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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